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의 일리아드라면 적어도 그 제목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는 그보다는 덜 알려진 소설인 듯 하다.

그러나 두 소설은 등장인물도 겹치는 점이 많은 데다가 그 내용의 구성 역시 전체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이 10년간의 공격 끝에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내용이고(물론 그 역사가 다 실린 게 아니라 과정 중 일부가 내용이지만) 아이네아스는 이 트로이의 장군 중 하나가 피난민들을 끌고 여차여차한 끝에 로마의 원조가 되는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리아드의 주인공은 아킬레스라는 인물이고 아이네아스의 주인공은 물론 그 제목에 표시되어 있는 그대로이다. 여기서 각기 주인공의 라이벌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내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 라이벌이다. 주인공 - 라이벌의 관계는 시시한 3류 만화나 무협지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구도이지만 그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금은 별로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는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상대 (운명이나 신 등과 같은) 와 싸움을 벌여 끝까지 용전분투하다가 마침내 패배하는 내용의 소설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이들 일리아드와 아이네아스는 물론 '삼국연의', '맥베스','노인과 바다','백경' 등이 모두 한때 내가 좋아한 소설 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 - 운명과 싸우다 패배하는 - 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의 비극들에 대해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내용들은 그 주인공들이 운명과 싸워 패배하는 것에 대해 별로 높은 평가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주인공에게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덤비다니 바보 짓을 했다 내지는 감히 신에게 도전했으니 불경한 놈이다 이런 식의 평가를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사실 이 점에서는 일리아드나 아이네아스도 예외는 아니다. 먼저 일리아드를 보자. 주인공 아킬레스의 라이벌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다. (아이네아스도 잘 싸우기는 하지만 이들보다는 한 수 아래) 여기서 일리아드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헥토르의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무나 완벽'해서 현실감이 안 난다는 점이다.

그는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하고 부모에 대해선 지극한 효자다. 형제에 대해서는 우애를 가지고 대하되 동생이 꽁무니를 빼려 하면 몹시 질책하며 분발시킨다.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다. 그러면서도 전쟁터에 나가면 그야말로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싸움도 잘 할 뿐 아니라 전술도 잘 쓸 줄 알고 지도력, 통솔력도 대단하다. 그러나 평화시에는 지극히 신을 공경하며 적군의 사자가 무례하게 굴어도 인도적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그리스의 소위 영웅호걸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야말로 깡패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리아드의 작가가 실제로 헥토르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가? 잠시만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전투력 수치가 그다지 높지가 않다. 일리아드 전편에서 볼 때 아킬레스가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역시 그리스군의 아이아스와 디오메데스의 순서다. 헥토르가 죽기 전에도 이 세 사람과 붙을 때마다 형편없이 깨지고 다쳐서 돌아온다. 그밖의 그리스 장군들과 붙을 경우에도 별로 좋은 전과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자기편의 신들이 도와줄 때만 겨우 이길 뿐이다.

다음으로 신들이 그를 평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의 편이 없다. (공경이랑 제사는 다 받아 쳐먹고 나서) 그나마 좀 낫다는 제우스도 그가 인간의 아들이니 아킬레스와 동등하게 대우해 줄 수는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며 그리스 편을 드는 신들은 아예 그를 "그리스군을 괴롭히는 잔혹한 자"니 "아귀같이 날뛰는 헥토르"니 하면서 기회만 나면 죽이고 싶어할 뿐이다. 도대체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전쟁터에서 떳떳한 대결로 무찌르는 모습을 보고 ‘잔혹’하다느니 ‘날뛴다’느니 악담을 한다…? 세상에 이 이상의 억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걸 보면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적어도 이 일리아드의 작가 눈에는(그리고 그것이 그리스 서사시를 쓰던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관점이겠지만) 현대에서 높이 평가되는 정직, 성실, 충성심 따위의 덕목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장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급의' 장점은 주인공의 라이벌에게 몽땅 몰아주어도 별로 상관할 바 없었다. 당시의 1차적인 덕목은 우선 다른 자보다 강한 것이고 그 다음은 남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아킬레스만 해도 강하고 잘생겼다는 두가지 장점을 다 갖췄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신'들도 그의 편을 드는 것이다. 정숙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데다가 상당한 된장녀인  '헬레나'가 여주인공 역할을 맡는 것도 어찌됐건 그녀가 미인이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는 사실 읽는데 일리아드만큼의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그건 주인공 아이네아스의 인간성이 아킬레스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고 그의 라이벌 투르누스는 사실 좀 비겁하고 잔인한 면을 가끔 보이기 때문에 그가 죽을 때에도 헥토르만큼 아쉽게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 이건 베르길리우스의 문학적 능력에 달린 거겠지만 - 투르누스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자각과 그로부터 가끔씩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감 따위는 일리아드보다 훨씬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그에 대한 동정심이 더 생길 수도 있다.

사실 고대의 문학을 보면 주인공이 적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동서고금을 통한 진리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신화를 봐도 그 대부분의 내용은 항상 ‘영웅적’인 주인공이 적들을 잔혹하게 도살하는 이야기 뿐이다. 사실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 민족들이 생존에 성공했을 것이다.

적에게 보이는 관대함, 패할 줄 알면서도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도전하는 용기가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자신보다 힘이 약한 자들은 몰살시키고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비굴하게 굽신대면서 살아온 인간들이 어쩌다가 자신들이 생존의 위협까지는 안 받게 되자 이런 이상한(생존에는 전혀 불필요한) 덕목들을 숭배하는 관념의 유희를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