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 대한 경멸과 신뢰

한쪽 극단에는 대중이 멍청하기 때문에 엘리트가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지혜롭고 선한 왕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상식으로 통하기도 했다. 그 반대 편에는 대중의 지혜를 신봉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통치를 폐기하고 대중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보장한다면 아주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체로 보수파(현상 유지)나 수구파(과거로 돌아가자)는 대중을 멍청하다고 경멸한 반면 개혁파와 혁명파는 대중의 지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왕정주의자들도 민심이 왕을 완전히 떠나면 왕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개혁파나 혁명파 중에도 대중을 불신해서 개혁 엘리트나 혁명 엘리트가 대중을 위해 개혁이나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민주주의가 거부하기 힘든 주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면서 좌파든 우파든 대중의 뜻을 무시하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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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푸념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받아들인다면 지혜롭고 선한 왕에 의한 개혁이나 혁명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대중을 위한 엘리트의 개혁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대중이 하는 개혁이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다.

수 많은 계몽주의자들, 개혁주의자들, 혁명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중들을 계몽하려고 했다. 어떤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널리 퍼져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갖 미신과 종교를 몰아내고자 했다. 어떤 개혁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은 왕정보다 민주정이 더 낫다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가 더 낫다고 본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 차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을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다윈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인 나는 보통 미신으로 것들뿐 아니라 한의학을 비롯한 온갖 민간 요법과 정신분석도 미신이라고 보며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처럼 온갖 종교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도 반대하며, 민족주의가 세계 시민주의 또는 국제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 체제보다 공산주의 체제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화 심리학에 대한 온갖 비판들 중 대다수가 근거 없는 비과학적인 비방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나는 온갖 측면에서 대중이 계몽되고 사회가 개혁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이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해본 결과 합리적인 논거만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을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이 너무 멍청해서 세상을 바꾸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중은 멍청한가?

사실 “대중은 멍청한가?”라는 질문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돼지는 큰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돼지는 쥐보다는 크지만 코끼리보다는 작다. 마찬가지로 대중 중 절대 다수는 아인슈타인보다는 멍청하지만 중증 정신 지체자보다는 똑똑하다. “대중은 멍청한가?”라는 질문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무언가 비교할 것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대중은 “현대 물리학과 현대 수학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멍청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짐작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교사가 가르쳐도 대중 다수가 현대 물리학과 현대 수학의 난해한 이론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이론들은 소수에게만 이해가 허락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양자 역학이나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같은 것을 대중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대중은 미신과 종교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는 너무 멍청한가? 대중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는 너무 멍청한가? (물론 자본주의와 관련해서는 공산주의자인 내가 오히려 더 멍청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문제까지 다루지는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이 미신, 종교, 체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멍청하다고 믿는 것 같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는 세계에 있는 어떤 학교도 과학과 미신의 차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암기식 과학 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 과학 지식을 가르칠 뿐 과학 철학은 사실상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과학 교육을 하고 있는 선진 산업국에서도 예외 없이 미신과 종교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만 보고 대중이 너무 멍청해서 미신과 과학의 차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계몽의 양상

20세기를 과학의 세기라고 부른다. 20세기에 물리학, 화학, 생물학을 비롯한 온갖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의학, 무기를 비롯한 온갖 산업의 엄청난 발전으로 이어진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선진 산업국에서 사는 대중은 20세기 과학의 핵심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자나 수학자를 제외하면 20세기 물리학의 핵심인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분자 생물학자와 진화 생물학자를 제외하면 20세기 생물학의 핵심인 분자 유전학과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 집단 유전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분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제 선진 산업국에서는 대다수가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다니고 학교에서 여러 분과의 과학을 가르치지만 과학과 미신의 차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것은 한국의 영어 교육의 성과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뭔가를 열심히 외우지만 실제로 외국인과 만나면 말 한 마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선진 산업국에서도 사람들은 미신과 종교에 푹 빠져 있다.

어떤 한국인은 한국인들의 미신을 보고 한탄하며 미국이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된다. 한국과 미국은 미신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한국의 구세대는 사주를 믿고 신세대는 혈액형 성격론을 믿는다면 미국에서는 점성술을 믿는다. 한국에서는 인구의 절반 정도가 종교가 없는 반면 미국인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이다.

