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현기경玄玄棋經이라면 바둑 두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바둑의 고전입니다.
 얼마나 유명한 고전인가?  정.말. 유명합니다. 근데, 이건 지나치게 단순하네요. 
 이건 어떨까요. 대한민국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모른다면 굉장히 이상하겠죠? 바둑두는 사람이 현현기경이란 책의 존재를 모른다면, 적어도 중급 이상의 기력을 가진 동아시아 지역의 바둑애호가가 현현기경이란 책의 존재를 모른다면, 희귀(한데다 한숨이 나올만큼 교양머리 없고 무식)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책은 안천장, 엄덕보가 당시까지 중국에 전해내려온 각종 기서들을 널리 수집하고 정리해서 편찬한 책인데 중국 원나라 시대인 1394년에 나온 책이니만큼, 장장 600년 묵은 책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급수준의 기력을 닦는데 필독서로 권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바둑계 랭킹 1위인 이세돌 9단의 부친이 꼬맹이 시절의 이세돌 사범님을 현현기경으로 훈련시켰다는 사실은 바둑두는 사람치고 (적어도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프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둑에 미쳐본 고급 수준의 아마추어 애기가 치고 한번쯤 이 책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관자보와 함께 중국의 고전 기서로서 쌍벽을 이루며, 부동의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책입니다. 서양에서 바둑두는 사람들조차 고급자라면 다른 고전은 몰라도 이 책은 대개 압니다(일본식 한자음으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는 난점은 있지만...). 무협지로 치자면 말이죠, 이건 일종의 '비급'이에요, 비급. 아무나 서점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꽤나 이상한 비급이긴 하지만...

 
 현현기경에 관해 이 정도 설명을 해드렸으니, 이제 이 책과 동의보감 간의 몇 가지 공통점도 어렵지 않게 집어내실 수 있을겁니다.


 우선, 두 책 모두 실용적인 목적에 주안을 둔 기술서적입니다. 물론 전자는 바둑, 후자는 의학으로, 각각 그 분야가 다르지만요.
 둘째,  이 둘은 수백년이나 묵은 오래된 책입니다. (현현기경: 1,394 VS 동의보감 : 1,610)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당 분야에서 권위와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살아있는 고전'입니다.
 넷째, 양자 모두 그 당시까지 전해져온 해당 분야의 각종 서적들을 수집해 항목별로 정리, 분류한 편찬서들입니다. 
 다섯째, 양자 모두 크게 보아 중국문화권의 산물입니다. 현현기경이야 책 자체가 처음부터 중국에서 출간되었거니와, (제가 아는 한) 동의보감 역시 기존의 중국 의서들에 크게 의존한 서적입니다.
 여섯째, 이건 상술한 설명으로는 알 수 없는 점입니다만, 현현기경과 동의보감 양자 모두 백과사전적 편찬물입니다. 동의보감이 백과사전적 편찬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이 자리에서 더 말할 것은 없지만, 현현기경에 관해서만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그 내용은 바둑의 근본원리, 정석, 포석, 행마, 사활 등 바둑의 이론과 기술적인 분야 전반을 대부분 아우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다지 중요하진 않을지 모릅니다만), 양자 모두 중국의 음양이론을 유효한 설명원리의 하나로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책 간에는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쓰이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현현기경은 과거에도 지금도 꾸준히 '편집'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죠. 시대에 뒤떨어져 더 이상 기술서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즉, 역사적 가치만을 가진 부분)들은 모두 '삭제'된채 출간되고 있습니다. 물론, 완역본 역시 시중에서 구할려면 구할 수 있죠. 그러나 더 이상 '기술서'로서 취급되진 않습니다. 역사적 호기심, 또는 바둑의 발전사라는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떤 부분이 삭제되어 출간되고 있는가?  부분적인 돌의 사활에 관련된 맥점, 묘수의 학습하는데 현재까지도 유효한 묘수(사활)풀이 파트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삭제되어 출간됩니다. 되풀이 하지만, 역사적 연구나 관심거리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 부분들 (원리적 이론을 서술한 부분이라든지, 포석, 행마, 과거 중세시기의 정석 등)은 문자 그대로 싸그리 도려낸채 나옵니다. 예외라면 편찬자들의 서문 정도지요. (완역본을 구하려면 따로 찾아봐야 합니다)  둘째, 그 묘수(사활)풀이 파트도 꾸준히 재검토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해답풀이에 오류가 없는지의 검토가 프로기사들에 의해 중국, 일본에서 수백년간 이어져 왔습니다. 20세기 들어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은 수정본 현현기경이라면 대표적으로 하시모토 9단이 그 성과를 정리한 현현기경, 또 오청원 9단이 정리한 수정본 현현기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풀이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바른 풀이는 어떤 수순인지는 해설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요컨데, 일종의 주해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질문 하나 해봅니다.  바둑이 학문인가?  또는 바둑에서 '좋은 수'란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과거 수천년간 기사들이 개발해 온 그 모든 이론? 및 발견법, 정석, 포석의 패턴들이 의학을 포함해 자연과학 및 사회, 인문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에 걸맞는 지위를 가지는가?

 
 조치훈 9단의 말을 빌린다면, "그래봤자 바둑"이고, 정치학을 전공한 문용직 사범님의 판단을 믿는다면 넉넉히 봐주어도 사회과학이론들의 원시적 수준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제가 볼 땐, 현재까지 아주 일부분 (예컨데 끝내기 중에서도 극히 지엽말단적인 부분에 한해 게임이론을 응용해 개발된 수학정리 등)을 제외한다면, 이론이래봤자 그 수준이 대단히 원시적이며, 그 사회적 중요성에 있어서도 감히 '의학'에 견줄 바가 못됩니다.

 
 이런 하찮기 짝이 없는 잡기인 바둑에서조차, 기술서로서의 고전은 '편집, 가공, 개정 및 (필요한 경우) 부분적인 삭제 또는 전면폐기'의 대상입니다.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은 고서학습 커리큘럼은 특정 분야의 기술적 전문가(그게 바둑이건 의학이건 뭐건)의 양성과정이라기보단, 고전 문헌학 또는 해당학문의 발전사 연구과정일 뿐입니다 (한의학이라면 한의학 발전사). 구태여 의학이나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같은 어엿한! 학문까지 갈 것도 없이, 잡기인 바둑에서조차 이런 정도는 말이죠, 그냥 상식으로 통하고 있어요.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동의보감'등 옛 한의학 서물을 다루는 한의학계의 방식이나 관점을 제가 왜 어처구니없어 하는지 (상식이하!), 또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함에도 끝끝내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구스타브님과 같은 한방술 옹호론자들과의 대화를 제가 왜 포기하게 됐는지, 그 연유가 어느 정도 이해 되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