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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컴의 면도날을 언급하신 유물론자 오마담님의 댓글을 보면서,
무신론자, 유물론자이면서 가끔이나마 존재의 경이로움, 신비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의 유신론자들보다 神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신론자들은 신에 대한, 신과 관련된,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관념들과 미신들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神에 대한 온갖 관념들과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지만,
신은 그런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관념이나 이미지, 그것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관념들과 이미지들 밖에 있는, 존재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존재 자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에서도 신은 존재 자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신을 존재 자체로 이해한다면 인식이 완전히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존재 자체에는 어떤 관념도, 이미지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어떤 분리도 없습니다.
존재 안에는 수없이 다양한 모습들이 있지만,
실상은 나와 너도 없고, 이것과 저것도 없습니다.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 구분은 관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직 존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이면서 모든 것으로...
신은 존재 자체이면서 존재의 근원인지도 모릅니다.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근원.
신이라는 관념조차 붙을 자리가 없는 존재이자 존재의 근원.
2.
단순하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만약 신이 사랑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는 "어떤 조건도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만약 신이 용서하는 신이라면,
신은 어떤 조건도 없이 용서하는 완전한 용서여야 합니다.
만약 신이 모든 걸 용서하는 신이라면,
신은 죄에 대해 벌을 주는, 심판하는 신일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신은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신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의 선악과 비유는
아담이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면서,
[나와 너를, 나와 세상을, 이것과 저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게 되면서]
신과 분리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에게는 분별이, 판단이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분별이, 판단이 신에게서 분리되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신은 무엇보다도 판단하지 않는, 분별하지 않는 신이어야 합니다.
죄를 판단하지 않는, 죄를 심판하지 않는 신이어야 합니다.
완전히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의 신, 용서하는 신, 에덴동산의 신은 완전하게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신,
용서하면서 죄를 벌하는 신,
죄를 벌하면서 사랑하는 신,
이런 신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신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3.
신은 무한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신이 무한하다면, 신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신 바깥에, 신과 별개로, 신과 분리되어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면,
신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신이 무한하다면, 신은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이 전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신은 '존재'..라는 제 얘기와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듯해서 끼어들어 봅니다.
신은 단지 '존재'이기만 해야한다는 이해는 기독교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이해의 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얘기와 동시에 저는 신께서 자신을 모든 존재의 창조자임과 동시에 모든 존재들의 약함과 악함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말씀 또한 드렸던것 같아요..
즉 창조자와 구원자..라는 이 두 가지 축이야말로 신이 자신을 드러내주신 두 가지의 모습이며 신에 대한 영원한 이해를 구성하는 원리라고 할만합니다.
이 두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를 정당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죠..
그렇다면 신은 왜 구원자가 되셔야 할까요?
그것은 세상의 악이 존재함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럼 신의 선한 창조가 사실이라면 악은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기독교인으로써 저는 악이란 하나의 실체이기 이전에 의지적 선택으로 인해 귀결되는 결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 진정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그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연적으로 신을 선택할 수도 신을 거절할 수도 있는 종류의 자유의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가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사실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악을 피하고 선한 선택만 하도록 귀결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네모난 원을 그릴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신이 인격적이며 선한 분이시며 인간에 대해 선한 의도를 품고 있으시더라도..
그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하여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사실이라면..
'자유의지' 와 '필연적 선의 선택' 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신이 귀하게 보시는 바의 가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선'만을 선택하도록 창조된 인간이라면 그의 선택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면 '엄마 진심으로 사랑해요'라고 말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보트 아들'의 말에서 감동받을 엄마가 없듯..
'선'만을 선택하도록, 하나님만을 경배하도록 정해진 인간(사실상 로보트)의 경배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진정한 교통을 할 수 없다고 느끼셨을 것 또한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 속에서 선한 선택을 하는 것의 가치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전혀 맛과 관련없는 화학물들의 혼합에서 맛이라는 전혀 새로운 층위가 창발하듯이..
여러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속에서 선을 선택하는 그런 선택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창조된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는 새로운 창발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제게는 그리 논리적인 모순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신이 필연적으로 '선'만을 선택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보트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처럼 선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되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을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알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런 인간이해에 대해.. 기독교의 신에게 모든 힐난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그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를 물어본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다른 인간관을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인간관을 가지고 있기는 한걸까요?
인간은 자유가 있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도 따르는 존재로 존재한다..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그리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그들은 뭔가 이런 인간관과는 다른 인간관을 제시할 수 있어야할것입니다.
비난받지 않을만한 다른 인간관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던가요?
