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이번 글은 좀 가벼운 마음으로 쓰고자 합니다. 덩달아 글까지 좀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또한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번 글은 전혀 논리와는 '무관'합니다. 그냥 개인적인 감상 정도로 읽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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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 근래 계절학기가 시작되기까지 조금 시간이 비어서, 오랜만에 '행동의 자유'라는 걸 만끽해 보았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저같은 녀석이 할 일이란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고 반디앤루니스나 교보문고 같은 데나 다녔지만 말이죠. 그러다가 며칠 전에 <한겨레>에서 박노자 씨 신작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서, 기분 전환 겸 일단 한 권을 샀습니다. 책 제목은 역시 그 분답게 섹시합니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라니.
1. 박노자 씨 글은, 어쨌거나 묘한 외부 시선 마케팅(?)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다른 시사평론서에 비해 왠지 흥미유발요소가 많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글을 참 읽기 쉽게 쓰는 장점도 있지요. 그런고로 이 분이 주장하는 내용은 그 골자가 너무 선명해서 읽을 내용을 '미리 알고' 읽게 된다는 점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 분의 다른 책을 몇 권 읽어봤다면 대략 유추가 가능한 내용이라, 추가로 논의할 바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냥저냥 흘려 읽었습니다.(원래 이 책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그래도 약간 적극적으로 '혁명론' 비슷한 것을 주장하긴 하더군요.)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부쩍 '요즘 젊은이' 들에 대해 할애한 분량이 늘어났다는 것을 느꼈다는 점입니다. 제가 최근에는 이 분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혹은 제가 당사자적 자각을 토대로 읽어나가서 그런지는 몰라도요.
2. 저는 중간중간의 그 대목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낙관적인가, 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다른 정당이나 정치인에게는 그렇게도 딱지 붙이기 좋아하시는 분이 대선에서 20대의 민노당 지지율(3.5%)과 20대의 한나라당 지지율(42.5%)을 대비시키면서 '그래도 그들을 보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37p)는 주장을 하는 것이 어딘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20대라는 '단일체'를 가정하는 것은 당사자인 저로서는, 혹은 그들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확실히 '20대가 어쨌거나 대체로 보수화되었다'는 말은, 논의의 서두에 던져놓아야 할 명제입니다.
3. 저희 학교는 서울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명문대'라고 불리는 학교, 즉 사회적 책임의식도 그만큼 강해야 할 학교이고, 최근까지도 '운동권'이 총학생회에 남아 있는 학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건, 학생들의 대다수는 단적으로 말해 '별 생각이 없습니다'. 최근에 학생들 주도로 시국선언을 할 때, 참여한 학생 수가 50명 남짓을 헤아리더군요. 그나마 대강 반 정도는 총학 관계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저는 멀찍이 지켜보다가 너무 처량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홍보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은 학생 시국선언을 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학생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으니까요.
4. 최근에 김용민이란 분이 20대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서("너희에겐 희망이 없다") 꽤나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이 글의 가치가 어떻고, 반응이 어떻고 하는 것은 너무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기 시시콜콜 토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박노자 씨가 이런 20대에 희망을 걸고 있는데, 그 희망이 너무 대단(?)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라는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20대 전반을 규정짓는 흐름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절망감을 느낀다는 박노자 씨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그들의 절망이 향하는 곳에 대해서는 헛다리를 짚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분노'를 산출하지 않습니다. 이 '절대명제로서의 절망'은 다시 '절망들'이라는 키치 담론들만을 재생산하며 냉소를 흩뿌릴 뿐입니다.
5. 그들은 '이명박'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명박을 싫어하는 현상은, 마치 몇 년 전 네티즌들이 '문희준'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층위를 형성합니다. 어쨌거나 이명박이라는 사회적 '쥐'의 대변자에게 똥오줌을 쏟아부음으로써, 그들은 식은땀 이면의 키치적 당당함이라는 자기만족을 얻을 뿐입니다. 마침내 정치현상학은 키치-학문의 세계로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절망을 보편자로서 인식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취업 담당관에게 내놓기 위한 '스펙'을 쌓으러 가야지요. 그런데 이 현상을 비판하고 때로는 비난하는 것마저 키치적 관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이제 의미 차원에서의 진정성을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말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 때 이 현상 자체는 안전한 공터로 도주해 숨게 됩니다. 완전범죄.
