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 여성 목사에 대한 미국 교회의 처리과정을 뉴스엔조이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씨 헤이븐 교회의 태도와 과정은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나 다른 많은 조직들이 배워야 할
문제해결 방식의 좋은 모범이라 생각합니다
좀 길어도 다 읽으시면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1. 문제의 발단

1) 새라의 커밍아웃

2002년 초, 북미의 씨헤이븐 메노나이트 교회(가명)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그 교회에서 청소년부 사역을 감당하던 여성 부목사 새라(가명)가 어느 날 리더 모임에서 충격 고백을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으며, 또한 동성연애를 해 온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녀는 리더들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분별과 판단을 요청해 왔다. 물론 당시 리더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황했고,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리더 그룹은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이 리더 그룹에는 담임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새라의 정직한 고백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새라를 해고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사역을 하게 해야 하는가? 회개하도록 촉구할 것인가? 아니면 새라의 독특한 성적 취향을 인정하고, 축복하며, 나름의 가정을 꾸리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인가?

리더 그룹은 그날 이후 새라와 몇 차례 더 모임을 가지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깊은 논의를 계속했다. 결국 리더 그룹은 이 문제가 자신들의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리더 그룹에는 담임목사도 있고, 교회의 여러 사역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장로교로 치면 일종의 당회와 같은 것인데 놀랍게도 그들은 이 문제가 자신들의 권한 밖에 있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하는가? 교회 회중이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에 알리기로 결정한다.

리더 그룹이 결정한 또 한 가지는 지금의 교회 공동체가 이 문제를 현명하게 다루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 그룹은 교회가 이 문제를 잘 분별해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와 함께 나눔과 배움,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세 번째 결정은 새라 목사는 이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당분간 교회 사역에서 손을 떼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결코 새라를 임의로 해고하거나 교회로부터 출교시키는 조치가 아니었다. 리더 그룹은 새라의 정직한 고백에 감사를 표했으며, 그녀의 고백에 신실하게 반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라는 리더 그룹과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2. '한 손에는 삶을, 한 손에는 고통을'

4월 28일, 리더 그룹은 주일 예배 시간 중 '나눔의 시간(sharing time)'에 새라의 문제를 전 교인에게 얘기했다. 회중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레즈비언이라는 그 얘기를 듣고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씨헤이븐교회가 아무리 서구 교회라고 하기는 해도 동성애 문제는 그들에게도 민감한 문제였다. 더구나 4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담당해 왔던 목사님이 레즈비언이었다니….

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동성애 반대파고, 다른 파는 찬성파였다. 반대파는 성서가 동성애를 분명하게 죄로 규정하고 있는 이상 새라 목사는 당장 교회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목사직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이에 대해서 찬성파는 반대의 의견을 주장했다. 반대파의 성서 해석이 잘못되었으며, 성서는 도리어 약자를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새라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동성애 성향을 새라의 잘못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되며, 도리어 축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보다 많은 수는 양측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었다.

교회에 새라 목사의 이야기를 나눈 뒤 여러 사람이 상처받고 실족했다. 벌써 몇 가정은 교회를 떠났다. 교회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자칫 잘못하면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회 안에서 커져 갔다. 어쩌면 동성애 찬성파과 반대파가 교회를 둘로 찢어 놓을지도 모르고, 아예 교회가 공중분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들기 시작했다. 교회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 동성애를 찬성해도 문제고, 반대해도 문제다.

