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몽 님의 요청에 따라, 이전에 스켑렙에 올렸던 글을 퍼와서 올립니다. 일부 수정해야 할 것도 있으나, 원문을 그대로 두겠습니다.>
 
<mrtouch 님의 아래 글을 읽었다. 나는 노빠다. 그래서 노빠인 내가 보는 각도에서 노무현정부와 이번의 정권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원래 여기서는 정치적인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이 동했으니 쓴다.>
 
1. 여기 어느 빌딩 앞에 우리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빌딩을 바라보면, 각자에게 보이는 빌딩의 모습이 서로 다를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빌딩 내부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옥상에서 까마득한 지면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빌딩은 하나이지만, 각자 바라보는 모습은 서로 다르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도 서로 다른 빌딩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같은 사물을 바라보지만, 각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처럼 상당히 다른 것이다.
 
2. 우리들은 한 개의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 각자가 본 지구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이 각자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세상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불신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고,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다. 불신과 부정을 하기 전에 이 한 가지만은 기억해 두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본 모습에도 일말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걸 말이다.
 
3.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진주 시내로 차를 몰고 갔을 때 이것을 깨달았다. 조수석에 탔을 때 보이던 진주 시내의 모습과 운전석에 탔을 때 보이는 진주 시내의 모습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4. 이 세상이 각자에게 서로 다르게 보인다면, 내가 본 모습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부정해야 할까? 나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 결정에 따르지만, 다른 사람 자신은 그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어야 하고 또 내가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명백히 거짓임이 드러난 사안이 아니면, 나는 일단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5.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르다. 니가 맞니 내가 맞니 서로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나는 개혁을 지지하지만, 보수도 존중한다. 보수들이 보아 온 세계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단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생긴 견해의 차이다. 그러니 나는 보수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 이런 얘기를 서두에 꺼내 놓고, 노빠의 한 사람으로서 본 노무현정부와 정권교체에 대해서 말한다.  
 
6. 나는 보수를 네 부류로 분류한 적이 있다. 첫째는 시대착오적인 보수다. 둘째는 꽉 막힌 보수다. 셋째는 열린 보수다. 넷째는 얼치기 보수다. 이 분류가 학문적으로는 무의미한 분류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상당히 적절한 분류일 거라고 생각한다.
 
멸공이나 외치고,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외치는 보수는 시대착오적인 보수다. 이미 그런 시대가 지나갔는데도 그것을 아직까지도 못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시대착오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대부분은 꽉 막힌 보수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무작정 지키자고만 할 뿐이고, 일어나는 여러 문제점에 대해서는 못 본 체한다. 그러니 문제가 거듭 발생해도 해결이 안 된다.
 
통합민주당과 과거 열린우리당의 대부분은 열린 보수다. 다른 말로 개혁이라고 한다. 현재의 상태를 긍정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적극적으로 제도를 고쳐나가려고 생각한다. 그러니 문제를 조금씩 해결한다.
 
성향은 틀림없이 보수인데, 도대체 왜 보수를 해야 하는지 아무 개념이 없는 보수도 있다. 무턱대고 보수만 지지하니, 한 마디로 얼치기 보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보수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7. 보수의 개념은 경제학에서 나온 거라고 들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보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 보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한 마디로 '바꾸는 건 싫다'는 성향을 말한다. 
 
8. 일제시대 때 우리 선조들 중에서 극히 일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로, 독립이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시대적인 사명이지 않나 싶다. 대다수의 선조들은 독립을 그다지 절실하게 바라지는 않았다. 또 일부는 일제에 부역하여 호의호식하기만을 바랐다. 이런 놈들을 친일부역자라고 부르는데, 보통 친일파라고 부른다.
 