6. 그러나 어쨌건, 그들은 절망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 생산된 절망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무역수지 적자를 메꾸기 위한 자본수지 흑자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죠. 아쉽게도, 외부로 향하지 않고 안쪽으로 고여서 차곡차곡 쌓인 절망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은 그저 정액이 쌓이면 배설구를 찾아야 하는 많은 청소년처럼 '자위'에 머물 뿐입니다. 누군가는 정말 '쎾쓰'와 관련된 곳에서 이 절망을 해소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층적인 절망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의 절망은 좀더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적 자위를 열심히 해서, 학기말 리포트에 '아도르노,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를 인용하고 A+ 학점을 받습니다. 그 담론이 실질적으로 저항적이든 개뿔이든 그(녀)는 관심이 없고, 어쨌든 단지 글로써 그(녀)는 키치적 지위를 얻습니다. 자네처럼 의식 있는 학생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만. 이 '클래스'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전직을 위해서 많은 학생들을 모을 유인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똑똑해집니다. 글을 잘 씁니다. 머리가 좋습니다. 수학 문제를 잘 풉니다. 당장 맑스의 재생산표식이나 오키시오 정리에 관해 소논문 20쪽을 쓰라고 해도 써 낼 '철학과 학생' 혹은 '수학과 학생'이 수두룩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뻑'을 합니다. 아, 나는 정말 의식 있는 새 시대의 지식인.
7. 사실 그런 거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갖는 모순적인 지위는, 단지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386세대의 피땀으로 이루어져서가 아닙니다. 대체로, 현 세대의 학생들이 공부를 못 한다거나 책을 안 읽는다는 관찰은 피상적인 데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텔리겐치아는 언제나 소수였고, 그래서 그들은 '나로드'를 요구하기 때문이죠. 그들은 그렇게 '촛불'을 듭니다. 사회 문제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386의 패거리 문화, 권위주의, 변절은 오랜 클리셰입니다. 최근에는 우석훈 씨의 88만원 세대 담론도 여기에 한몫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어쨌건, 그들은 스펙을 쌓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쌓습니다. 저도 잘 쌓습니다. 아, 글 쌌습니다.
8. 이런 점에서 좀 뜬금없지만, 저는 최근의 '인터넷 만화'에 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자 합니다. 요즘, 엄청난 속도의 인터넷과 초현대적 사이버 문화를 통해서 인터넷 만화가 막대한 양으로 창작되고 공유되고 자발적 비평이-주로 댓글을 통한- 생겨나는 문화는 마치 20세기 전반기의 미술사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제목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는 '병맛' 현상에 관해 주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9. '병맛'은 디씨인사이드를 통해 주로 유통되는 인터넷 신조어의 한 종류입니다. '병신같은 맛'의 준말이지요. 말 그대로 '병맛'이라고 지칭하는 문화 컨텐츠-주로 인터넷 만화-를 접하다 보면, 정말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병맛의 핵심입니다. 병맛의 필수조건은, 아무런 담론 결정력이 없으며, 다만 약간의 유머와 문화 요소(이런 면에서 병맛 유행은 굉장히 아즈마 히로키적인 현상입니다)를 담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내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서사가 없는 병맛은 절대적으로 권장되지만, 정합성이 없는 병맛은 병맛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설'입니다.
초기의 병맛 문화를 주도했던 '잉위'의 '죤의 하루'.
믿기 힘드시겠지만, 위의 만화를 그렸던 '잉위'라는 작가는 한때 디씨인사이드 카툰 갤러리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였고, '본좌'로 추앙받았습니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조..좋은 병맛이다' 등의 댓글 관용구(?)가 이때 생겨났지요.
그 외의 초기 병맛 만화- '본격 행군만화'
10. 병맛 만화를 볼 때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는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현상은 공개성이 높은 커뮤니티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반 청년들(당연하지만, 디씨를 이용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1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젊은 연령층입니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은 구도는 마치 미술사에서 '재현의 붕괴'와 '열린 미술'을 연상하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예술사조는 '기댈 구석'이 없는 근대인들에 의한 실존적 불안을 반영하는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때, 예컨대 입체파나 야수파, 표현주의가 기세를 떨쳤던 때에, 얼마나 많은 근대적 신념들이 깡그리 파괴되었고 그 토양 위에서 신미술의 개화가 진행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병맛 현상'은 그것이 대중성을 띤다는 점에서 청년 세대를 통한 자발적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방황하는 개인과 그 분열이 드디어 20대의 클리셰가 되고 대중'문학'의 소재가 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11. 나아가 병맛 현상은 진화하여 숙성기를 겪습니다. 그럼에 따라서 다종다양한 '유파'가 생겨납니다. 이때 생겨나게 되는 특질들 또한 흥미롭습니다. 물론 아직 지나치게 포스트모던한 작품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의 확실해져가는 것은, 최근의 병맛 만화에서는 그 스토리가 단지 '정합성'을 가짐을 넘어서서 거의 '내적 신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 또한 모더니즘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고전적 구조를 전부 파괴해나가면서도, '의미'의 끈만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놓지 않으려는. 절망은 마침내 하나의 쓰레기 매립지를 파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정액들을 토해내야만 풀릴 정도로 욕구불만이 쌓인 거지요. 그것이 정말 자신의 '의미'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과열된 절망의 해소 과정은 분노가 아니라 '고도'를 불러오게 된 겁니다. 고도는 오지 않고, 분노는 그보다 더 요원합니다.
