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몸 담고 있는 철학 커뮤니티가 있는 데, 거기서는 부정기적으로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온라인 토론이 열립니다.
 
 한 번은 '진리는 가르쳐 질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어떤 분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예로 들며,
 '산파 역할을 하는 사람은 정작 스스로는 가르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알 필요가 없다' 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팅이 끝난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

 1. 산파는 정작 자기가 전달하려는 지식을 알 필요가 없다.

  :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의 산파는 대화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것을 다시 반성하고 회의해 보게 만들지요.


      산파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견해가 분분하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그 중에서도 설득력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자신의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는 산파의 반론을 통하여 자기와 상반되는 대립적인 주장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폐기'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견해와 그와 대립되는 견해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변증법적'입니다. 이는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 혹은 검사와 피고인측 변호사 간의 진리주장을 통하여 판사가 각각 대립되는 입장을 취합하고, 그를 통해서 '실체적인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과 대략 비슷합니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물론 생각해 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껏 a 가 진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산파에 의해 a와 대립되는 a' 역시 진리로 간주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나의 확신을 반성하게 되고, a가 진리라는 언명을 유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나는 '진리는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져 듭니다.

    
   산파의 비유는 진리가 어쩌면 나와 세계의 독백적인 관계가 아니라 나, 그리고 나와 대립되는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의 담론이론이 제시한 근본적인 통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서라면, 사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산파가 가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담화자들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산파와의 대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담론이론은 진리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대화자의 확실성의 체험'을 구분하라고 말합니다. 진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언명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행위, 그러니까 자신의 진리 주장을 언어적으로 개진하는 의사소통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경우에 진리는 결국 진리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행위, 즉 진리의 언어적 매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발화의 특정한 속성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유 낙하 물체는 떨어지면 떨어질 수록 가속도가 붙는다'는 주장에는 진리주장이 담겨 있지만, '설악산의 겨울 풍경은 정말 멋지다', 혹은 '나는 에미넴의 음악을 좋아한다'라는 주장에는 진리 주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번째 주장에는 객관성을 띈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두번째, 세번째 주장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담론이론은 어떻게 보면 진리의 본질에 대한 회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해석을 담고 있지요. 담론이론에 따르면 진리는 '어떤 사태나 명제에 대해, 근거를 가지고 주장할 수 있고, 더 좋은 근거의 힘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수정할 용의를 가지고 있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모두 종합해 보면 진리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존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 회의주의, 2) 변증법적인 낙관주의 3) '진리'를, 언어행위 속에서의 '진리 주장'으로 대체시키고, 그 진리의 판정 기준을 '담론 안에서의 합리적 합의'에서 찾는, 진리의 담론이론. 여기서 합리적 합의란 '좋은 논거의 힘'에 의해, 그리고 오로지 그것에 의해서만 담화자 스스로가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용의를 갖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질문에서 좀 벗어나 버렸는데, 원 테제는, <타인의 무지를 깨기 위해서는 자신은 정작 진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명제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판정 기준이 '담화의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인 것'이 아닌, 진리주장이 일어나는 담론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원 테제, 즉 <산파가 어떤 사태나 사실에 대해 대화 상대방이 가지지 않은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담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유의미하게 판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수단보다 비언어적인 수단이 진리를 전달하는데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진리의 판정 기준은 오로지 언어적 담론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담론 이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무의미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까 제시한 인식 주체의 '주관적 확실성의 체험'을, 진리, 즉 '진리주장의 합리적 소통과 합의 가능성'과 단순히 혼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