만에 하나 씨헤이븐교회가 동성애를 찬성하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교회는 자칫 교단과도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교단 전체의 입장은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씨헤이븐교회 건물은 라틴계 교회와 한국계 교회도 함께 쓰고 있었으며 세 교회는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자칫 이들과의 교류에도 문제를 만들 소지가 있었다. 사실 이 두 외국계 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라의 문제는 일파만파 퍼져 갔다. 단 한 사람의 문제 때문에 전체 교회가 이런 엄청난 어려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리더 그룹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렇다. 정확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라의 이야기를 공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고통과 맞서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는 500년 고난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법을 배워 왔다. '한 손에는 삶을, 한 손에는 고난을' 들고 그들은 미련할 정도로 신실하게 옳은 길을 따른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감수하고 정면으로 문제와 맞부딪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함께 나누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셨던 길이고 제자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생각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리더 그룹은 교회에 다음 몇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우선 교회가 이 문제를 분별하고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때까지 교회를 돕는 팀을 만들자는 것이다. 기존에 사역자들 위주로 이루어진 리더 그룹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팀은 가급적 평신도로 이루어진, 또한 다양한 입장의 의견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된 팀이 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교회는 이 팀을 '인간 성 문제에 관한 리더십 팀'Human Sexuality Leadership Team, HSLT)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리더 그룹은 교회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별해서 새라의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나눔과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리더 그룹은 이를 위한 일정을 제안했는데, 이 일정은 세 개의 시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시즌은 나눔과 청취, 돌봄의 시즌으로 4개월이 소요될 예정이고, 두 번째 시즌은 교육 시즌으로 6개월이 소요될 예정이며, 세 번째 시즌은 분별과 결정 시즌으로 다시 4개월이 소요될 예정이다. 총 14개월이 걸리는 엄청난 일정을 제안했다. 세상에! 전 교회가 이 하나의 문제를 분별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자그마치 14개월 동안 여기에만 올인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교회의 전 부서의 모든 일정은 취소되고 오직 이 문제에만 집중하게 된다.

3. 제3의 길

1) 기술적 문제(technical problem)냐 vs 적응적 문제(adaptive problem)냐

씨헤이븐교회에 새라의 이야기를 알리자마자 교회는 곧바로 동성애 찬반 입장이 나뉘고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십중팔구는 동성애에 대해서 찬성, 아니면 반대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씨헤이븐교회는 이렇게 양자택일하기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아나뱁티스트는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늘 제3의 길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씨헤이븐교회 역시 공동체가 이 문제 앞에서 깨지거나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며, 도리어 서로 윈윈(win-win)하는 길이 있지 않는지 살폈다.

이를 위해서 씨헤이븐교회는 찬반 토론을 하기에 앞서서 과연 새라와 관련된 이 문제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 문제의 성격이 기술적인가, 아니면 적응적인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기술적(technical)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동성애 문제를 찬성·반대를 판가름하는 기술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서로 자신의 의견을 정한 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가다듬고,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의견을 굴복시킬까 하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기술적인 태도다.

반대로 만일 이 문제가 적응적(adaptive)이라면 이 문제를 단순히 찬성이냐, 반대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적응적 태도는 일단 자신의 이해와 지식의 부족을 겸허히 인정한 뒤 그 문제에 대해서 세밀하게 공부하고 배운다는 뜻이다.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다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문제를 외부에서 판단하는 자세로 굽어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문제 안으로 들어가서 같이 배우고, 공감하고, 아파하고, 도전받고, 그래서 자신들의 관점과 생각이 변화를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적응적인 태도다. 이 점에서 씨헤이븐교회는 새라의 문제를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적응적 문제로 규정했다.

이와 함께 씨헤이븐교회는 의사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만일 새라의 문제를 찬반 양자택일을 가리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기회로 삼는 적응적 문제라면,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voting model)은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씨헤이븐교회는 이 문제를 합의 방식(consensus model)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교인들이 공감하고 합의하는 쪽으로 뭔가를 결정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2) 배움의 거부

그러나 씨헤이븐교회의 이러한 결정을 모두 환영하지는 않았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극단적인 찬성과 반대를 표하는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 그랬다. 동성애 반대 측 사람들은 배움의 시간이 왜 필요하느냐고 항의했다. 성서가 명확하게 동성애를 금하고 있으며, 바울 사도가 분명하게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의 목록에 언급하고 있는데 뭘 더 배우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새라를 회개시키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동성애 찬성 측 입장을 가진 이들은 동성애 반대 측 사람들을 전통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새라를 축복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무척 흥미로운 것은 양편 모두 공통점이 무척 많더라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배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리더 그룹에 제시한 14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의 나눔과 배움, 대화 과정을 거부했다. 이들은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행여나 자신의 입장을 바꾸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의심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입장은 확고하며, 그것이 성서적이며, 항구불변의 진리라고 확신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전체 교회가 자신을 따라올 것만을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14개월 동안 교회가 정한 일정에 불출석하겠다고 결정했다.

