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진실이 아니라 도그마에 반응한다. 도그마는 객관적 논리와 사실이 아닌 내적 완결성에 호소한다. 정치 선전의 세계에서는 진실보다는 내적 완결성이 중요한 경우가 더 많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신화가 먹혀들어가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다.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을 파고 들어가는 스스로의 논리와 미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폭압적 독재를 경험한바 없는 국민에게 박정희의 독재는 추상적인 과거다. 하지만 불황과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는 서민에게 박정희의 성장신화는 추상적인 미래다. 나에게 아픔을 주지 않는 과거와 희망을 주는 미래를 가진 박정희는 결국 긍정적 평가를 받을수 밖에 없다.

김대중이 지속적 폄하와 저평가에 시달리는 이유는 박정희의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나온다. 김대중의 민주화 업적은 박정희의 그것처럼 추상적인 과거다. 반면 김대중의 imf 극복은 현실이다. 김대중이 imf 극복을 위해 쓴 정책들은 지금 나의 어려운 삶과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명박의 금융위기 극복이 정책 비판에 대한 알리바이가 안되는 것 처럼 김대중의 imf 극복은 경제 양극화와 불황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수 없다. 김대중은 어려운 현실과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과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 평가는 박해질수 밖에 없다.

반면 노무현이 점유한 "개혁"이라는 포지션은 막연한 미래를 상징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긍정적으로 각인된다. 지금 여기의 어려움을 극복한 김대중 보다 현실의 정치에 실패했지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노무현이 평가를 받는 아이러니다. 노무현의 비전 제시는 박정희가 상징하는 권위주의적 개발 독재에 대한 정확한 거울이미지(mirror image)라는 면에서 항구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김대중의 "신지식경제"라는 극히 합리적인 미래 비전은 정책 현실에서 활용됨으로서 오히려 소모(consume)되고 말았지만 노무현의 뜬구름 잡는 미래비전은 미완으로 남음으로서 오히려 대중의 무의식에 단단하게 각인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차이는, 김대중은 세계사적 조류와 한국적 현실에 바탕하여 김대중 고유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노무현은 박정희가 깔아놓은 사회문화적 레일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만을 놓고 봤을때 노무현이 김대중 보다 더 박정희에 적대적인 것 처럼 보일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에게 있어 박정희는 새로운 종합(synthese)을 위한 과거의 여러 테제들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노무현에게 있어 박정희는 안티테제를 위해 반드시 선존해야 하는 진테제라는 점에서, 진짜 박정희의 노예는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추종자들은 노무현이야 말로 권위주의를 극복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며 박정희와의 가장 먼 거리를 과시하지만, 막상 정치적 역동과 굴곡이 닥치면 그들은 항상 박정희에게 집착한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박정희가 있을때만이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남 친노들에게 있어 극심한데, 유빠들은노무현을 유시민으로 대체하고, 박정희를 박근혜로 대체하는 복음서를 씀으로서, 무의식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냈다.


진보 진영은 어떤가? 그들이 박정희를 인정하고 박근혜에 쏠리는 수렁에 빠지는 이유는 박정희가 깐 레일에서 벗어나 대중의 무의식을 재조정할 능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거라곤 쉰내나는 구좌파 사회주의 혹은 몽상적인 탈성장론, 혹은 밑도 끝도 없는 복지국가론밖
에 없다. 좌파 진영에서 "박근혜 현상"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하는 고백서라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