9. 미국의 승리에 의해서 한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 이씨 왕조를 복구하지 않고, 정부를 수립하면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했다. 그런데 국민들 대부분은 문맹이고,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왕정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다. 워낙 가난해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인 탓도 있었다. 이 틈을 타고 이승만 일당은 비민주적인 독재정치를 할 수 있었다. 독재정치가 오래 지속되자, 사람들은 정치라는 것은 그렇게 굴러가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승만이라는 놈이 민주정치와는 거리가 먼 독재정치 선거부정을 저지를 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절실히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10.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고, 뒤이어 대통령선거에 출마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두 가지 사안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별해서 논해야 할 사안이다. 즉, 쿠데타는 반역이었고,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반역행위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놈의 말로는 대략 세 가지다. 쿠데타 실패로 처형당하는 것이 하나,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언젠가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이 둘, 쿠데타에 성공하고 독재를 하다가 언젠가 처벌당하거나 자연사하는 것이 셋이다. 이건 내가 세계의 쿠데타를 조사해 본 후 내린 결론은 아니고, 추리해서 내린 결론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독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는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도망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박정희는 독재정치를 하는 길을 선택했다.
 
11. 일제시대에 일제는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식민지배에 방해가 되고 위협이 되는 것은 독립운동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배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자신의 대통령직위를 위협하는 세력은 오직 민주화운동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온갖 합법/비합법 수단을 동원해서 민주화운동가들을 말살하고 탄압했는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사형대에 오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반역자는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과 부정선거와 유신체제가 등장했다. 박정희는 결국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뒈졌다.
 
12. 박정희정권을 규정하려면 여기에 두 가지를 더 보태야 한다. 하나는 경제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정경유착-관치금융이다.
 
박정희정권의 경제발전은 결과만 보면 눈부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 박정희의 공로로만 돌리는 것도 무리한 일이고, 빛에 가려진 어두움 역시 무시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광신도들은 업적만 추켜세울 뿐이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부정선거로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고 복종시키는 데에도 돈이 들었고, 밑에 똘마니들이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기업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받았다. 그 댓가로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서 기업의 대출을 용이하게 해 줬다. 이것이 바로 정경유착-관치금융이 자리잡은 원인이다.
 
13. 박정희의 악행 중에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지역감정 부추기기다. 이것은 박정희의 사후에 전두환 정권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망국적인 지역차별감정의 씨앗이 되었다. 차별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억울함과 분노를 도무지 실감할 수가 없다.
 
전라도지역을 차별한 것은 두 종류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지역이 경제면에서나 인프라 면에서나 낙후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사 면에서 전라도지역 출신자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었다는 것이다. 인사차별을 당한 사람에게 입이 달려 있으니, 명절 때 고향으로 내려가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억울함이 증폭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는 10만큼 차별했다면, 억울함은 10만큼이 아니라 100이나 1000만큼 증폭되었던 것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차별로 인한 이득이 10배 100배로 증폭되었던 것이다.)
 
14. 전두환 역시 군사반란을 계기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항쟁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빼면 그 뒤의 정치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5.18 광주 민주화항쟁 사건으로 학살당한 시민은 260여 명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정확한 사망자수를 세기 전에는 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오인되고 있었다. 각자가 본 것을 서로 더하다 보니, 실제 사망자 수보다 훨씬 더 많이 죽은 것처럼 오인되었던 것이다.) 억울하게 학살당했는데도 도리어 폭도로 몰리고, 민주화를 외치다 죽은 사람이 무슨 폭동이나 일으키다가 죽은 것처럼 회자되었다. 이것이 차별정책과 함께 전라도와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은 억울함을 심어줬을지 상상해 보시라.
 
15. 전두환일당이 통치하던 8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들은 끈질기게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 대부분은 데모였다. 데모란, 데몬스트레이션의 약자인데, 집단으로 시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개인이 시위하는 일인 시위와 달리, 여러 명이 집단으로 시위하는 것을 데모라고 한단 말이다. 대학생들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민주주의와 반대에 있는 전두환 일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4.19처럼 시민들이 대규모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부정선거가 판을 치고 있었으므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어려웠고, 김재규가 했던 것처럼 전두환을 죽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데모만이 유일한 저항수단이었다.
 