사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성(sexuality)'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금기시되어 있던 '동성애'라는 주제를 온 교회가 1년 2개월이나 집중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씨헤이븐교회는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라틴계와 한국계 형제 교회들에게도 그 과정에 동참해 주십사 하고 초청했지만 이들은 모두 거부했다.

4. 일정 요약

1) 제1시즌: 나눔과 경청

교회에 새라 이야기를 나눈 뒤 곧바로 '인간 성에 관한 리더십팀(HSLT)'이 발족되면서 첫 시즌이 시작되었다. 이 팀에 의해서 전체 일정이 계획되고, 논의의 방향이 제시되며, 교육 자료 등이 공급되었다. 첫 번째 시즌에서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새라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개인적인 소감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누구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외부 강사를 두 번 정도 초청해서 조언을 듣기도 했다. 또한 교단에 이 내용을 알리며 도움과 조언을 구했다. 첫 번째 분기에서 두 번째 분기로 넘어가기 전에 숨을 고르기 위해서 잠깐 휴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2) 제2시즌: 교육

두 번째 시즌은 9월부터 시작되어서 다음해 2월까지 6개월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HSLT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HSLT는 전체 주일학교 부서와 협력해서 전체적인 교육 과정을 짜고, 커리큘럼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역할들을 감당했다. 전 교인이 참여하는 주일학교는 전승 분과(tradition), 예언서 분과(prophecy), 지혜서 분과(wisdom) 등 세 분과로 나누어서 각자 전문적인 연구와 교육을 시행했다. 이들 연구는 다시 성서 자료와 비성서 자료를 원천으로 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HSLT와 주일학교부는 주일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유년부부터 장년부까지의 모든 학생들을 위해 이들에게 맞는 교육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성서 자료를 원천으로 하기 위해서 성서에 대한 세밀한 주석 작업과 신학적 검토 작업이 있었다. 특히 성서 작업은 인간 성에 관한 모든 성서 본문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작업과 또한 동성애와 관련된 모든 신구약성서 본문을 일일이 세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비성서적 자료의 바탕으로는 최근에 성 문제 및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서 논의되는 다양한 자료들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설교 팀도 6개월 동안 이 문제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설교 주제를 선정하고 설교했다. 하지만 설교 내용을 동성애에 직접 맞추기보다는 교회가 이 문제를 풀어 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인간의 창조와 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포괄적인 성서의 가르침을 설교했다. 올드맨(가명) 담임목사가 절반 이상의 설교를 담당했지만 그는 가급적 자신의 견해가 교인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주일예배와 함께 대그룹과 소그룹 모임이 조직되어 연구와 토론을 이끌었으며 여러 차례 포럼이 개최되었다. 또한 전에 동성애자였다가 지금은 돌아선 이들의 모임인 엑서더스 인터내셔널(Exodus International)과의 만남이 있었고, 주일예배 시간에 게이와 레즈비언을 초대해서 대담하는 시간도 가졌으며, 그들 가족도 따로 초청해서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교육 시즌을 진행해 나가는 중에 11월에 씨헤이븐교회는 새라와 언약을 체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교회 회중이 새라의 정직한 자기 고백에 감사하며, 끝까지 신실하게 반응하겠노라는 내용의 언약이었다. 이상의 교육 시즌은 2월 중 금식과 기도 주간을 가짐으로써 끝났다.

