며칠 전 숨쉬는 바람님이 '스티브 잡스,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죽은 인문학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글 하나를 소개했죠. 비전 디자이너라는 분이 쓴 '스티브 잡스와 죽은 인문학의 사회'라는 글입니다. 좋은 글이에요. 동의하지 않는 점이 많지만, 한번쯤 읽어볼 만합니다. (굳이 흠 잡자면, "계몽주의의 사상과 열기는 광기에 치달린 프랑스 혁명의 이슬로 일찍 막을 내렸다."라는 구절이 제 눈에 많이 거슬립니다만)

 그런데 그 글을 읽다보면 프랜시스 베이컨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가 잡스에 견줄 수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에게서 찾아보자.

그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계몽주의의 막을 연 프랜시스 베이컨은 잡스가 엔지니어 출신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수학적 재능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뉴미디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산문(콘텐츠)과 인쇄술(플랫폼)의 결합이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지 알았다. 잡스가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이 만들어 낼 마력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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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을 들으면 인간인 이상 누구라도 프랜시스 베이컨이 당시의 미디어 혁명이라고 할 구텐베르크 인쇄술, 그것이 차후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에 관해 어디서 뭐라고 말했는지 그 내용이 궁금해지겠죠. 허나 아쉽게도 본문 가운데서 이에 관련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서 제가 직접 10분 날림 검색을 해봤더니 한마디 하긴 했더군요. 영문 위키백과를 보니 노붐 오르가논에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rinting, gunpowder and the compass: These three have changed the whole face and state of things throughout the world; the first in literature, the second in warfare, the third in navigation; whence have followed innumerable changes, in so much that no empire, no sect, no star seems to have exerted greater power and influence in human affairs than these mechanical discoveries.

인쇄술, 화약 그리고 나침반: 이들 셋은 전 세계에 걸쳐 사태와 사물의 전반적인 상태와 형편을 바꾸어 놓았다. 첫번째는 학계(문필업)에서, 둘째는 전쟁에서 그리고 셋째는 항해술에서; 또한 이로부터 (다시) 무수한 변화들이 뒤를 이었다. 인간세에 끼친 파급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의 어떠한 제국, 종파나 별도 이들 공학적 발견을 뛰어넘지 못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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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10분 날림 검색한 결과로 뭐라고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만, 만약 베이컨이 당시 뉴미디어에 관해 던진 언급이 이게 전부라면... 이게 전부라고 일단 가정하고 한마디하지요. 

 제가 문제의 글, '스티브 잡스와 죽은 인문학의 사회'의 필자라면, 베이컨 얘기는 안꺼냅니다. 글의 전반적인 논지와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필자가 말하는 스티브 잡스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실현될 뉴미디어의 혁명적 영향을 꿰뚫어 보는 인물입니다. 반면에 제가 위에서 인용한 베이컨은 그런 예언자적 통찰력을 발휘한 인물이라기보단, 오히려 뉴미디어(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야기한 변화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이후, 그 변화의 폭과 깊이를 사후적으로 평가한 인물이에요. 문제의 글에 갖다 쓰기에는 그다지 잘 어울린다고 보기 어렵죠.

 이 역시 아직은 성급한 단정입니다만, 전 말이죠, 온라인 상의 글이건 일반 서적의 경우 간에 1) 유명 사상가를 언급하면서 2) 명확한 출전을 밝히지 않고 3) 글을 좀 뽀사시하게 포장하려고 갖다 쓰는 듯한 구절이란 감이 오는 경우, 필자의 말을 거의 안믿습니다. 물론 베이컨이나 특정 사상가의 사상을 전공한 믿을만한 연구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죠. 그런데 또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출전을 명확히 밝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