16. 하지만 데모에 대해서 일반 시민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데모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은 무턱대고 데모를 좋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국민의 정치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언론의 계몽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교묘한 세뇌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소수의 정치인과 대학생들은 외롭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일생을 망쳤다. 전과를 갖게 되기도 하고,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데모만 할 수밖에 없었다.
 
17. 1987년 12월에 직선제 선거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4.13호헌 발언, 6.10 민주항쟁, 6.29선언 등으로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김대중 김영삼의 후보단일화가 실패해서 결국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되었던 것이다. (후보단일화의 실패는 그 책임이 몽땅 김대중에게 뒤집어씌워졌고, 나중에 김대중 본인조차 후회하는 지경에 이른다.)
 
18. 1986년인지 1987년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이 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등을 내세우고 대규모로 파업했다. 그 전에는 파업이란 보기 드문 일이었는데, 파업이 한 번 성공하자 너도 나도 줄줄이 파업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업은 영어로 스트라이크라고 쓰는데, 데모와 스트라이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이 파업 덕분에 노동자의 권리의식이 성장하고, 노조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19.  1988년 12월에 있었던 '언론청문회'에서 두 명의 스타 국회의원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노무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인제였다. 둘 다 변호사였고, 명석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청문회를 주름잡았단다.(나는 청문회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특히 노무현은 청문회 일정을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다른 국회의원들을 보고 분노하여 자신의 국회의원 명패를 던져 항의의 뜻을 나타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전두환에게 화를 내어 명패를 집어던진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20. 1988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다.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실제로는 독재불의당이었지만, 이름만은 민주정의당이었다.)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야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소야대는 노태우정부를 괴롭혔다. 법을 하나 통과시키려고 해도 사사건건 협상하고 양보해야 하니, 아마 죽을 맛이었을 거다. 그리하여 1990년 1월 노태우는 뒤로 협상을 벌여 내각제를 고리로 김영삼 김종필과 3당합당을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민주자유당이다. (약칭은 민자당) 이것은 야당을 하라고 뽑아준 국민의 민의를 배신한 것이기에 야합으로 규정되고 비난을 받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는 둥 구국의 결단이라는 둥 변명했다.
 
21. 19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김대중은 그 다음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대중을 죽이려는 기사를 양산했던 조선일보는 모처럼 김대중을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한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에 여러 가지 좋은 얘기가 실려 있으니 읽어 보시라.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은 영국으로 건너가서 옥스포드인지 케임브리지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거기서 뭘 하면서 지냈다. 김대중이 떠난 민주당(약칭임)은 이기택이 당총재를 맡았다. 이기택은 민주당을 잘 리드할 수가 없었다. 본인의 무능과 함께 김대중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고분고분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김대중은 1996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정계복귀를 하게 된다. 이기택이 총재노릇을 잘 했더라면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할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22. 김영삼은 대선 때 한보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200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 댓가였던 모양인지 한보철강은 몇 조원이라는 돈을 은행 등으로부터 빌려서 한보철강 당진공장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자본금 900억원인 회사에 2조원을 넘게 빌려주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이다. 빌린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서 돈을 다시 빌리고, 그 이자가 또 늘어나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렸다. 결국 1997년 1월21일 한보철강은 부도를 낸다. 은행은 부실해지고, BIS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대출을 급격하게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 하여 다른 기업들에 빌려줄 돈마저 줄어들자 다른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낸다. 진로그룹도 해태그룹도 이 영향으로 부도를 내고 주인이 바뀌었다. 7월인가 8월에는 덩치가 큰 기아그룹이 부도났다.
 
23. 이 즈음에 해외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전염병처럼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도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1997년에는 대선이 있으므로 김영삼정부는 환율을 방어하기로 한다.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펀더멘탈이 튼튼하다는 강연을 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환율방어를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동원하자, 외환보유고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만다. 결국 11월 3일엔가 김영삼정부는 IMF에 돈을 꾸기로 결정하게 된다. 나중에 대선이 끝난 다음 외환보유고가 얼마인지 확인해 보니 겨우 36억 달러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12월에 만기가 돌아와서 갚아야 할 외채가 200억 달러가 넘었고, IMF로부터 돈이 아직 입금되지 않고 있었으니 까딱했으면 모라토리엄이 선언될 뻔했다.
 