저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인간관에 대해서 거의 유사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독교의 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그저 비난하고 싶은 이들에게 비난하기좋은 어떤 꺼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악'을 선택하는 것의 책임을 신의 창조의 악함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근거에서 논리적인 모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신의 '선'을 선택하지 않고 '악'을 선택함으로 인간들과 모든 자연속에 일어나게된 모든 파괴적인 결과들을 보노라면.. 정말로 자유의지란 인간에게 그토록 가치로운 것이었던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이 '인형'으로서의 모든 누림을 받는 인간보다 정말 더 좋은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로보트나 인형같은 인간이라면 과연 신의 형상을 입을 존재로서 존귀하게 보실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듭니다.
이 세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든 자유롭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 세계로서.. 그 선택의 자유는 누리되 그 결과의 책임은 신에게 돌리며 면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현실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가치로운 선한 선택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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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에는 어떤 관념도, 이미지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어떤 분리도 없습니다.
존재 안에는 수없이 다양한 모습들이 있지만,
실상은 나와 너도 없고, 이것과 저것도 없습니다.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 구분은 관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직 존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이면서 모든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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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들으니 폴 데이비스가 [코스믹 잭팟]에서 다원우주론에 대해서 코멘트한 말이 생각납니다.
위의 이런 말씀에 대한 제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말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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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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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에 종교에 대한 지식은 무신론자들이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 해요. 신도들은 편차가 무척 큰 듯 싶더군요.
http://www.veritas.kr/contents/article/sub_re.html?no=8694
기독교 신론의 경우 창세기 3장 22절에 이런 말이 있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즉 이미 하나님은 자신만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기 선악의 기준이 아마 바오밥님의 말씀데로 분별하지 않는 것이 선이라고 보면 바오밥님의 논의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분별하기 시작한 인간이 분별로 자기를 실체화 시키서 나와 남을 분리하고 나아가 그 분리된 에고만의 욕심에 갖혀 있는 것에 대해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는 에고의 욕심으로 이제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먹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 있구요
사실 선악의 문제에서 기독교정통신학의 천국지옥교리는 특히 예정론과 연결된 고리는 바오밥님의 논의와 상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즉 거기서 신은 누구는 용서하고 누구는 벌하는 신이니깐요. 그것도 특정 누구를 구체적으로 알고 믿었냐의 유무에 따라서요. 그것도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채로 말이에요.
이런 난점을 해결하면서 현상계의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건 바로 연기로 인한 끝없는 윤회가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선만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 즉 바꾸어서 말하면 모두가 분별심을 포기하고 너와 나가 없다는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갈때 나아가 모두가 다 함께 견성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일때 이 모든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죠.
바로 이 맥락에서 자기만의 해탈 열반이 아닌 우주 전체의 해탈 열반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게 바로 화엄경을 주축으로 하는 대승불교죠.
그리고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 같은 책은 종교의 본질이 먼가를 탐구한 것인데 한번 읽어볼만 합니다.(이 책 역시 이사하면서 사라져버렸네요.) 특히 계몽주의의 거센 도전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종교 자체의 의미에 대해 천착하죠.
옷토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결코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옷토는 자신의 학문적 목적을 동시대 다른 정통주의 신학자들(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등)과는 달리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옷토가 활동하던 당시는 18세기 이후 서서히 익어가던 계몽주의 사조가 극성기를 맞이하던 때이다. 계몽주의란 단어가 등장하니 벌써 몇몇 독자들은 식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할는지도 모른다. “그 놈의 계몽주의, 뭐가 어때서!” 푸념처럼 추임새하나도 그 사이로 끼어들만하다. 하지만 19-20세기초반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그 무엇이었다. 인간 이성의 우월성과 그것의 도구적 기능에 기반하고 있는 계몽주의는 서서히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며 사회전반의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화주의로, 발전주의로, 유물사관으로, 심리주의로, 과학주의로 다양한 자녀들을 출산하며 바야흐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주도적인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계몽주의의 사회 권력화는 예민한 신앙인들의 안테나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적잖은 수의 신앙인과 신학자들은 이 계몽주의의 도전을 제대로 처리하고자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계몽주의의 즉위는 곧바로 상대주의의 득세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지금까지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독보적인 우월성의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고도 참된 종교’에서, 그저 세상의 수도 없이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할 지경에 서 있는 것이다. 근대의 다양하고 막강한 과학적, 검증적, 역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많은 식자들은 이러한 상대주의라는 무기로 당시 그리스도교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탁월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등으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차이는 있지만 서구 계몽주의 사조의 대강을 흡수하면서도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보수적인 신학자들이다. 계몽주의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정통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상대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구분에서 보자면 옷토는 자유주의 라인에 속한 학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옷토의 시선은 그들과는 달리 좀 더 먼 곳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도전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위협 혹은 방어라는 선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듯싶다. 