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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는데 탑승인원에 비해 구명보트는 작아서 모두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롤스의 정의론에 입각해 가장 공정한(fair) 해법은 무엇일까요? 기고자에 따르면 딱 하나의 공정한 해법은 배안의 모든 사람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고자는 원래 롤지안이었다가 롤즈의 아이디어를 버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공리주의에 따른 정의론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약자들을 희생하는 사회에서 최대행복을 추구할 경우 예를 들어 소수의 희생으로 노예제를 허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에 롤스는 계약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직관주의에 따른 정의론을 주장합니다.
문제된 상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포류하는 사람들간에 특수관계(모자관계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원수관계라든지)또는 특수상태 (어느 누가 정신박약자라든지 하는)가 없다고 가정합니다. 문제된 상황에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가지 해법이 가능합니다.
1. 가장 생존력이 높은 사람들 (예 : 건강이 양호한 성인 남자)을 살리고 생존가능성이 낮은 어린이, 노약자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2. 아니면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이 보트에 탈 수 있도록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순으로 1명씩 바다에 던지는 겁니다. (어른 한명 희생해서 아이 두명 살리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최대행복의 측면은 생환했다는 점에서 행복의 크기는 모두가 같으므로 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최대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논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공리주의에 따를 때 희생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한 자유가 있다는 롤즈의 정의관에 따르면.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것이고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롤즈의 정의론 (정의의 두원칙 : 원칙1. 평등우선, 원칙 2. 차등은 필요한 경우에만 차등. 전제조건 : 필요한 경우란 차등이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최소후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잇는 경우, 기회는 균등해야)에 따르면,
1. 평등을 우선적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차등될 수 있도록 한다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게 추구되어야 합니다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차등대우가 필요한 경우이므로 차등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2. 그럼 차등대우를 해보려고 하는데. 차등대우는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시키거나 적어도 그에 기여할 경우 허용됩니다. 또 롤즈는 차등은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의 차등대우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그가 생명을 잃는 순간 그는 처지가 개선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거든요. 즉, 차등대우를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차등대우 받는 당사자는 죽어버리므로 차등대우 받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차등대우를 적용한다는 것과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으로서 애초부터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에 따르면 구명보트에서 탑승인원 초과된 상황에서는 차등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차등대우를 할 수 없게 되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는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면 결국 모두가 죽어야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애초에 롤즈가 전제한 것이 계약론적 가설이라는 점에서 ... 가설의 전제를 살펴볼 때, 롤즈의 정의론의 예외적인 경우로 보면 될 듯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전제조건들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 가운데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제 요구에는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탑승인원 과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서열이 매겨질 수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요구조건이거든요.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하겠습니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이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차등대우가 생명을 잃는 것으로서 차등을 허용할 때 장기적인 조정작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보다는 롤즈의 정의론이 타당하고 롤즈의 정의론이 여전히 존재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해놓고서 롤즈의 정의론을 버렸다고 말하는 그 기고자는 현실감각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BeyondScience 님께서 제 글을 오독하신 것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외적으로 공리리주의는 적용될 수 없다'가 아니라 "공리주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비정상적 가정하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반대로 읽으셨네요. 한 독자(철학자?)가 롤즈의 한계를 설명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포기하고 자신은 공리주의로 회귀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가 잘못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했죠. 그러니 당연히, 공리주의는 타당하지 않고 롤즈의 정의론이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최근의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고있지 않나요?"라고 하셨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공리주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고 그에 따라 롤즈의 정의론이나 포퍼의 비판적합리주의 내지 가설연역적 방법론 등이 나왔습니다. 즉, 공리주의는 단순히 연혁적 의미만 있는 것으로 압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은 공리주의의 흐름이 아니라 칼 포퍼의 비판적합리주의로서의 점진적 사회공학에서 주장된 내용입니다.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72)라는 책에서 언급했죠. 합리적인 공공정책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행복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최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최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도 그가 했고요.
저도 20년 전에 학부에서 법학 공부한 거라서 업데이트 된 내용은 잘 모릅니다. 그 때 법철학 수업시간에 공리주의, 롤즈의 정의론, 라드부르흐의 정의론 및 톨레란츠론 (프랑스의 똘레랑스론의 원조는 라드부르흐의 톨레란츠론)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 등을 공부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롤즈, 라드부르흐, 칼 포퍼 등이 정의론 등을 다루는 규범철학에서는 통설이고 그 이상의 이론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글의 초반을 읽으면서 나름 곰곰이 생각했던 것들이 글 후반에 나와있어서 반가웠습니다. ㅋㅋㅋㅋ
어떤 논리든지 그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모순적인 상황이 나타날 수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령 자유주의의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장기의 자유로운 매매나 심지어 목숨을 돈 받고 사고 파는 것을 반대하면 안되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죠. 결국 어떤 논리든지 그 논리를 실험하는 모델은 늘 현실의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난파된 배의 상황을 롤스의 상상의 계약 혹은 망각의 투표 논리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죠. 자신이 싸움을 못하는 약골이거나 혹은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일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완력같은걸로 서열을 매기는 방식은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거 같습니다. 결국 약자들이 먼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어야 한다는 쪽에 투표를 하겠죠. 실제 난파선에서는 그렇게 약자부터 살리는 방식으로 하지 않나요? 타이타닉에서도 그랬던 것 같고
그래서 난파선에 탄 사람들이 상호간 서열을 매길 수 없는 완전한 평등 상태에 있다고 가정을 해야만 롤스의 논리를 깰 수 있는데, 그런 모델은 이미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롤스의 논지를 깼다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현실이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라면 애초에 롤스가 굳이 힘들게 정의론을 주장하지는 않았겠죠.
저는 정의론이니 하는 것들을 인간이 만들어 낸 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의식의 좋은 예를 들면 '예절'이 있습니다.
머리를 숙여서 인사하거나, 손과 손을 맞잡아서 인사하거나, 팔을 들어서 인사하거나, 뺨에 뽀뽀하면서 인사하거나, ........
어느 방법을 택해도 그게 인사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써도 되고, 저 방법을 써도 되고,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인간에게는 정의롭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논리적으로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론을 궁리해 낸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로 인간을 규정하려고 들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본문의 예처럼 논리적인 문제도 발생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쪽수의 문제도 발생하고,
시대에 따라 지지하는 사람의 쪽수가 변동하는 시간의 문제도 발생하죠.....
열자列子였다면 정의론 자체를 따지지 않고 그냥 패스했을 겁니다.
열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거 니들이 졸라 따져 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동물도 그렇지만, 인간은 본래 윤리규정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거덩.... '
초원의 늑대에게 다른 동물을 사냥해서 먹을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를 잡아먹을 권리는 있는 걸까요?
이런 건 따져 봐야 무의미합니다.
그냥 인간이 소를 잡아먹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를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논리를 들먹일 필요 없이, 그냥 우리의 선택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사형제를 찬성하거나 반대할 논리를 들먹일 필요 없이, 다수결로 정한 다음 그냥 우리의 선택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우리는 논리에 구속되어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선택한 것을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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