24. 한보의 부도는 정경유착-관치금융이 나라경제를 완전히 말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김영삼정부가 출범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했을 때 국민들은 90%가 넘는 지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는 하라는 기업구조조정은 하지 않고, OECD가입 등 폼나는 일만 하다가 결국 정경유착-관치금융으로 나라를 외환위기에 몰아넣고 만다. 박정희에서 시작된 정경유착-관치금융이 수명을 다했던 것이다.
 
25. 김대중정부는 외환위기의 수습을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IMF의 지시에 따랐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외채의 롤오버(만기연장)를 이루어 냈으며, 부실기업을 구조조정하는 데에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했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소멸되었으며, 사람들은 언제 정리해고 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소비를 축소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내수경기 불황으로 이어진다.
 
26. 나라경제를 말아먹을 뻔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도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회창이 경제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호소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입으로는 '삼김식 썩은 정치를 몰아내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을 하면서 유세를 다녔는데, 뒤로는 서상목 일당들이 '세풍'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이래로 돈으로 표를 사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39만표인가 차이로 이회창은 낙선하고 만다. 한나라당을 탈출하고 독자출마한 이인제는 500만 표 정도를 얻었는데, 그 때문에 김대중은 간신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후보단일화도 위력이 있었다.)
 
27. 김대중은 평소 남북통일에 대해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찌기 1970년대부터 자신만의 통일정책을 주장해 왔다. 정계은퇴기간 동안에 독일통일을 조사해 보고, 그는 대북3원칙과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햇볕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하였다. 이런 통일정책 때문에 일부 사람에게는 빨갱이니 용공주의자니 하는 비난을 들었지만, 그는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이 통일정책을 버리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28.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 보면, 남북한의 통일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체제가 달라서 쉽게 통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무엇이든 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햇볕정책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한의 적대감을 상당 부분 해소시켰다. 10년 간 계속된 남북간의 교류는 그 이전의 40년간과 비교했을 때 정말 괄목할 만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보수들은 이 햇볕정책을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비난만 하고 있을 뿐이다.
 
29. 김대중정부의 과오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잊지 못할 것이 '옷로비사건'이다. 이것은 뒤에 아들들이 관여된 또 다른 사건과 함께 김대중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팍 까먹는 사건이 되었다. 이해찬이 교육부장관이 되어 실행했다가 실패한 '여러 줄 세우기 정책'도 잊을 수는 없을 것이고, '카드대란'을 일으킨 카드규제완화도 있다.
 
30. 김대중정부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조중동이라는 신문사들일 것이다. 당선되기 전에는 김대중죽이기로 당선을 방해했고, 당선된 후에는 온갖 기사로 국민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불신하게 되었고, 아무리 선의로 내놓는 정책일지라도 악의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나왔다. 지역편중인사 논란을 예로 들 수도 있고, 6.15선언도 예로 들 수 있고, 노벨평화상 수상도 예로 들 수 있다. 처음에는 협조만을 구걸하던 김대중정부는 언론사세무조사를 통해서 강공을 펼쳐 보려 했지만, 그것도 별무신통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횡령과 탈세 등을 저지르고도 조중동은 되레 언론탄압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31. '백성주가 생각하는 상식'과 가장 근접한 정치인은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이렇게 세 명이 있다. 나는 이 세 사람의 말은 대부분 동의한다. (새만금이나 한미FTA 등에 대해서는 정반대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책이나 연설을 통해서 알아보았고,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거의 일치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했다. 나는 김대중광신도임을 자부했고, 노빠라고 인정했고, 유시민추종자라고 나를 소개했다. 나는 그들을 열렬히 지지했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말이다...
 
