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인간의 마음 또는 뇌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마음 또는 뇌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는 진화 생물학 특히 자연 선택 이론을 깊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상당히 그럴 듯한 이야기다.

 

진화 심리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 또는 뇌가 물리 법칙의 산물이기 때문에 마음 또는 뇌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는 물리학을 깊이 배워야 합니까? 심리학의 분야 중에 물리학에 접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물리학 공부가 심리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인간의 몸 역시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생리학은 진화 생물학의 도움 없이도 잘만 발전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학자가 있다.

 

Harvey는 심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생리학 이외의 분야를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특히 HarveyDarwin을 읽지 않았음이 사실상 확실하다.

Harvey didnt have to look outside physiology to explain what the heart is for. It is, in particular, morally certain that Harvey never read Darwin. (The Mind Doesnt Work That Way: The Scope and Limits of Computational Psychology(2000), Jerry Fodor, 86)

 

진화의 산물인 몸을 다루는 생리학이 진화 생물학의 도움 없이도 잘만 컸다면 진화의 산물인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도 진화 생물학의 도움 없이도 잘만 클 수 있는 것 아닌가? 진화 생물학이 생리학이나 심리학에 약간은 도움이 되겠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처럼 그렇게 목숨 걸고 진화 생물학을 파고들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진화 심리학자들이 직접 답한 것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찾아내면 이 글을 갱신할 때 인용할 생각이며 지금은 내가 여기저기서 본 것들을 토대로 나름대로 답해 보겠다. 그런 질문에 답하는 전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생리학에 진화론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전략이 있다.

 

우선 진화 생물학이 없으면 생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없다라는 명제와 진화 생물학이 생리학에 큰 도움이 된다라는 명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거짓임이 명백하다. 지금까지 생리학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진전은 진화 생물학과 별로 상관 없이 이루어졌다. 전자가 거짓이라 하더라도 후자는 참일 수 있다. 이것은 입자 가속기가 없으면 물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없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라 하더라도 입자 가속기가 물리학에 큰 도움이 된다라는 명제는 참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입자 가속기가 생기기 전까지로 물리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입자 가속기가 물리학에 큰 도움이 되는 듯하다. 적어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크게 쓸모가 있다고 믿으니까 엄청난 돈을 들여서 입자 가속기를 만드는 것 같다.

 

20세기 후반부터 진화 생물학이 생리학에 본격적으로 참견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성과를 이루었다. 세 가지 사례만 제시하겠다.

 

a. 진화 생물학 덕분에 노화의 신비가 풀리고 있다. 자세한 것은 스티븐 어스태드의 인간은 왜 늙는가: 진화로 풀어보는 노화의 수수께끼』를 참조하라.

 

b. 임신 중 태아와 엄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 어느 정도 해명되었다. 임신성 당뇨병이 그런 투쟁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러한 정량적 측면들을 빠짐없이 검토한 결과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데이비드 헤이그David Haig는 산모의 시각에서는 이상적 공급량이 태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준에 아주 조금이라도 못미치면 반드시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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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산모가 인슐린을 충분히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임신성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데, 이 병은 산모에게 치명적이므로 결국 포도당에 목몰라하는 태아 자신에도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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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의 진화적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로버트 트리버즈가 정립했지만, 1993년에 이르러서야 데이비드 헤이그가 인간의 임신에 그 이론을 적용시킨 것이다. (인간은 왜 늙는가, 278~279)

 

c. 유인원의 각 종의 고환의 크기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질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자 경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침팬지처럼 경쟁이 치열한 종에서는 고환이 크고, 고릴라처럼 별로 치열하지 않은 종에서는 고환이 작다. 인간은 고릴라와 침팬지의 중간 정도다.

 

 

 

둘째, 진화 역사를 재구성해야 온전한 설명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현재 작동하는 물리 법칙을 해명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빅뱅 이후의 우주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지질학자는 지구의 현재 상태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도 재구성하려고 한다. 생리학이든 심리학이든 온전한 설명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어떤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왜 그런 기제가 존재하는지까지 해명해야 한다. 적어도 일부 학자들은 그런 것까지 해명하려고 할 정도로 호기심이 넘쳐난다.