- '이말년'의 '비트박스 바이러스'와 '굽시니스트'의 '귀두기어스'. 이 계열의 작가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만화 작법과의 연결고리를 많이 유지하고, 주로 전통적인 형식으로 패러디, 해학, 때로는 사회 비판을 만화에 담아냅니다.
- '겸디갹'의 '마파두부'와 '산낙지 잘 먹는 애기'. 이 계열의 작가들은 '자신'의 사적 이야기와 세계를 창안하는 데에 집중하며, 가급적 그 세계 속에서 극도의 리얼리즘적 가-서사를 추구합니다. 사회 비판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 '솔스'의 '삼성 또 하나의 가족-섹스왕의 습격'과 '마사토끼'의 '행복이론'. 이 계열의 작가들이 가장 '병맛'의 본질에 가까운데, 이들의 등장인물들은 굉장히 진지하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감상자와의 틈새에서 소격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당연히 이것은 의도된 것입니다.
12.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인터넷만화의 전체 판도를 놓고 볼 때 아직 '병맛' 현상은 판 전체를 뒤집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병맛의 외부는 모두 대중예술 혹은 키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컨대 최규석의 100˚C와 같은 만화는 20대에게 여전히 열렬한 호응을 얻습니다. 실제로 만화 자체도 6월항쟁에 대해 약간 유치하지만 강렬한 파토스를 담고 있고, 전통적인 기법에 충실하며, 따라서 흥행 조건이 완벽합니다. 이 만화를 보면서 10대와 20대는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싹 잊습니다. 결국 웰-메이드 키치이기 때문입니다.
p.s. 쓰기 전에는 약간 더 진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쓰고 나서 보니 이 글은 자유게시판에 더 적합해 보이네요. -_-;;
일단 올렸기 때문에 놔 둡니다만.. 관리자님께서 그렇게 판단되시면 옮겨 주세요.
Sicut erat in principio, et nunc, et semper,
et in saecula saeculorum.
et in saecula saeculorum.
Kitsch (/kɪtʃ/) is the German and Yiddish word denoting art that is considered an inferior, tasteless copy of an extant style of art. kKtsch was a response to the 19th century art whose aesthetics convey exaggerated sentimentality and melodrama, hence, kitsch art is closely associated with sentimental art. Kitsch also refers to the types of art that are like-wise æsthetically deficient (whether or not it is sentimental, glamorous, theatrical, or creative), making it a creative gesture that merely imitates the superficial appearances of art through repeated conventions and formulae. Contemporaneously, kitsch also (loosely) denotes art that is aesthetically pretentious to the degree of being in poor taste and industrially-produced art-items that are considered trite and crass.
http://en.wikipedia.org/wiki/Kitsch
현재 우리 사회가 20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렇게 열심히 쌓은 스펙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삶이라는 현실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이 절망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지금은 부모들이 간신히 쌓아 놓은 재산을 축내면서 그 스펙의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곧 자신들앞에 놓인 현실의 벽을 직접 목격하게 되겠지요.
저는 님이 말씀하신 '병맛'이라는 것이 어쩐지 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펑크와 유사한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펑크라는 것도 당시 젊은이들의 높은 실업률을 원인으로 해서, 정치가 그 불만과 절망을 해결하지 못하던 시대에 나타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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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엔 아크로 메인게시판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글 같은데요... 앞으로 아크로의 정예 논객으로 활약해주시길 바래봅니다.^^
펑크와 비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펑크는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있지만, 소위 '병맛' 나는 인터넷 문화는 '포기' 로 부터 시작됩니다. 늬앙스 자체도 역설적인 화법으로서의 저항이라고 받아들여지기보다 '사회에 대한 포기', '경쟁에 대한 포기'로 받아지는 면이 더 강합니다.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조금씩 앞서나갑니다 )
우리나라에 dcinside가 있다면 일본은 2ch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히키코모리에서 조금 더 사회화 된 느낌을 가진
NEET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제는 NEET족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사회구성이 된 느낌입니다. 히키코모리가 타인이 봤을 때, 정신이상자 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에 비해, NEET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격리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죠.
