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가 주도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를 일본의 새역모 교과서와 비교-대조해겠다고 생각한 일이 벌써 2년도 넘은 일인데, 지금껏 어기적 어기적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야 문제의 그 일본 교과서를 손에 넣어 한번 통독해봤는데, '생각보다는' 상태가 양호?하네요. 

 이미 철지난 뒷북입니다만, 아크로에 쓸만한 자료를 축적한다는 의미에서 조만간 제 4장 - 근대 일본의 건설, 제 5장 세계대전의 시대와 일본, 이 두 장을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맛뵈기로 제 4장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기술 중 일부분을 발췌 번역해서 올립니다. 

능력만 닿는다면야, 중화민국 및 대만 측 교과서도 같이 다루고  싶은데, 아직은 제 중국어가 워낙 허접한 관계로 그 작업은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네요.

참고할만한 서적 몇 권 및 사이트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한국·중국·일본·대만
(나카무라 사토루 편저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 옮김 | 에디터 2006 ) 
- 편자인 나카무라 사토루씨는 한국의 뉴라이트, 식근론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셨다는 바로 그 분입니다.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박태균, 유용태, 박진우 공저 | 창작과 비평사 2011)
-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꽤 기대되는 책입니다. -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 조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 이삼성, 한길사 2009
-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개인적으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일본 새역모 홈페이지 - 링크
각종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근현대 파트 번역본을 읽을 수 있는 곳 (한국어, 영어 등) - 링크



*** 혹시 일본의 새역사 교과서와 한국의 근현대 대안 교과서의 내용을 대조검토한 서적이나 논문이 있다면, 아시는 분은 댓글이나 쪽지로 좀 알려주시길. 참고 좀 하게요. ***

 

 
 중학사회과 교과서 - 새 역사 교과서 < 新しい歴史教科書  (西尾 幹二, 扶桑社 2001)>  


 
 제 4장 - 근대 일본의 건설



 아편전쟁과 일본, 중국 조선의 반응 (174~175쪽)



 청나라가 영국에 패함으로써 홍콩을 할양하고 개국을 했다는 정보는 「네덜란드 통신(オランダ風説書)」을 통해 즉시 우리나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막부 말기의 지도자와 지식층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위기의식이 희박해, 9개월이나 지난 뒤에야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그 내용 역시 간단한 것이어서 지도자층도 국제정세의 급변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전쟁에 패한 당사자인 중국인 자신들 역시, 일본인을 놀래킨 만큼의 충격은 받지 않았다.

 중국인은 고대부터 몇 차례나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지배당한 예가 많다. 그러나 지배하는 이민족을 오히려 자국 문명으로 끌어넣어 동화시키고 마는 경향이 강했다. ...(중략)... 그런 가운데 구미열강의 압력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청나라는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 사회의 현 상태, 문명 그 자체를 재인식하려는 관점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청나라가 생각하게 된 것은,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의 일이다. 청나라는 근대국가의 건설의 방법을 배우고자 대량의 유학생을 일본에 보냈다. 고대 견당사와는 그 방향이 뒤집힌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 일본사의 전제 (184쪽)


 이제부터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되는 근대 일본사를 배울텐데, 이와 관련해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자 한다.


 첫째, 구미열강의 식민지 지배권의 확대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고 대국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역사는 열강의 진출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북으로는 부동항을 구해 남하해오는, 최대의 위협 러시아가 있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둘째, 이러한 국제정세속에서 중국(청)은 -아편전쟁의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구미열강의 무력위협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다. 중국의 강한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조선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중국인은 예전부터 자국의 문명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영국 등을, 세계의 변방에 자리잡은 야만스런 민족으로 간주해, 서양문명에 대해 경의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중국은 점차 열강으로부터 침식당해 영토의 보전조차 불확실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셋째, 일본은 에도시대을 통해 무가사회라는 측면이 있어, 열강의 무력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해 서양문명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 정책을 전환했으나, 중국 및 조선 양국은 문관지배사회였기 때문에 열강의 위협에 대해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는 관점이 있다.


 


 강화도 조약 관련 기술 (200쪽)


 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서 측량을 하는 등 시위행동을 함에 따라 조선군과 교전을 벌인 사건 (강화도사건, 1975년)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76(메이지 9)년, 조일수호조약(日朝修好条規-일조수호조규)이 체결되었다. 이는 조선측에게 불평등한 조약이었으나, 오랫동안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사진설명) -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조선수역에 파견, 그 이후 일본과 조선은 교전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중화질서의 붕괴 (216쪽)


 동아시아 지도를 한번 살펴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진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으로부터 조선반도가 한쪽의 팔과  같이 돌출되어 있다. 당시 조선반도가 일본대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일본을 공격할 절호의 기지가 되어,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어려워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즈음 조선에 종주권을 가진 것은 청나라였지만 그 이상 무서운 대국은 부동항을 찾아 동아시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에 착수해, 그 위협은 일본의 눈앞으로 박두해 오고 있었다. 당시 일본정부 내에서는 러시아의 힘이 조선에 미치기 전에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는 조약을 각국으로 하여금 체결케하고, 또 그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은 군비를 증강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