3) 제3시즌: 분별과 결정

세 번째 분별과 결정 시즌은 3월부터 6월까지 넉 달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은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호불호를 표현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표현은 누구 한 사람만이 아니라 전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올드맨 목사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설교를 통해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목사로서의 권위나 설교의 힘(power)을 그렇게 활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목회서신을 썼다. 그리고 전체 회중은 다시 담임목사의 서신에 반응하는 기회를 가졌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 설문 조사를 했다. 하지만 이때 설문 조사는 단순히 동성애 찬반을 묻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인간 성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의견을 묻는 설문이었다. 동성애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답변 가능성을 열어 두고 교인들의 의향을 물었다. 예컨대, 동성애는 반대하지만 새라 목사의 사역은 찬성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동성애는 찬성하지만 새라 목사의 사역은 반대한다는 뜻을 표현할 수도 있었고, 새라의 목회 사역은 반대하지만 지속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긴장감이 높아졌고,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연장자들이 생겨났다. 담임목사는 이들을 일일이 심방하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6월이 되자 드디어 씨헤이븐교회는 씨헤이븐교회만의 인간 성에 관한 선언문 작성에 들어갔다. HSLT가 초안을 작성하고, 교회가 이를 검토하며 승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6월 21일 최종 모임에는 '인간 성의 신앙에 관한 선언을 향해서(Toward a Statement of Beliefs on Human Sexuality)'라는 이름의 문서가 채택되었으며, 새라 목사의 목회직 유임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5. 담임목사의 목회서신

올드맨 목사는 세 번째 시즌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썼다. 그는 그 서신에서 인간 성에 대한 포괄적인 자신의 신앙을 밝히고, 동성애에 대해서와 새라의 목회직 유임 여부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밝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목사의 이러한 선택은 그가 자신이 가진 힘(power)을 이용해서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부당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서신에서 자신과 공동체, 나아가 세계 교회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기초적 신앙(Foundational Conviction)을 설정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고 따르는 공동체로 정의했으며, 교회는 성서를 표준으로 사고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과,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과 신앙을 존중할 것,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 등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개인의 편향성(personal bias)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동성애에 대해서 개방적이라는 것과, 새라와 4년 동안 즐겁게 동역해 왔던 경험이 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다소 추상적 사유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위기의 상황에서 회피하려는 약점이 있음도 인정했다.

세 번째로 그는 인간 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했다. 성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아름답다는 것, 인간의 신체와 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다는 것, 성적 충동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그릇된 욕구의 충족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 결혼과 함께 독신도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것 등을 밝혔다.

이제 그는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문제 삼고자 하는 동성애는 선천적인 동성애자인 경우이며, 선천적 동성애자가 일부일처식(monogamy) 결혼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경우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정확히 새라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는 성서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성서는 일단 동성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무척 적은 내용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나마 존재하는 동성애 본문도 자신이 문제 삼는 경우와는 다른 경우라고 그는 믿는다. 구약에서의 경우 동성애는 강간이나 성폭행 등을 주로 의미하고, 신약의 경우는 나이 많은 성인이 미(美)소년과 관계를 맺는 소위 '남색'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아동 성폭행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또 레위기에 나타나는 동성애는 여성의 월경이나 남성의 몽정, 혹은 기타 금기 음식과 같은 제의적 부정함의 목록으로 보았는데, 그가 생각할 때 이러한 부정함은 예수 이후 신약시대에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새라 케이스의 경우, 관건은 동성끼리 '언약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는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새라의 경우 동성 간의 언약적 관계 맺음이 가능하며 교회는 이를 축복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목회직 유임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6. 최종 결정