아니 그보다 그는 계몽주의 사조의 만연은 아예 종교라고 하는 영역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옷토는 자신의 신학적 과업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의 수호로 잡게 된다. 즉 옷토는 계몽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되어가는 종교를 다시 부활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옷토에게 있어서 이제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종교를 종교로서 보지 않으려는 시각들, 이제 종교는 미천하거나 지식이 떨어지는 야만인들의 주술적 습관으로 치부해 버리는 서늘한 계몽주의적 판단을 교정시켜야 할 시대적 과업을 스스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종교 그 자체는 그리스도교 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다. 종교를 종교라고 보지 않게 된 다음의 그리스도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옷토의 고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유사한 고민을 했었던 선배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의 작업에서부터 자신의 해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옷토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진리나 혹은 종교들의 상대적 진리에 대한 증명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종교의 정신적인 근거를, 즉 선험적인 종교성이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자 이제 옷토가 추구하는 학문이 가지는 목적의 골격은 거의 다 드러났다. 이제 거기에 살만 붙이면 될 것이다. 종교는 스스로 존재한다. 바로 우리 안에 경험 이전의 그 무엇으로!
레드문/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만을 받아들입니다. 일단 얘기가 나왔으니, 에덴동산 이야기를 예수의 "돌아온 둘째 아들 비유"와 함께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예수가 말한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가 그 시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듯이, 에덴동산 이야기도 창조의 시점에 일어난 첫 번째 사람(이라고 하는) 아담에 관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이 두 가지 이야기는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돌아온 둘째 아들 비유"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집"에 대응합니다. 이 동산은 아버지(근원, I AM)의 거처이자, 아버지 자체를 상징합니다. 아들(아담, 사람)은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분리됨이 없이 함께 살고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아담,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이 동산의 모든 과일은 마음껏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고. 그 과일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아들은 선악과를 먹죠.
본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말을 분별하게 되는 것(분별에 매이는 것, 분별을 진실한 것으로 믿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분별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개별적인 "나"라는 관념이 생겨나죠. 그러면 나와 너, 나와 다른 것, 나와 세상,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등등 세상이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 버립니다. 마음속에서.
그러면 점차 모든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아담처럼 결국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신을(혹은 양심을) 두려워하게 되어 자신을 숨기려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불러도 자꾸 숨으려고만 하게 되죠. 신과 분리되고, 신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신이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이걸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 집에서 나갔다"고 표현합니다. 같은 현상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고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신(아버지, 근원)과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는 신이 저주를 내리고 쫓아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신은 저주하는 분도 아니고 쫓아내는 분도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뿐이죠. 예수가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이 제 발로 집 밖으로 나갔다고 표현하듯이.
신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했고, 예수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잃었다가 얻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신이 아담에게 말한 "죽음"은 "집을 나감", "길을 잃음"과 동의어입니다.
아버지(I AM, 근원)가 참된 생명인데, 참된 생명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복하지만, 예수가 말하는 "죽음"이란 몸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역시 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sin)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의 원뜻은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단어도 "벗어났다"는 말이니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집을 나간 아들(아담, 사람)에게 단지 "아버지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바깥으로 나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근원으로, 네 안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예수는 선한 목자의 비유도 얘기합니다. 길을 잃은 어린양을 찾아헤매는 목자.
또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언제나 한결같이 기다리는 아버지.
아버지(의 집) -> 나감 -> 돌아옴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이렇게 단순합니다.
사람들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죠.
즉 이미 하나님은 자신만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위와 같은 이해를 토대로 이 구절을 보면, 이 구절이 매우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앞부분의 훌륭한 통찰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개입되어 있어요. 일일이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선악과란 생명나무 열매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든지 생명나무 열매를 먹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실은 선악과를 먹으면 즉시 낙원에서 벗어납니다.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닙니다. 동시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둘째 아들 비유"의 용어를 빌리면, 즉시 죽습니다. 즉시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잃어버린 낙원에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악과/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사건이며, 계속 택일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말하자면,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면, 사실은 즉시 죽는 것이며, 즉시 에덴동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시 죽은 자, 에덴동산에서 벗어난 자가 그런 상태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영생이란 몸이 영원토록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아버지에게 돌아와 아버지와 합일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I AM이 곧 생명이다"라고 한 구절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레드문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은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죠.