소위 '병맛' 현상도 일본청년들의 NEET화(자발적 실업화)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박노자씨의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박노자씨가
민주화시대의 (피 끓는) 20대를 상상하고, 09년의 20대를 판단했다면 기초분석부터 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펑크가 유행하던 당시는 어쨌거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 어떤 대안적 이념으로서의 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과 일본은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에 모든 대안적 이념들이 무릎을 꿇고, 따라서 저항해봐야 헛되이 에너지만 낭비하는 것이다는 결론에 이르고, 결국 포기와 절망으로 이어지고, 그것들을 병맛이라는 문화로 표출하는 거라고 봅니다. 기존 권위를 거부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무너뜨려서 뭘 어쩌냐는 것이냐에 답이 없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현실화 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은 '저항'의 필수 전제입니다. 그 것이 없으면 저항도 없습니다. 이 것은 자본주의 뿐만이 아니라 과거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났던 문제인데, 스탈린의 전체주의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가 그 좋은 예가 되겠지요. 자신들의 체제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등장한 체제라고 믿어지는 사회였기 때문에, 결국 대안이 없었고, 때문에 저항을 포기하고 순응해버린 것이죠. 그 나라들에서 본격적으로 저항이 발생한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현실 사회주의를 압도한 것이 명백해진 때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때문에 지금 20대의 정치적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들부터 현재 시스템의 대안을 내놓아야 하지요. 그거 못하면서 20대는 희망이 없다는 둥 떠드는건 정말 무책임한 짓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대학은 대학이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젋은이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서가 아니고,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쟁력 있는 인재들이 배출되지 못해서도 아니다. 진짜, 대학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사회와 울타리쳐진 그런 '독특한'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를 자주 주눅들게 하는 서울대학교 정문의 그 'ㄱㅅㄷ' 조형물이 아직 신림동에 있기는 하다. 죽어있는 것 말고, 시멘트와 콘크리트, 철과 목재, 아스팔트와 칠판, 컴퓨터와 책, 이런 거 말고. 그것 말고 살아있는 것, 그 중에서도 권위로 꽉 찬 석고상 같은 교수들 말고, 고등학교 4학년 같은 신입생 말고, 사이보그 같이 도서관을 왕복하는 고시족 말고, 망해버리니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료와도 같은 교직원들 말고, 진짜 살아있는 것. 없다. 그러니 몇 평, 몇 동의 부동산과 몇 점의 동산으로 구성된 '물건'이 무슨 대학 나부렁이인가?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8p
그런데 마지막에 '병맛'의 외부는 대중예술과 키치가 됐다고 하시면서 최규석의 '100˚C'를 인용하셨는데 그게 꼭 키치라고 볼 수 있는 건진 잘 모르겠네요. 음...예를 들어서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본다고 사람들이 모두 의료민영화 반대 시위에 나가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보면서, '아, 이건 진짜 문제가 있구나' 정도 생각은 하겠지만, 보고 나서 다시 잊어버리겠죠. 존 레논의 'power to the people'을 듣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갑자기 급진적이 되거나 좌파가 되거나 하지도 않을 겁니다. 본래 좌파적인 사고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적극적인 정치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건...글쎄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요?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이 미국 식품의약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의 제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만, 이런 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라 생각되고요. 키치문화의 정의를 어디까지로 봐야 될진 모르겠지만, 최규석의 '100˚C가 웰 메이드 키치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중문화도 거의 다 키치라고 봐야할 것 같네요. 비단 20대의 문제도 아닌 것 같고..