32. 노무현은 가난한 탓에 대학진학을 못하고 상고를 다녀야 했다.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노릇을 6개월간인가 하다가 때려치웠다. 성미에 안 맞아서 그런 건지, 수입이 적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어쨌건 부산에서 세무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러던 와중에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기억이 불확실함)에 관련된 시국사범을 변호하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거절 못할 부탁이라서 면회를 했더니 고문을 당해서 사람이 사람 같지 않게 보이더란다. 분노한 노무현은 전두환 독재정권과 대항해서 싸우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계속 돈벌이나 잘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지 않고 헌신것이다.
 
1988년에 노무현은 김영삼의 공천으로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언론청문회를 통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1990년 1월 3당합당에 반대해서 합당에 참여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상식에 비추어서 이 합당은 야합이어서 참여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주간조선은 노무현에 대한 왜곡이 담긴 기사를 썼다가 노무현으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다른 국회의원은 조선일보를 두려워해서 참았을 테지만, 노무현은 조선일보와 맞서 싸웠다. 결국 승소했다. 이 소송사건 이후로 조선일보는 노무현과 적대하게 된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고,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민주당 깃발을 들면 부산에서 낙선할 거라는 예상이 우세했지만, 그는 전에 출마한 종로구를 버리고 부산에서 출마했다. 낙선했지만 그 대신 노사모가 생겨났다. 지역차별감정에 대항해서 정치를 바로잡아보려는 그 열의와 성의에 감복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노사모는 훗날 2002년 국민경선에서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노무현은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일하기도 했다.
 
33. 내가 노무현에 대해서 뭔가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002년 8월 13일 경의 일이다. 하루는 안티조선 우리모두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 유시민의 열정적인 글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국민경선으로 당선된 노무현후보를 새천년민주당의 반노 세력들이 흔들어 떨어뜨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강력한 대선예비후보였던 이인제가 국민경선으로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고, 노무현 국민경선후보의 약속으로 지방선거 참패 후 후보재선거를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시민의 글에 공감했다. 이인제의 생각은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달라서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9월12일엔가는 연세대에서 민주당후보초청 교육강연회가 열렸다. 민주당의 대선후보로서 노무현이 무슨 교육정책을 내놓을 것인지 강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 때만 해도 나는 노무현에 대해서 특별한 지지나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연을 들어보니, 그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백성주가 생각하는 상식과 일치하는' 정치인이었다. 노무현 후보의 교육개혁정책은 시시껄렁했지만, 그가 상식적인 정치인이라면 교육개혁에 관한 내 아이디어를 그대로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대통령으로 만들자....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 과정을 거치자 노무현후보의 지지율이 높아져서 결국 당선되었다. 그 과정의 우여곡절이나 선거운동의 열의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이벤트였다. 특히 노빠들에게는 그렇다. 감동과 눈물과 노력의 드라마였다.
 
34.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앞길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첫째로 국회 과반수를 점유한 한나라당의 딴지걸기, 둘째로 조중동의 지속적인 이간질, 셋째로 대북송금의혹 특검, 넷째로 노무현과 그 참모들과 내각의 무능, 다섯째로 카드대란, 여섯째로 부시정부, 일곱째로 김정일이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왔을까? 나는 당선되기 전부터 이 문제의 해법을 제시했다.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만 개혁을 차질 없이 추진해갈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반노 성향인 국민이 절반은 되고, 여기에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이간질할 테니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이 상황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오로지 '가시적인 성과'로서 신뢰를 얻는 수밖에 없다. 사교육비문제, 부동산문제, 경제문제 이 세 가지가 우리 국민이 가장 고통을 느끼는 사회문제이니, 이걸 하나만이라도 해결하면 신뢰를 얻을 것이다. 그러려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데, 교육문제는 내가 유능하고, 경제문제는 최용식 선생 이상 가는 인물이 없다.
 
35. 노무현의 가장 큰 무능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에게 결여된 블링크능력이라고나 할까... 이건 지능이나 학력이나 경험과는 별개의 일이다.
 
나는 그 증거를 교육부총리 임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르고 골라서 윤덕홍이라는 무능력자를 교육부총리로 임명하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나는 내정 보도가 나오자 즉각 윤덕홍의 자진사퇴나 임명철회를 요구했고, 취임한 다음에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자진사퇴하라는 일인시위를 했다. 무능한 사람이 과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처럼 아이디어가 있고 안목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한 거다.
 