6월 21일, 드디어 최종 결정을 하는 마지막 모임이 열렸다. 교회는 6월 7일, 14일, 21일, 세 차례의 모임을 통해서 14개월의 전체 일정을 정리하고 21일에 최종적인 결정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씨헤이븐교회는 14개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실로 엄청난 내용의 교육, 포럼, 토론, 대화, 연구 등을 해 왔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면서 동성애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들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씨헤이븐교회는 대체로 동성애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으로 바뀌었으며 새라의 목회직 유임에 대체로 긍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날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모임이 있던 날, 모임 참석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지난 14개월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나타났다. 이들은 한결같이 동성애에 대해서 극단적이고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었다. 대체로 동성애 반대자들이 많았지만 동성애 찬성론자도 더러 있었다. 물론 이들은 중간 중간 교회가 진행하는 과정들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여러 차례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임에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이 마지막 날 자신의 의견 개진을 위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비록 그들이 14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출석을 제지할 길이 없었다. 교인들은 당황하고 또 분노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들은 투표를 요구했다. 새라 목사의 목회직 유임을 표결에 붙여서 찬반을 묻자는 것이다. 목회자 청빙에 관한 교회법을 근거로 이들은 이 문제를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씨헤이븐교회가 투표 방식이 아니라 합의 방식을 택하기로 한 합의를 파기하는 것이었고, 그동안 힘겹게 지나왔던 씨헤이븐교회의 모든 과정을 일순간 수포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꽤 많은 교인들이 바쁜 일정으로 교회 모임에 빠졌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결석한 교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으며, 그동안의 분위기를 보건대 아마도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결석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지혜롭게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오던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인들도 막상 이렇게 험악한 상황이 닥치니 함께 흥분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 사람이 지금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가 아니니 조금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지만 금방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애초의 약속대로 뭔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결국 새라 목사의 재계약을 표결에 붙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표결 인원의 2/3이상(66%)이 찬성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63% 찬성이었다.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라 목사에게 목사직 없이 평교인으로 동일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 역시 표결에 붙였다. 하지만 좀 더 근소한 차이로 다시 부결되었다. 결국 새라 목사는 해고되고 말았다.

7. 교훈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대단히 크다. 특히 마지막 모임은 동성애의 문제를 단순하게 찬반의 문제로 보는 것이 얼마나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씨헤이븐교회의 마지막 모임은 별로 아름답지 않게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손가락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힘(power)과 진리(truth)

아나뱁티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바로 '힘'에 대한 통찰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힘(power)'의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정직하게 주목해 왔다.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들 중 많은 부분은 결국 이 힘의 문제를 간과하는 데서 온다.

앞서 올드맨 목사는 담임목사라는 직위와 설교라는 행위에 힘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힘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 설교가 아니라 목회서신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교인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교회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목사와 장로들이 힘 대결을 하고, 원로목사와 신임목사가 줄다리기를 하고, 사역자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에서는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힘을 통해서 진리를 증거하고 수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메가 처치는 무엇인가? 힘 있는 교회다. 메가 처치 목사는 힘 있는 목사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힘은 인력, 재력, 정보력, 심지어 정치력까지 막대하다. 소위 훌륭한 목사는 그 막대한 힘을 이용해서 복음을 잘 전하고 교회를 잘 운영하는 목사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힘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힘은 반드시 나누어져야 한다. 그래서 메노나이트 교회에서는 공동의회 의장은 담임목사가 맡지 않는다. 힘을 나누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힘으로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힘으로 진리를 효율적으로 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진리는 진리고 힘은 힘이다. 힘은 강제력이며 강제력은 자유와 반대된다. 따라서 힘은 필연적으로 자유 없는 진리를 강요하기 마련이다. 힘으로 진리를 전하거나 수호하는 것은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인간이 있는 곳에 힘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힘은 세심한 조율과 안배를 통해서 잘 다루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 진리는 힘없이도 스스로 진리 됨을 드러낸다. 그래서 성서는 예수에 대해서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소리 지르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모임에서는 바로 이 힘에 대한 아나뱁티스트의 원칙이 무너졌다. 왜냐하면 마지막 모임에서 중심은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힘 대결의 문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표도 일종의 힘이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자신들의 머릿수라는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고 말았다. 그와 함께 합의가 무너졌고 교회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 동성애의 문제를 논할 때 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동성애의 문제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힘 대결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해석학적 공동체