성서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어,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지금 성서에서 찾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고...
그냥 제 견해를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선악과를 맛있게 잡수시면서 아들에게는 먹지 못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과를 먹지 않으니 아들도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데, 아들이 먹으면 서로 달라져서 분리되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는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은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겁니다.
아버지가 쫓아내고 저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성서야 어차피 저마다 자신의 안목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 객관적인 증거로 입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고, 레드문님이 불교를 공부하신다니 재미삼아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생각 이전의 자리에 선악을 아는 판단이 있습니까?
그런데 찬찬히 읽어보니까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바오밥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거의 동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불교에서는 원래 붓다가 하나님이나 이런 것에 대해 침묵을 했지만 그게 없어서 침묵을 한게 아니라 그게 수행에 나아가 깨닫음을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에서 붓다가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다고도 좀 그렇죠. 왜냐하면 붓다는 이 부분에서 그냥 침묵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나중에 대승에서 붓다가 하나님으로 높여지기도 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 부분을 믿지는 않죠. 일종의 방편적인 설이라고 봐여. 법신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 붓다가 설정되는데 그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니깐요.
다만 불교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유위 무위법을 총괄하는 연기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구요.
아 그리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선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구요. 그래서 제가 그 선악이라는 것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선이라고 해석하면 이게 어느정도 해석이 무난하게 이어지는게 아닌가 해서요
즉 절대계 차원의 하나님은 분별이 없지만 현상계에서는 분별하지 않은 게 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게 아닌가 하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오밥님/
님의 글을 읽으니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or has a will of the type of which we are conscious in ourselves."
"The word God is for me nothing more than the expression and product of human weaknesses, the Bible a collection of honourable, but still primitive legends."
- Albert Einstein
진정한 사랑의 신이라면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주어놓고서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심판을 하는 신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한낮 짧은 인류의 역사를 봐도 정말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와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가진 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피조물보다 못한 사랑을 가진 신은 참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니, 인간도 인간을 수많은 하찮은 이유들가지고도 심판하는데 신이라면 아예 궁극적 심판을 해야 신답죠.
게다가 자신의 피조물보다 못한 사랑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신이
기도 하잖아요. 실제로 예수가 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구요. 이 궁극적 심판과 궁극적 사랑이 어떻
게 양립가능한가는 문제거리이기는 한데, 이 문제거리가 '...한심하다'라는 표현이 들어간 문장으로 단순해
소될 수준의 것이라면 최고 수준의 지성을 갖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 멍청이들이죠..
아인슈타인 얘기가 나와서 곁가지 붙이자면, 아인슈타인은 확실히 기독교의 신을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치만 자기 자신은 무신론자도 범신론자도 아니라고 밝힌 적도 있죠. 그렇다면 모종의 인격신의 존재를 믿거
나 그런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전투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일단 인격신의 존재를 믿게되면 거기
에서 더 나아가 그 인격신이 기독교적 신이라고 생각하기 까지는 논변의 시간으로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결론이 참일 수밖에 없는 그런 논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듯
한 결론이 나오는 논변이요. 사실 기독교의 신에게는 충분히 지성적인, 또는 전투적이지 않은 무신론자들까
지 끌어당기는 크나큰 매력이 있는데, '유물론적 신학'이니 '카톨릭 무신론'이니 하는 이상한 표현들은 바로
그 매력을 가리킵니다..

Albert Einstein's religious views have been studied extensively. He said he believed in the "pantheistic" God of Baruch Spinoza, but not in a personal god, a belief he criticized. He also called himself an agnostic, while disassociating himself from the label atheist, preferring, he said, "an attitude of humility corresponding to the weakness of our intellectual understanding of nature and of our own being."[1][2]
- http://en.wikipedia.org/wiki/Religious_views_of_Albert_Einstein
아인슈타인의 발언을 소개한 앤터니 플루의 글입니다. 앤터니 플루의 어느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확인하는게 어려울 리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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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나 범신론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나 자신을 범신론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처지는 여러 언어로 쓰인 책들이 가득한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이는 누군가가 그 책들을 썼을 거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떻게 썼는지는 모른다. 아이는 그 책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들의 구성에 어떤 신비한 질서가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내가 볼때 지적으로 가장 뛰어난 인간의 경우에도 신을 향한 태도는 이 아이와 같다. 우리는 우주가 놀랍게 조정되어 있고, 어떤 법칙들을 따르는 것을 보지만 그 법칙들을 희미하게 이해할 따름이다. 우리의 제한된 정신은 천체를 움직이는 신비한 힘을 파악한다"(아인슈타인)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아인슈타인이 무신론자였다는 나(화자, 플루를 의미)의 옛 주장을 제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신론자나 범신론자가 아니라는 아인슈타인의 진술을 무시했다. 도킨스가 이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을 한 것은 그가 야머의 글을 부분적으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주장에 치명적인 야머나 아인슈타인의 수많은 진술을 무시했다.