정부의 일은 장관이 알아서 한다. 대통령이 관여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대통령의 능력은 인사가 만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어서 성과를 올리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36. 이회창일당의 불법대선자금이 뽀록났을 때, 한나라당은 코너에 몰려서 완전히 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송광수 검찰총장 휘하의 수사진은 결정적인 수사를 하지 않고 사건을 덮고 말았다. 즉, 227개 지구당의 위원장이 받아서 쓴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 수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덕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대부분과 지구당 조직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병렬 대표가 전체 지구당에 검찰수사에 불응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한나라당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이다.
 
한편 노무현캠프에서는 이상수와 안희정이 불법대선자금을 받아서 사용했고, 그 책임을 지고 복역했다. 이상수는 그나마 관행을 핑계로 댈 만한 소이가 있었는데, 안희정이 받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나는 이상수와 안희정을 원망하고 미워한다. 노빠들의 명예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행위였기 때문이다. 나도 노무현선거자금을 몇 만원 기부했는데, 그건 불법대선자금을 받지 말라는 취지였다. 돈이 부족하면 더 달라고 호소했어야 하지, 혼자 벌받을 각오를 하고 불법대선자금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노무현과 노빠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오명을 둘러씌웠으니,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또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나는 당시에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이었는데, 내가 노빠이지만, 이런 불법선거자금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반드시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서프라이즈에 올린 글은 곧장 해우소로 처박혔다. 당원게시판에 올린 글은 욕만 먹었다. 
 
37. 대북송금의혹은 사실로 드러났다. 김대중정부가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대북정책을 실행할 때 이런 범죄행위까지 하라고 허용할 수는 없다. 그건 대북정책을 실행하는 것조차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김대중 대통령과 실무 담당자들은 법의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 이 사건 때문에 현대 정몽헌 회장은 자살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이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관련이 있다. 대선 전에는 대북송금을 일관되게 부인했기 때문이다. 만약 대선 전에 이 일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면,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이 대북송금특검 때문에 반노로 돌아설 거라는 것을 알고도 거부권행사를 하지 않았다. 거부권 행사는 의혹을 덮겠다는 것이지만, 의혹은 덮을 것이 아니라 파헤쳐야 하는 거다. 그래야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는 거다.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상식적인 일이고, 그 때문에 지지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38. 화물연대파업 사건은 참여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사례 중의 하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분명히 절박한 사정을 설명했는데, 아무 대책이 안 나오자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들이 전국의 물류를 정지시켰다. 다행히 대규모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도 좋은 해결책을 만들어 실행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끝나고 말았다.
 
부안사태는 더 황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군수의 일처리가 상식적이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인데, 뒤에 대처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민란 폭동에 가까운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고 말았다.
 
교육부와 NEIS사태는 또 한심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육부총리는 의견이 이랬다 저랬다 바뀌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를 중요시하지 않은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예를 들어 해킹 사건, 이게 다 노무현이 잘못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비난을 듣고 말 것이다.
 