씨헤이븐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중요한 또 한 가지 교훈은 그들의 교회에 대한 관점이다. 새라 목사의 일은 어찌 보면 교인 중 고작 한 사람의 사적인 문제일 수 있었다. 또 그것은 굳이 14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몇 주 동안 당회나 제직회, 혹은 공동의회에서 상의해서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도로 전문적인 작업들을 진행해 나갔다. 마치 정부나 연구 기관이 하듯이 하나의 지역 교회가 그토록 심도 깊고, 신중하게 문제를 처리해 나갔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아나뱁티스트의 독특한 교회관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역 교회의 권위는 성서 다음으로 높다. 교회는 맺고 푸는 권세를 가진 신적 기관이다. 그 권세는 로마 교황청의 주교 좌에 있거나, 혹은 세계 교회에 있거나, 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따라서 새라의 문제가 터졌을 때, 이 일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씨헤이븐교회 공동체에 있다.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위도 그 교회 공동체에 있다. 담임목사나, 장로나, 신학자나,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의 권위를 넘을 수 없다. 그래서 리더 그룹은 새라 문제를 교회 공동체에 알렸으며,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수행하고 결정하는 힘과 책임, 권위는 오직 씨헤이븐교회 공동체에 있다'고 천명했던 것이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메노나이트 교단의 입장은 아직 보수적이다. 1986년 사스카툰 선언이나 1987년 퍼듀 선언 등은 동성 간의 성적 관계는 결혼이라는 성서적 언약 관계에 포함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씨헤이븐교회가 동성애에 대해서 다소 개방적인 입장의 선언문을 작성했을 때 다른 교단 교회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물론 씨헤이븐교회는 자신들의 선언문에 사스카툰과 퍼듀 선언문의 핵심 내용을 인용했으며 교단 지도자의 자문을 여러 차례 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헤이븐교회는 새라의 일과 관련한 결정이 일차적으로는 씨헤이븐교회 공동체가 내려야 할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이는 먼저 전 신자 제사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모든 침례받은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들의 회(會)인 교회 공동체보다 상급 기관이 있을 수 없다. 두 번째로는 공동체에 대한 신앙 때문이다. 공동체는 한 몸을 이룬다. 따라서 이 일에 대한 결정은 한 몸을 이룬 씨헤이븐교회 공동체가 내려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그들은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또 논쟁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고 덕스럽게 진행된다면 이를 통해서 도출된 합의안은 성서 다음의 권위를 갖는 결정이 된다.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는 성서를 읽는 독자를 각 개인에 앞서 교회 공동체로 본다. 성서의 독자는 공동체이며 그 성서에 대한 해석자도 공동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해석학적 공동체(hermeneutic community)'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러한 신념 때문에 오랫동안 소위 공동체적 성서 읽기 방법을 개발해 왔다. 함께 성서를 읽고, 각자 해석하여, 서로 토론하고, 합의를 도출해서 공동체의 해석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성서 읽기 방식이다.

3)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아나뱁티스트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들은 공동체의 연합과 연대를 누구보다 강조한다. 동시에 이들은 서로의 차이를 강제적으로나 획일적으로 통일시키려 하지 않는다. 차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래서 공동체는 통일성과 함께 다양성이 공존한다.

차이(difference)는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의 중요한 화두다. 기존의 모던 사회에서는 차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 서양, 백인, 남성, 이성, 과학, 합리성 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획일적 통일을 거부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그대로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나뱁티스트는 일찍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가치를 선구적으로 알아차렸다고 할 수 있다.

진리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누구보다 다양한 진리 가능성을 인정한다. 500년 전부터 이들은 다원주의(pluralism)를 실험해 온 것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즘을 종교 다원주의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진리의 다원성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성서를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고 주장한다. 성서 중에서도 사복음서, 그중에서도 예수의 가르침, 그중에서도 산상설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주장한다. 물론 이들이 진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식적 진리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말한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양보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요, 모든 판단의 시금석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종교개혁 시절에 유아세례는 틀렸고 재침례가 맞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국가 교회는 틀렸고 자유 교회가 맞다고 주장했고, 폭력과 전쟁은 틀렸고 평화와 화해가 맞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무조건적인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성서가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씨헤이븐교회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이러한 성격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 경우, 이것은 지속적인 성찰, 성서 묵상, 토론, 대화, 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고려 등이 필요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한 의견으로 다른 의견을 강제로 획일화할 수 없다. 서로는 서로의 다양한 입장을 존중하며, 함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4) 여정

