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연과학의 혁명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이 추적되지 않고 또 자연과학자들이 철학잡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전투적 유물론은 전투적일 수도 유물론적일 수도 없다. 레닌,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대하여>

사회주의 이론의 세 거두,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모두 자연과학의 목소리에 자세히도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저작에서 동시대 자연과학적 성과들과 이를 헤겔의 변증법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하나의 과학이론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로부터 그들의 이론의 확실성을 보장받고 싶어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과학의 가치지향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내가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솔직히 잘 알지 못하겠다. 19세기 말부터 이를 고민했던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의 저술들만 훑어봐도 이것이 아주 때늦은, 그리고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논의임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이론가들과 과학자들만이 자연과학과 가치의 관계를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던 사상가와 과학자들도 그런 고민을 했다. 칼 포퍼가, 마이클 폴라니가, 로져 스페리가, 존 듀이가 모두 그런 고민을 했던 인물들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국내의 과학문화는 후졌다.

완성되지 못한 저작 <자연의 변증법>에서 엥겔스는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한 연구로부터 변증법을 구제하려고 노력한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불변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혁명의 어떠한 철학적 지지도 볼 수 없었던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과 생물학의 진보개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생물학적 변증법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도 또 달랐다. 이는 엥겔스가 속류 사회진화론자 루드비히 뷔흐너에 대한 논쟁적인 책으로 <자연의 변증법>을 기획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레닌과 엥겔스가 공히 동의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논제가 부르주아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투쟁이라고 보았던 두 인물이, 나아가 그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일반화시키고 이를 19세기 자연과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자뻑하던 두 인물에게 고고한척 하며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말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부르주아지의 그것으로 보였다는 데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레닌과 엥겔스가 과학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도 이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분석과 적용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적용으로부터만 나온다.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그리고 맨하탄 프로젝트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과학자들로 하여금 상아탑속에 움츠리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틈만 나면 지식인들이 과학자들을 공격하는 약방의 감초가 된 우생학은 줄기세포 논쟁과 인간 복제 문제 등등을 거치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취급되고 있다. 우생학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류의 복지에 해가되었고, 불행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섣부른 적용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우생학의 역사가 이를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맨하탄 프로젝트가 과학의 사회적 적용을 막는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실은 서구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많은 분석이 있었는데, 국내의 후진 과학문화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안다. 위의 사례들에서 과학자들은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주도적인 위치에 과학자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사례들에 대한 자세한 반박 대신 나는 한가지 명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이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무의미한 논변으로부터 과학의 가치지향성을 정당화할 명분까지를 확보할 근거가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연과학의 발견물들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그 발견물들을 사용하는 데에 있다. 그 과정에 가치가 개입한다. 과학의 발견과정 자체에 가치가 개입한다는 것이 과학사회학자들 중 일부의 주장이다. 여기서는 그런 주장을 다루지 않겠다.

우생학의 발전에 그 어떤 사회적 가치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억지다.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는 이러한 억지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분명 우생학적 연구에는 백인 과학자들의 인종적 편견과,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 경험이 녹아들어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지만(티데만의 경우가 그렇다. 사이언스타임즈에 내가 쓴 글 '하이델베르그의 위대한 과학자' 를 참고할 것. 그런데 도대체 과학에 관련된 내 글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미르이야기는 읽고 말하는 건가?) 그 경우에도 과학자가 과학적 발견물을 사회적 개입 없이 가치중립적으로 판단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 경우던 과학적 발견에 가치가 개입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또한 우생학은 독일과 미국의 국가 이익에 의해 가장 비참한 비극을 경험했다.

리센코주의는 조금 다른 예다. 여기서 우리는 이론적 독단이 가져온 폐해를 목격한다. 리센코주의는 측정량에 이론이 승복하는 과학의 세속화과정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례다. 리센코주의에도 과학적 발견에 가치가 개입되는 과정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합당한 유전학적 이론만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라마르키즘이었으며 따라서 이에 반하는 모든 발견들은 매장되고 합당한 발견들만이 발표될 수 있었다. 우생학과 달리 리센코주의의 문제는, 이론의 불변성, 확실성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폐해와 관련된 것이다. 그것을 이념이라 바꾸어 불러도 문제가 없다. 레닌과 엥겔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도, 그들이 자연과학의 성과들에 대한 탐구로부터 자신들의 이념,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념의 정당화 근거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녹아 있다.