39. 노무현 민주당후보 시절에 김민석 등 후보단일화협의회는 앞장서서 노무현에게 불리한 행위를 했다. 노빠들은 이들을 후단협이라고 부르며 매우 미워했다. 단순히 노무현에게 불리해서 미워한 노빠도 있었을 테고, 나처럼 정몽준이라는 인물을 얕잡아 봐서 후단협의 안목을 미워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캠프의 불법대선자금이 뽀록나고 나서 민주당 내의 일부는 진성당원체제 당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당내 개혁을 위해서 내놓은 이 주장은 당내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누구에게는 이롭지만 누구에게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협상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당의 개혁을 반대하는 것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정동영 등을 포함한 국회의원 40여 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의 당원이 된다. 왜냐 하면 첫째로 민주당의 전통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대의가 더 중요하고, 둘째로 민주당에는 친노가 없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50여 명 정도의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2004년 탄핵사건을 계기로 152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40. 탄핵사건으로 인해서 여대야소가 이루어졌다. 선거 승리의 여세를 몰아 4대 개혁입법을 하려고 했는데, 초선의원들이 많고, 김원기 국회의장이 협조하지 않았고, 한나라당이 법사위원회 문을 걸어잠그고 법안심의를 불가능하게 해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4대 개혁입법이 순서를 그르쳤기 때문에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죽기살기로 입법을 저지했다. 4대 개혁입법을 왜 한 번에 처리하려고 했을까? 쪽수만 믿고 전략을 잘못 짜도 한참 잘못 짠 것이다. 무리수를 두었으니 통과가 안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게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열린우리당 당내에도 계파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개혁을 지향해도 각자 층차가 있는 법이다. 누구는 열렬히 개혁하고자 하지만, 누구는 상황을 봐 가며 개혁하고자 하고, 개혁의 방향도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 때 정동영파, 김근태파, 유시민파 대충 이렇게 세 부류가 생긴 것 같다.
 
41. 2005년 11월 22일 'PD수첩-황우석 사건'이 일어났다. MBC PD수첩이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연구에 필요한 난자 채집 과정에 거짓이 있었다는 보도였다. 황우석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국민들은 PD수첩의 보도가 황우석죽이기라고 느꼈다. 이리하여 열받은 많은 네티즌에 의해서 PD수첩이 공격당했고, 결국 프로그램 중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황우석의 논문들에 들어간 사진 중에서 5쌍이 같은 사진이라는 것이 뽀록났던 것이다. 이리 하여 논문조작시비가 일어났고, 전국민이 참여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황빠들은 황빠들대로 난리를 쳤고, 황까들은 이런 황빠들을 비웃으며 논증을 제시했다. 이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은 몰상식한 발언을 했고, 유시민은 전남대 강연에서 무식한 말을 했다. 그러나 진실은 PD수첩의 편이었다. 황우석은 줄기세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보다 놀란 점은 서프라이즈에서 노빠들이 황빠로 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대문글 중에서 247개의 글을 저장해 두었다. (필요한 사람은 당시의 대문글을 압축해서 이메일로 보내 드린다. lietz@hanmail.net ) 논문검증이 끝나고 나면, 서프앙들이 반성해야 하는데, 누가 무슨 책임이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로 자료를 저장해 둘 필요가 있었다. 서프라이즈는 뒤에 해킹을 당하여 과거 자료를 많이 날려먹었다. 황빠들의 억지에 대항해서 황까들이 활약했는데, 물뚝심송 님이 가장 훌륭하게 활약했다. ^ ^ 아직도 서프에는 극소수 황빠들이 남아서 황토방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노빠들이 상식적으로 언행하지 않는 데에 놀라고 실망해서 서프를 떠나서 조인스 디지털국회 정치행정마당으로 이사했다.
 
42. 지금 또 생각해 보니 실패작 정책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수능등급제 도입이고, 다른 하나는 8.31부동산대책이다. 그러나 이것들까지 논하기는 무리니 언급하는 것만으로 끝낸다. 제일 실패작인 '새만금'과 '한미FTA'를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하다.
 
새만금간척사업은 노태우가 대선공약으로 내놓은 것이고, 그 뒤에 10여년 동안 천천히 추진되었다. 그런데 환경주의자들이 이 사업을 줄기차게 반대했고, 새만금방조제가 완공에 가까워지자 이 반대는 더 커졌다. 그런데 한겨레21은 1995년부터 이 새만금사업에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농토를 넓히려고 간척하는 건데, 금강 등의 수질이 애초에 농사지을 수질이 못 된다는 기사였다. 더우기 시화호가 썩은 것처럼 새만금호수도 썩을 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금 이건 진행 중이라서 누군가가 확인해 봐야 한다. 정말 썩고 있다면 더 썩기 전에 방조제를 일부 터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제 물막이를 앞두고 벌어진 반대를 보고도 결국 중지를 명령하지 않았다. 도올 선생처럼 나도 노무현을 저주했다.
 
