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empathy)과 동정심(sympathy)를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고 둘을 구분해서 정의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 둘을 동일시하든 구분하든 사람마다 공감과 동정심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른 경우가 많다. 나는 공감 개념과 동정심 개념을 적절하게 정의하려는 노력이 부질 없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그런 개념들을 폐기하고 더 나은 개념들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낫다.

 

공감과 동정심은 기제(mechanism)가 아니라 현상이다. 그것도 상당히 잡다하고 애매한 현상군(現像群)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런 현상과 관련된 선천적 기제들이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밝혀내서 그 각각의 기제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당장 이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면 있을 법한 기제들을 생각해 내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차선책이다.

 

있을 법한 기제들을 추측하는 데에 적응론(adaptationism)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적응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중 하나는 기능론(functionalism)이다. 기능론에서는 어떤 기제 또는 모듈(module)이 번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따진다.

 

 

 

그렇다면 공감이나 동정심이라고 불리는 현상과 관련된 기제나 모듈에는 어떤 것이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까?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고려해서 가설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어쨌든 어설프나마 시도는 해 보겠다.

 

우선 표정 인지 기제들이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표정 인지 기제는 고통의 표정을 알아보도록 선천적으로 설계된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은 중요한 정보다. 그리고 그 정보는 여러 가지로 이용될 수 있다. 고통을 느끼고 있는 타인이 친족, 친구, 또는 같은 부족민이라면 그 고통을 완화하도록 돕는 것이 대체로 그 타인의 번식에도 도움이 되지만 자신의 번식에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고통을 완화하도록 돕도록 영향을 끼치는 선천적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그리 황당한 가설은 아니다. 이것을 타인-고통-완화 기제라고 부르자.

 

만약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의도적 행동 때문이라면 어떨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내가 보복하기 위해 때려서 그 사람이 아파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럴 때 상대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철천지원수의 경우에는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 사람이 자신이 어느 정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보복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평가하여 잘못의 정도와 비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 잘못에 비해 고통의 정도가 덜하다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어야 할 것이며 잘못에 대응하는 정도로 고통을 주었다면 거기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잘못에 비해 너무 큰 고통을 주었다면 사과나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타인이 고통을 느낄 때 타인과 자신 사이의 관계, 고통의 원인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적응적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잘 도와주는 것이 적응적이다. 고통의 원인이 자연 재해인 경우와 자신의 보복 행위인 경우에 그 대응은 달라야 한다. 자연 재해의 경우에는 자신도 고통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할 것이다. 보복의 경우 상대가 잘못에 상응하는 고통을 느꼈을 때에는 충분히 보복했으므로 화가 풀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 표정 인지 기제에서 출발하여 결국 분노 기제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 때 통쾌함이라는 쾌감을 느끼면서 화가 풀릴 것이다.

 

 

 

나는 상당히 극단적인 선천론으로 평가 받을 것 같은 위의 설명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하고 있다. 물론 위의 설명은 가설일 뿐이고 가설은 검증해야 한다. 또한 위에서 아주 거칠게 기제들과 그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해 추측했는데 실제로 뇌에서 벌어지는 것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설이 훨씬 더 정교하고 세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공감 또는 동정심 개념으로는 위와 같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왜 타인이 고통을 느낄 때 어떤 맥락에서는 자신도 고통을 느끼고 어떤 맥락에서는 통쾌함을 느끼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공감 또는 동정심 개념에만 집착한다면 타인이 고통을 느끼면 항상 자신도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적응론적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이 고통을 느낄 때 늘 자신도 고통을 느끼는 식의 경향이 적응적일 것 같지 않다. 따라서 그런 가설은 별로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공감이나 동정심 개념은 고통이 전염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이것은 전염병이 전염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만 주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면역이나 백신 개념이 추가된다면 왜 어떤 사람은 어떤 전염병에 쉽게 걸리는데 어떤 사람은 그 전염병에 전혀 걸리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기쁨 역시 전염되는 경향이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식의 기쁨은 거의 항상 자신의 기쁨이 된다. 하지만 경쟁자의 기쁨은 오히려 질투나 시기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공감 개념은 여기에서 기쁨이 전염되는 경향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기쁨 인지 기제 그리고 다른 온갖 기제들에 대한 더 세밀한 가설을 세울 때에만 타인의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경우, 타인의 기쁨이 나의 질투나 시기로 이어지는 경우를 나누어서 해명할 수 있다.

 

 

 

2010-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