맨하탄 프로젝트의 경우는 국가의 이익이 과학과 결부될 때 나타나는 문제를 보여준다. 국가의 이익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해도, 결국 이는 리센코주의가 보여준 이념종속성과 다른 문제가 아니다. 과학이 그보다 강력하게 현실을 지배하는 힘에 의해 종속되었을 때, 과학은 언제나 왜곡되었다. 그리고 그 원죄는 모조리 과학 그 자체 혹은 과학자들에게 전가되었다. 너무나 쉬운 결론이다.

세 가지 사례 모두에서 과학적 발견물이 사회에 적용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학적 발견물이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다. 세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과학적 발견이 전혀 과학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사시을 알 수 있다. 우생학과 핵폭탄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악용되었다. 리센코주의는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왜곡했다. 여기 어디에도 과학적 발견물이 과학자 사회내에서 '과학적'으로 사용되는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물의 과학적 사용의 예는 인류역사에 수두룩하지만, 우리는 우생학과 같은 반례들로만 이를 부정하려 한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과학적 발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끝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과학의 세속화란 이론이 측정량에 의해 끊임없이 제한받는 과정이다. 측정량의 도전을 거부하는 이론은 과학자 사회에 의해 버림받는다. 과학적 발견이 승인되는 과정, 그러한 승인과정을 주도하는 과학자 사회의 의사결정과정, 그것은 포퍼에 의해 열린사회의 가장 좋은 사례로 인용되곤 했다. 실은 그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중함의 다른 이름이며, 독단을 인정하지 않는 열린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의 발견물들은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사회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과학적 발견물들이 그럴 수 없다면, 그 어떤 지적 성과물들도 그러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문제는 과학적 발견물들을 사회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과학적 발견물의 가치중립성이라던가, 그것의 적용불가능성 따위를 논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지점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적 발견물들은 그 발견물을 만들어낸 과학의 방법론과, 그러한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 과학자들에 의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물들이 과학자에 의해 주도적으로 적용되는 역사적 사례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한 사례는 겨우 한 두건이었으며 그마저도 이념과 독단이 횡행하던 사회적 혼란기에 시도된 것들이었다.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로부터 충분한 자성의 기간을 거쳤다. 더이상 그러한 예에 주눅들 이유는 없다. 우생학과 같은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과학이 더이상 사회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강령따위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해야만 했던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해결에 관해서다.

과학사를 공부해보면,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물의 사회적 적용에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가 드러난다. 그들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로서, 과학자들은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지닐 수 있었다. 나는 신중함이라는 미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과학적 발견물들이 승인받는 과학적 방법론의 시스템과, 그러한 승인과정을 주도하는 과학자사회이 민주적 의사결정시스템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시스템이 갖추어졌을 때, 과학자의 신중함이라는 미덕이 플러스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난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막연히 나는 과학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하며, 그들의 지위가 격상되어야 하고, 그들이 직접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가 아름다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여성 국회의원이 많아지면 국회가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와질것이라더니 전혀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나의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과학자들에게 가치중립성 따위에 매몰되지 말고, 그러한 신화를 깨고 사회에 책무를 다하기 위해 사회로 나오라는 과학사회학자들의 주장에 소극적으로 반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역이용한다. 그래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전면에 나서겠다. 그러니 사회학이 사회에 적용되는것처럼 과학이 사회에 적용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당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으니, 과학의 객관성과 절대성의 영역을 당신들의 요구처럼 약화시키고, 상아탑에 갇힌 과학자들을 모조리 사회로 끌고 나오겠으니, 과학자들이 정치를 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로 서는 데 당신들이 도움을 좀 달라. 이렇게 말하면 과학사회학자들이 뭐라고 말할까.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 박명수가 노래를 그따위로 망쳐버렸는지 더 궁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