한미FTA는 우리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 온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졸속으로 추진했다. 노빠 진영에서는 찬반 두 파가 갈려서 논란이 벌어졌고, 조중동이 노무현 대통령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희한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신중추진파다. 왜 그러냐 하면, 한미FTA라는 계약이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제품은 매장에서 한 번 보고 바로 구매해도 되지만, 계약이라는 건 따지고 또 따져 보고서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다. 변호사 출신이니 이걸 잘 알 텐데도 노무현정부는 졸속으로 계약을 맺으려고 했다. 욕을 먹어 마땅한 것이다.
 
43. 노무현정부 시절에 경제는 얼마나 성과를 올렸을까?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극도로 낮게 평가한다. 그런데 자료를 조금만 살펴 보면 그들의 말이 과장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노무현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성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 논란에 관해서는 특히 대자보의 홍헌호 님의 기사들을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2003년에서 2006년까지 수출액이 2배로 늘어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수경기는 살아나지 않았다. 이 원인에 대해서 보수는 기업의 투자위축을 이유로 들었고, 나는 평생직장 개념이 깨진 탓이고 국민들이 지갑을 열지 않은 탓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내수경기가 팍 쪼그라든 것이 노무현과 개혁진영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44. 노무현정부에서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북핵사건으로 인해서 남북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2007년 10월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별반 성과도 없이 쇼만 하다가 끝났다. 조선과 동아와 한나라당과 보수는 북한에 퍼주기를 하지 말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노무현정부는 그 요구를 듣지 않았다. 많이 퍼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류를 줄이지도 않았다. 6자회담과 병행해서 계속 남북교류는 조금이나마 진전되었다. 개성공단에서 남비가 생산되어 팔리기도 했고, 초코파이가 간식으로 제공되어 인기라는 보도도 있었다.
 
나는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김대중정부시절에 대북퍼주기 논란을 보고, 남남갈등을 없애고 안정적으로 대북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국민투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노무현정부에서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나중에 스켈렙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 논의해 봤으면 한다.
 
45. 노무현정부가 잘한 것을 한 가지만 꼽아 보라면, 나는 금권선거가 없어졌다는 점을 들고 싶다. 벌금이 50배나 되기 때문에 겁이 나서라도 돈을 안 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돈을 받았다가 신세를 망친 국민들도 있었다.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뚜렷하게 잘한 일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조금 잘했다 싶은 것들은 몇 가지 있기는 하다. 물가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8.31부동산대책은 절반만 잘한 정책이다.
 
노무현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하나하나 다 논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신문을 들여다 보든지, 아니면 노무현공식홈페이지에 가서 자료실을 뒤져볼 일이다.
 
46. 앞에서 말했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 절반이 반노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끝까지 불신을 받았다. 열린우리당은 지리멸렬한 입법활동을 보이다가 결국 소멸되고 말았다. 조중동은 줄기차게 개혁세력이 무능하다고 세뇌해 왔다. 사실은 보수가 훨씬 더 무능한데, 그것은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08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통합민주당은 81석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노무현은 대통령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 즐겁고 활발하게 지내고 있다.
 
47. 노무현은 '상식적인 정치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은 '백성주가 생각하는 상식'을 말한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상식이므로, 노무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쁜 짓은 남에게 피해를 주므로 하면 안 되고, 나쁜 말은 하면 자신의 면목을 손상시키므로 하면 안 된다. 그게 상식이므로 노무현은 나쁜 짓과 나쁜 말을 안 하려고 애썼다. 노무현은 표리일체의 언행을 한다. 누구처럼 뒤로 합당을 추진한다든지 하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언행을 드러난 그대로 진심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반노들은 노무현이 표리일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음모론을 들먹이면서 욕하는 수가 많더라. 노빠들은 이 말이 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 ^
 
48.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정치사는 간단히 언급하고 노무현정부 시절에 일어난 일들을 죄다 언급하려고 했다. 백성주라는 노빠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는지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러나 곧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간략한 한국정치사를 쓴 셈이 되었다. 다음에 글을 올릴 때는 좀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