아나뱁티스트는 신앙생활을 자주 '여정(journey)'이라고 표현한다. 여정은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인을 나그네(paroikoi)로 표현한 것을 연상시킨다. 씨헤이븐교회의 14개월 동안의 긴 과정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왜 신앙생활을 여정으로 표현하는지 감이 잡힌다. 그들은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문제와 만나서 그 문제와 부대끼며, 토론하며, 대화하며, 함께 풀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문제나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고 그것에 대해서 신실하게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쉽게 해답을 찾지 못하면 기다리고 공부하고 대화한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따라서 이들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시간과 함께 간다. 기도했더니 문제가 쫙 해결됐더라, 담임목사님 한마디에 꼬였던 문제가 확 풀리더라, 어느 날 갑자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막혔던 문이 활짝 열리더라…, 이런 식보다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주시하고,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씨헤이븐교회가 채택한 선언문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인간 성의 신앙에 관한 선언을 향해서(Toward a Statement of Beliefs on Human Sexuality)'에서 주목할 것은 toward, 즉 '향해서'라는 단어이다. 씨헤이븐교회는 14개월의 기간을 거치면서 하나의 선언문을 채택했지만 이들은 그 선언문이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언문을 다만 결론을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동성애 문제를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사스카툰 선언문이나 퍼듀 선언문 모두 마찬가지였다.

올드맨 목사의 목회서신의 말미에도 그는 자신의 의견이 문제를 종결짓는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인간 성의 문제와 특별히 동성애에 관해서 우리는 최선의 해답이나, 최종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중한 메노나이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예컨대, 데이빗 슈뢰더(David Schroeder)는 동성애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수용이든 배제든 둘 다 완전한 답은 아니다.… 한 가지 가능한 대안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이다. 동성 간 언약적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을 수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최종적 답변을 내놓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말이다."

우리는 성서를 묵상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고통을 공감하며, 토론하고, 논쟁하고,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한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혹은 동성애 찬성을, 혹은 반대를….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난 뒤 아직 우리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새로운 여정을 떠나야 한다.

5) 신실함

존 요더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효율성(effecive)보다는 신실함(faithful)을 추구해야 한다. 씨헤이븐교회를 보면 우리는 그들의 미련할 정도의 신실함에 충격을 받는다. 교회란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믿을 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배신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라는 씨헤이븐교회가 믿을 만한 공동체라고 보았기에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 놓고 공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연 씨헤이븐교회는 그 한 사람의 정직한 고백에 신실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물론 마지막 모임의 불미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종일관 신실하게 반응했다. 그랬기에 새라는 최종 결정에 대해서 존중하며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축복할 수 있었다.

씨헤이븐교회는 최종 결정이 난 뒤에도 끝까지 신실했다. 교회는 2003년 7월부터 약 4개월 정도 회복과 치유의 네 번째 시즌을 가졌다. 올드맨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은 전 교인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심방하며 대화했다. 그리고 분노와 상처, 아픔, 좌절감 등을 어루만졌다. 교회 밖의 한 학생이 새라의 건으로 케이스 스터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교회에 전해 왔다. 교회는 그에게 아예 유급 임시직을 제안했다. 그것은 방대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를 통해서 그들의 잘했던 점과 못했던 점까지 빠짐없이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끝까지 신실했다.

동성애와 관련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찬성과 반대를 넘어서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성애의 문제에 개방적 입장을 취할 권리도 있고, 또한 그렇지 않은 입장을 취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신실하지 않아야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과 동조하는 입장에 대해서든, 그렇지 않은 입장에 대해서든 우리는 서로에게 신실해야 한다. 적이 아니라, 원수가 아니라, 혐오스러운 흉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설복시킬지 궁리하기보다는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서로의 얘기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씨헤이븐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아니다. 마지막 모임은 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는 흩어지지 않았다.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도 돌아왔고, 교회를 떠났던 이들 중에서도 몇 명은 다시 돌아왔다. 이 점에서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를 지켜 냈으며, 공동체가 한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신실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찬성과 반대를 넘어 제3의 길을 찾아냈다. 대립과 갈등이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씨헤이븐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