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영호남 지역주의의 발단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1969년 대선 당시 이효상의 지역감정 선동 사건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지역대립 구도도 없었을까? 정치나 사회 현상을 바라볼 때 선동이나 켐페인만으로 인간의 의식이 바뀐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접근에 불과하다. 마치 아이 하나 더 낳기 운동을 벌이면 출산율이 높아지리라고 믿는 어리석음과 같다. 그 징그러운 MB가카께서도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맑스주의에서 유래한 혁명이론들이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물질적 조건이 인간의 의식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탁월하다. 물질적 조건에 상관없이 감정적 호소나 비난으로 몇 사람의 의식을 영원히 바꿀 수 있고, 구성원 전체의 의식을 잠시 바꿀 수는 있지만, 전체의 의식을 영구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집단 의식은 늘 그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호응하는 수준으로 수렴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지역주의와 관련하여 유시민처럼 영남의 지역주의를 치료가 필요한 정신병으로 바라보거나, 정치인들의 선동에 넘어간 허위의식쯤으로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한심한 것은 진보정당  맑스주의 정당들까지 지역주의의 물적 토대를 고민하지 않고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안일한 인식하에 많은 계몽적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당연한 결과이다. 지역주의는 허상이 아니라 물적 토대를 반영한 견고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상층부의 의식변화 운동이었던 김대중 정부의 동진정책과 노무현 방식의 지역주의 극복 노력이 모두 무위로 그친 것은 그래서이다. 따라서 이제는 지역주의에 대한 분석틀을 바꿔야 하고,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출산율은 아이 하나 더 낳기 캠페인이 아니라 개인에게 전가된 양육 비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단순한 이치가 지역주의 분석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을까? 이 글은 이처럼 과거 지역주의를 대하는 진보개혁진영의 잘못된 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1. 호남 차별의 역사적 배경
전술했다시피, 이효상의 지역감정 선동 사건은 지역주의의 발단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지역차별 역사의 과정속에 등장한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즉 호남지역 차별의 역사는 그보다 더 오래된 역사이고, 지역감정 선동 사건은 단지 밑바닥에 형성된 물질적 사회 구조가 정치 의식의 영역으로 확산된 현상이라는 말씀이다.
 
그럼 호남지역 차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부 사람들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를 들고 있지만 그것은 호사가들의 주장에 불과하고, 근대적인 의미의 지역 차별은 바로 1904년 일본의 주도하에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바로 그 연원이다.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한반도를 종으로 연결하는 교통축이 완성되자 이전까지 소외된 지역이었던 영남이 식민모국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을 배경으로 발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훨씬 전이므로,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하는 호남의 우세가 흔들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착근된 지역간의 희미한 격차는 이후 나비효과처럼 번져나가는 계기가 된다. 
 
그 후 영남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영남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이때 한국 사회에 소위 본격적인 영남 인맥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호남이 여순반란과 4.3항쟁,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의 점령과 수복을 반복하면서 많은 인적 물적 기반이 파괴된 반면에, 영남은 그것들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그에 더해 대량의 피난민 유입이 벌어지는데 이러한 값싼 노동력의 대폭적인 증가는 이후 영남 지역의 산업화가 보다 수월하게 추진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이때부터 오랜기간 지속되었던 호남 우세는 마침내 끝이 나고, 영남의 우세가 시작되었다. 이런 배경하에 점점 치밀해진 군부 정치 경제계의 영남 인맥은 이후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영남지역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본과의 수교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성사되고, 그런 배경 아래서 60년대 말 공화당의 지역감정 선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포항에 제철소가 지어진 것을 필두로, 삼성 현대 엘지 대우등 무수한 영남 기반의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 아래 재벌대기업으로 성장해가고, 김대중으로 대표되었던 호남 인맥이 패가망신의 고난을 당하고, 일개 영남 출신 장교들의 친목 모임이었던 하나회가 정권을 잡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마침내 남한을 동서로 분단시킨 영남패권주의의 등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줄달음친다.

2. 호남 차별의 경제적 배경
산업화 이전의 어떤 국가가 근대적 산업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나 도입이 필수적이다. 현재의 선진국들처럼 식민지와 자국의 하층노동자의 잉여를 축적하는 방식이 있고, 스탈린이나 히틀러처럼 강력한 국가 권력을 통해 국가의 잉여를 쥐어짜서 산업 구조 건설에 투입하는 방식도 있고, 중국처럼 외국의 자본을 유치해서 자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결합시키는 방법도 있다. 한국은 스탈린의 방식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외자를 유치하는 방법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썼다. 여기에 미국의 원조, 일본의 배상금, 월남전 참전의 용병비가 더해졌다. 그러나 산업의 지리적 배치가 자연스런 방식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던 영남 인맥의 이해에 맞추어 산업의 지리적 배치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수도권과 충청 일부를 거쳐 영남으로 이어지는 라인의 지역적 안배는 필연적으로 호남의 소외를 낳았고, 더욱이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임금 인상 억제 정책이 농산물 가격의 통제로 이어져, 당시까지 농업사회였던 호남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불만이 점증하던 호남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노선을 표방하던 김대중을 선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또한 몰락하는 농업은 대량의 호남인들을 공업화가 진행되던 수도권과 영남으로 이주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진입장벽이 낮은 하층 직종에 재배치되었다.

당시의 호남인들은 국적만 한국이었을 뿐 본질적으로 현재의 동남아 중국등의 이주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은 존재였다. 현재 외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직종, 즉 건설 소규모 공장 식당등의 일자리는 과거 호남인들의 몫이었고 그들은 도시 외곽의 빈민층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호남인 혐오와 천시라는 문화적 현상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여기에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 발전이 수도권과 영남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트리클 다운까지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의 입장에서는 하층 계급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트리클 다운을 감내해야 하는데, 만약 특정 지역을 배제할 수 있다면 그 부담은 감소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여기에 차별적인 트리클 다운을 영남에 대한 우대로 포장해서 정치적 이익까지 획득하고, 그러한 혜택을 해당 지역민들의 우월감으로 전환하여 정치적 결속까지 이루어낼 수 있다면, 자본으로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금상첨화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효상의 지역감정 선동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터져나온 사건이고, 이후 조직적으로 호남을 차별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본과 그에 결탁한 지배층의 정치적 목적을 획득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호남지역 차별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되고 기획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남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은 필연적으로 자본과 대립할 수 밖에 없고, 그 정당의 정책과 노선이 진보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남인들이 진보적인 정책들에 거의 본능적인 선호 경향을 드러내는 이유이고, 민주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역주의를 해결하려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물적 토대를 바꿔야만 가능하다. 역사의 잘못된 진행을 거슬러 정상으로 회복시켜야 하고, 경제적으로 왜곡된 분배 구조를 혁파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제까지 결합시키는 정당만이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진보정당의 자세라고 할 것이고, 이에 가장 근접한 정당은 아직 민주당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