 

 

 

셋째, 생리학의 경우에는 인체를 이루는 부품 즉 기관이 눈에 그냥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심장, , , 창자, 허파, 콩팥과 같은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대단한 추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배를 째 보면 눈에 보인다. 반면 뇌 속에 있는 부품들은 아무리 머리를 째서 들여다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부품들이 존재하는지 우선 알아야 그 부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낼 것 아닌가? 이런 면에서 진화 생물학의 이론들은 어림짐작법(heuristic, 발견법)으로서 가치가 크다. 적어도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믿는 진화 심리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진화 생물학이 어림짐작법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실제로 성공한 사례들을 나열하면 된다. 이것은 입자 가속기의 쓸모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입자 가속기에서 이루어진 실험으로 물리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방면에서 진화 심리학자들이 뻥을 좀 많이 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부모에 의한 학대나 유아 살해에 대한 연구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 진화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친족 선택 이론을 바탕으로 계부모가 친부모에 비해 덜 친절할 것이라는 가설이 만들어졌고, 그런 가설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 하지만 계모나 계부가 불친절하다는 것은 친족 선택 이론이 나오기 전에도, 심지어 다윈이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대중의 상식이었다. 나는 이런 상식을 검증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계모는 원래 친모보다 불친절하다는 가설이 진화 생물학 이론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상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계모는 불친절하다는 가설뿐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더 많은 상대와 성교하고 싶어한다는 가설이 Robert Trivers의 부모 투자(parental investment) 이론 등에서 유도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진화 심리학자들이 있다. 물론 부모 투자 이론에서 그런 가설이 유도된다. 하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남자는 늑대다라는 상식이 존재해왔다.

 

남자가 성적 외도(남편 또는 아내 외의 사람과 성교하는 것)에 여자보다 더 민감하다는 이야기 역시 다윈 이전에도 상식이었던 것 같다. 촌수(엄밀히 말하자면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지만)가 가까울수록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도 태고 적부터 존재하던 상식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상식들이 자연 선택 이론의 논리와 부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려고 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의 경우 진화 생물학 이론으로부터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뭔가 새로운 가설이 탄생한 것이 아니다. 가설은 이미 상식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업적은 그런 것들을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진화 생물학 이론에서 시작해서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가설들이 탄생하고 어느 정도 검증된 사례들 역시 아주 많다. 배란 주기와 관련된 가설들 중 많은 것들이 그렇다. 생리를 할 때쯤이 되면 여자가 날카로워진다는 것과 같은 상식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배란기에 여자가 강간을 회피하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인다, 배란기에 여자가 더 좋은 유전자를 얻기 위해 바람을 더 피우는 것 같다, 배란기가 되면 남자의 매력에 대한 여자의 기준이 바뀐다와 같은 상식은 이전에는 없었다. 이것은 진화 심리학들이 새로 만들어낸 가설들이며 많은 경우 상당히 그럴 듯하게 입증했다.

 

심지어 나도 배란기와 관련된 가설을 하나 만들어냈다.

 

선택적 배란 광고 가설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385

http://theacro.com/zbxe/316359

 

내가 제시한 가설이 이미 발표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화 심리학이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설일 것이다.

 

진화 심리학 문헌을 뒤져보면 상식을 검증한 경우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설을 진화론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경우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넷째, 생리학적의 발달에서 기능 개념이 아주 중요했다. 쉽게 말하자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질문이 생리학의 발달을 이끌었다. 심장의 기능이 피를 온몸에 보내기 위해 펌프질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심장과 관련된 생리학이 급속히 발달할 수 있었다. 간의 기능이 해독이다라는 명제 없이 간에 대한 생리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심장이나 간의 기능에 대해 생각할 때 생리학자들은 진화론에 대해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진화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무엇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만 던져도 많은 경우 별 상관이 없었다. 물론 왜 인간은 생존에 방해가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식의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진화 생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냥 인간은 대체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해도 생리학의 발달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심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대체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고 그냥 가정하고 출발해도 별 지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공포의 기능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간의 기능은 생존을 위해 해독을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때만큼이나 진화 생물학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하지만 심리학적 현상에는 진화 생물학을 무시하기 힘든 측면들이 생리학적 현상에 비해 더 많아 보인다. 친족 선택 이론과 관련된 것을 살펴보자. 대체로 생리적 현상에 비해 심리적 현상이 친족과의 상호 작용에 더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많은 경우 몸은 자기 자신만 챙기면 되지만 마음은 친족을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임신 상태가 아니라면 친족과의 상호 작용은 생리적 양상보다는 행동적 양상(행동은 결국 심리의 결과다)을 띠기 때문이다(임신성 당뇨병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다).

 

상대적으로 생리적인 측면에서는 생존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면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좁은 의미의 번식이 적어도 생리적인 측면보다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존의 경우에는 진화 생물학을 잘 몰라도 직관적으로 그냥 추측할 수 있다. 그냥 생존을 위해라는 가정만 하면 된다. 반면 번식의 경우에는 어떤 방향으로 작동해야 번식에 유리한지 직관적으로 알기가 힘들다. 이럴 때 진화 생물학이 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자식이나 동생을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해야 가장 잘 번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의 도움 없이 짐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201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