예를 들어 야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 취급을 받는 것에 언제나 이의를 제기했다. 뢰벤슈타인의 후베르투스 공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를 인용합니다. 그게 정말 화가 납니다.'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을 거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세계의 합리성의 초월적 근원을 분명히 믿었고.. 이것은 그의 몇몇 진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실재의 합리적 본질과 인간 정신이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독특한 사실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데 종교적이라는 표현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다. 이 신뢰가 없는 곳에서 과학은 지루한 절차로 전락하고 만다. 성직자들이 이 사실에 편승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을 막을 길은 없다.
이 영역(과학)에서 진전을 이뤄내는 강렬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재 가운데 드러난 합리성... 존재 가운대 성육한 이성의 장엄함을 향한 심오한 외경을 갖게된다.
과학연구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법칙이 인간보다 더 없이 우월한 영, 그 앞에서 초라한 능력을 가진 우리가 겸손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영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확신하게 된다.
나의 종교심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나약하고 힘없는 정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무한한 우월한 영을 향한 겸손이다. 불가해한 우주에 드러나 있는 우월한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깊은 확신이 내 안에서 신의 개념을 형성한다.'"
비행소년/ (창조론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끝없이 펼쳐진 이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멀리서 보면 먼지보다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마침표보다도 작은 지구에 사는, 그보다 훨씬 작은 한낱 인간이라는 피조물보다 못한, 쩨제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기까지 한 심보를 가진 존재라는 걸.... 믿고 싶은 사람은 믿으며 살면 되겠지요. 믿는 것은 자기 마음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신을 만나보니까, 신이 무척 섭섭해 하시더군요. 자기를 너무 오해하고 있다고, 자기는 전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고... (농담입니다.ㅎㅎ)
앤터니 플루라는, 20세기 서양 철학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철학자가 보스급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변심한 사건을 주제로 한 기사들과 블로그 글들 모음입니다. 정확히는, 앤터니
플루가 그 존재를 확신하게 된 신은 기독교적인 인격적 신이 아니라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입니다. 그치만 그 두 신 사이의 거리는 [그에게서도] 그다지 멀지 않죠. 제 자신은 유신론과
무신론 둘 중 하나를 논증적으로 편드는 데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사람
들이 유신론, 특히 기독교적 유신론을 소박하지 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108231552251
http://blog.daum.net/lifebible/8508406
http://onering2132.blog.me/40137675878
신의 존재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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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구절의 의미가 '앤터니 플루가 유신론자가 된건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어서가 아니다'라면
제가 '잘 아시는 분'인거 맞습니다. '신'이 '기독교적 신'의 줄임말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근데 그걸 잘 아는 저한테
는 물론이고 앤터니 플루라는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적 없지만 '신의 존재유무'라는 형이상학적 쟁점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한테도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철학자가 유신론자가된 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사태에요. 그 분들이 지적으로
소박해서 아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철학자가 유신론자가 되었다니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거나
결정적 논증이 이루어진 모양이라고 오해하거나 안토니 플루가 있다고 확신하게된 신이 기독교적 신이라고 지레짐작
한다면 그건 제 문제가 아니라 그 분들 문제이고 더 나아가 사소한 문제입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초딩의 논리로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명제 중의 하나는 "신은 무한하다"입니다.
창세기에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는 신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천지를 창조할 때 무엇으로 창조했을까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고 하든 뭐라고 하든, 신과 별개의 물질이 존재했다고(존재한다고) 하면,
즉시 신은 무한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신이 아닌 뭔가가 존재하면 신은 더 이상 무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이 계속 무한성을 유지하려면 신 바깥에는, 신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으로 천지를 창조했을까요?
기독교의 또 하나의 명제는 "신은 무소부재하다"입니다.
신이 무소부재하다면, 신이 없는 곳은 물질계든 이른바 영계든 어느 곳도 없어야 하고
원자 속에도 양자 속에도 모든 공간에도 신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히브리성서 시편엔가에는 온 천지가 신으로 충만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신이 무소부재하다면, 모든 것이 완전히 신으로 충만해야 하고,
신 아닌 것이나 신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요?
너무 초딩스러운 논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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