윗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군데군데 형용모순을 뿌려놓은 곳이 많습니다. 예컨대 본문에서 '키치'라는 용어를 제가 빈번하게 사용했는데, 이 용어 자체도 상당히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그 의미에 관해서도 용어 사용자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 많죠. '웰-메이드 키치'라고 한 부분에서 보면, '웰-메이드'는 따지자면 통속(대중)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서(http://en.wikipedia.org/wiki/Well-made_play) '키치'와는 엄밀히 말하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물론 현대에 와서 그 경멸적인 원래 의미가 많이 희석되긴 했습니다만) 키치라는 범주를 사용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제가 '웰-메이드 키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100˚C와 같은 작품은 대중예술 혹은 키치라기보다는, 그 둘의 경계선 즈음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만화의 '주 고객'은 6월 항쟁을 '이미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이나 학생운동사 같은 건 원래 관심도 없었고(물론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가 곁다리로 훑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다만 감성이 날카로운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중반 정도입니다. 분명히 이 만화는 이러한 주 고객층에 대놓고 무언가를 촉구하는 면이 있습니다. '선동'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쓰기에는 너무 강렬하지요. 어쨌거나 이 '촉구'는 거기서, 그들의 감성을 강하게 자극하여 '관심'을 유발하려는 목적이 '뚜렷하게' 감지된다는 정도의 의미와, 그 '관심'이 '현실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 속에 묻힌 것-적어도 '주 고객층'에게는-'에 대한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예컨대 '의지의 승리'나 '식코'의 경우는 후자의 의미가 없거나 미약하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진정으로 이 '촉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감상자와 작품의 반성적 거리가 소멸되는 곳에서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 고객층'이 이것이 그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모를까요'? '현 세대'의 감상자인 그들은, 물론 저도 포함해서, 첫 장면('반공소년')부터 작품과 거리를 둡니다. 그들은 이 작품과 함께 눈물을 흘릴 줄은 압니다. 실제로 저도, 6월 항쟁에 관해서는 귀가 닳도록 이미 들었는데도, 모두 예측가능한 몇몇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제가 눈물이 많고 유치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에게 그 정도로 작품의 파토스는 강렬했습니다. 감상자는 아마 약간의 얼치기 시대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물론, '얼치기'가 아닌 감상자가 일부 존재한다는 것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분할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눈물'로 대변되는 파토스의 홍수만이 존재할 뿐 '촉구'는 사라집니다. 이미, 감상자와 작품 간의 거리두기는 그만큼 간극이 넓습니다. 또한 그 거리두기의 화살이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감상자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키치입니다. 감상이 끝나면, 더 이상 감상자는 작품 속에 머무르려 하지 않습니다.
또, 이 작품의 스토리는 단선적일 뿐더러(아마도 현대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구태의연할' 겁니다), 전형적인 몇몇 극적 구도와 등장인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사건들은 역사적인 몇몇 사건들을 제외하면, 초반의 단초로부터 모두 예측이 가능하도록 전개됩니다. 즉 이 작품은 웰메이드 대중예술입니다. 아마도 소설을 많이 읽고 만화를 많이 본 현 세대의 독자들은, 이런 전형적인 웰메이드 극화 전개로부터 이것이 역사성을 갖는 실제 사건이라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잊습니다. 혹은 좀더 열성적인 독자들은 이걸 군데군데 퍼나르겠지요. 그러나 그 행위는 다른 재미있는 웹툰을 퍼나르는 행위와 비슷한 정도의 의미 이상은 갖지 않습니다.
키치와 대중예술, 그리고 예술 일반에 관해서는 나중에 제 생각이 좀더 정리되면 다른 글로 찾아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오해 한 가지를 풀자면, 위에서 제가 언급했던 '병맛 외부는 대중예술과 키치'라는 명제에는 시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과장법이 들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좀더 진지한 층위에서라면, 저는 그런 극단주의자는 아닙니다. 이는 키치와 대중예술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무책임한 비관주의로 이어지는 감상 측면에서의 극단적 엘리트주의(현대의 모든 예술은 대중예술 혹은 키치다, 혹은 '이것'을 제외하고 모든 예술은 대중예술 혹은 키치다)는 기각합니다.
우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들 드리고 싶습니다. 애초에는 단순한 인상비평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호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모쪼록 치하해주신 바는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지적인 면에서나, 시간적 여유 측면에서나 아직 '정예 논객'의 자격은 없을 것 같네요. 일단 좀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안목을 길러야겠지요.
북극곰//
사실, 아즈마 히로키를 언급할 즈음에 일본 오타쿠 컬쳐-니트족-후리타, 그리고 일본의 인터넷 미술 문화 등에 관한 내용까지 좀 곁들여 볼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다면 분석 측면에서는 글이 좀더 가치가 있었겠지요. 병리성이라는 면에서 한국과는 아직 비교가 성립하지 않으니 그 충격효과도 클 테고요.(예로 '구로찬'이나, 이런 계열에서 한국계 커뮤니티로는 꽤 역사가 있는 '식칼성' 등을 언급하는 것도 심중에 있었어요..-이 둘의 경우,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정도로 포함 내용의 수위가 높아 링크는 걸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쪽은 아직 자세히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제가 이렇다 할 이야기는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만뒀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어느 정도 일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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