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복지 담론에 집착하는 이유는 완결된 정치관 혹은 세계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경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주는 전체적인 프레임이 없기 때문에 선량함이나 도덕에서 캐치프레이즈의 근거를 구하게 된다. 그러나 민주당이 제시하는 선량함과 도덕은 한나라당이 제시하는 발전국가의 도그마보다 형편없이 덜 매력적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좌파 담론의 영역에는 커다란 진공 상태가 생겼다. 이 진공을 메꾸기 위해 "제3의 길"과 같은 신 진보 담론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주의를 대체할만한 매력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담론은 등장하지 않았다. 제3의 길은 진보적 에너지를 상당히 어정쩡하게 대표하는데 그쳤다. 그 혼돈의 자리에 페미니스트, 탈성장주의자, 생태주의자들과 같은 몽상가들이 창궐하면서 좌파의 전체적 경쟁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포스트모던 마르크스 담론은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동종교배의 폭주를 반복하다가 다행히 파멸했지만 여타의 잡스러운 몽상 담론들은 나침판을 잃어버린 젊은 좌파들에게 끊임없이 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 우파의 사정은 한동안 훨씬 나았다. 자유시장 경제는 거침없이 담론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시장 경제의 만능론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현재 좌우 담론은 모두 안개같은 혼돈의 상태에 진입했다고 볼수 있다.

한나라당은 이런 세계사적 담론의 조류에 비교적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담론이 후퇴한 자리를 군화발 성장주의로 대체해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대기업-조중동-한나라당의 기득권 신디게이트는 시장경제 만능론과 국가주의적 성장론을 왔다 갔다 하며 유권자를 능수능란하게 현혹한다. 장하준에게는 시장경제 만능론으로 대응하다가 애플에는 자국 기업 보호론으로 맞서고, 경제 정의론에는 시장경제 만능론으로 대응하며, 법률 규제에는 발전주의 담론으로 맞선다.

그렇다면 진보 세력은? 진보 세력은 발 디딜 담론이 없다. 복지국가는 담론이 아니라 도덕이나 선량함으로 무장된 정책 패키지일 뿐이다. 그런 기술 의제는 유권자에게 먹히지 않는다. 순진한 정책주의자들의 세계관과는 달리, 유권자는 오히려 담론에 반응한다. 유권자가 중시하는 것은 논리와 팩트, 혹은 선량함으로 무장된 정책이 아니라, 똑똑한 지식인들이 무엇을 반복해서 말하느냐이다. 1950년대의 한국인들이 자본론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회주의에 찬성했던것을 기억해보라. 또한 국부론이 뭔지도 모르는 유권자들이 시장경제 만능론에 반응했던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라. 지식 생태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많은이들의 동의를 이끌어낸 담론은 유권자들에 의해 모방되고, 그것은 투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지금 진보 진영에게 필요한것은, 한나라당이 발전국가론과 시장경제 만능론에 발을 딛고 권력을 차지하는것처럼, 최소공배수적인 일치 담론을 발견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담론은 반신자유주의론처럼 네거티브한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정치 공학적인 세몰이의 연대론이 아닌, 담론의 일치와 연대가 맺어질때, 권력은 따라온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것은 순결주의에 함몰된 자칭 진보진영이 중도 개혁진영과 담론의 영역에서라도 일치를 보는 일이다.




ps. 오늘부터 블로그 재개했습니다. 아크로가 하도 조용하다 보니.... 주소는 http://win0419.egloos.com 입니다. 옛날에 쓴글들은 차차 공개로 돌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