미국에는 진화론을 믿는 사람보다 기독교식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미국인들이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지구의 중심에 로마가 있고, 로마의 중심에 교황청이 있고, 교황청의 중심에 교황이 있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이유는 단지 교황청이 이런 황당한 주장을 철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은 황당함에 있어 별 차이가 없는 기독교식 창조론은 철회하지 않았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식 창조론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교황청은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예수에 대한 전설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예수의 기적을 믿는다.

과학자 집단이 어떤 이론을 버리고 새 이론을 취하는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반면 대중이 어떤 이론을 버리고 새 이론을 취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별로 작용하는 것 같지 않다. 대중은 그냥 남들이 믿는 것을 믿을 뿐인 것 같다. 수 백 년 전에는 남들이 천동설을 믿으니까 따라 믿었으며 지금은 남들이 지동설을 믿으니까 따라 믿는 것이다. 선진 산업국에서도 여전히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대중은 덩달아 창조론을 믿는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 집단과 대중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졌다. 이전에는 모두가 미신적이고 종교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과학자 집단은 과학적인 기준에 입각하여 미신과 종교를 버렸다. 물론 대중이라고 몽땅 미신과 종교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여전히 온갖 미신과 종교를 믿는다.

그리고 대중이 미신에서 벗어난 이유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대중이 미신 대신 과학을 믿을 때에도 그 이유는 논리와 실증 때문이 아닌 듯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발달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TV나 비행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자 집단과 기술자 집단은 엄청난 권위를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믿는 것은 과학자들의 논리라기보다는 이런 권위일 뿐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 때문에 매우 아프거나 큰 사고가 나면 과학을 바탕으로 한 병원에 찾아간다. 하지만 의사와 과학자들이 미신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한의학에 대한 믿음도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사가 ‘사형 선고’를 내리면 한의사를 찾아가거나 뱀을 잡아 먹으러 산으로 간다. 한국인 중에 한의학이 미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도 안 되는 것 같다. 대중은 과학의 성과인 온갖 기술을 소비자로서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과학을 이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대중은 구제불능인가?

한국의 영어 교육 현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대중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멍청하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결론은 터무니 없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비롯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두 개의 언어는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우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중의 언어 습득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학교의 영어 교육의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다.

외국어 교육의 경우에는 조선족의 사례처럼 뻔한 반례가 있기 때문에 쉽게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미신과 종교의 경우는 어떤가? 과연 지구상에 대중 다수가 미신과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라 또는 문화권이 있나? 나는 그런 문화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21세기에도 여전히 모든 나라에서 대중이 미신과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의 타고난 지능이 구제불능이기 때문인가? 모든 나라의 과학 교육이 엉망이기 때문인가? 대중 다수가 미신과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류에게 허용되지 않은 사치일까?

사람들이 미신과 종교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합리성의 경로도 있지만 권위의 경로도 있다. 여기서 권위는 총칼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총칼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는 있어도 믿음을 만들어내기는 힘들다. 여기에서는 과학자 집단 같은 엘리트의 권위나 상식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선진 산업국에서는 왕정주의자가 사실상 사라졌다. 영국 같은 나라에 왕정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통치하는 왕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상식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왕정의 장단점과 민주정의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민주주의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민주주의가 상식이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지동설을 받아들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지동설이 상식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선지 민주주의와 지동설은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보수파, 수구파, 종교 지도자들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정주의와 천동설을 포기했다. 그러자 더 이상 왕정주의와 천동설을 외치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대중은 어렸을 때부터 민주주의와 지동설을 배우면서 자라고 커서도 대중 매체나 또래 집단에서 민주주의와 지동설이 옳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다. 이것은 창조론/진화론 논쟁과는 상황이 다르다. 여전히 종교 지도자들은 창조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부 어린이들은 창조론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자란다.

일단 과학적 사고 또는 진보적인 사상이 대대적으로 승리하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냥 그것을 받아들인다. 어린이들은 과학적 사고나 진보적인 사상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것을 배우면서 믿게 된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일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진정으로 계몽되고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상식이기 때문에 계속 믿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막상 민주정이 왕정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지동설이 옳고 천동설이 틀린 이유를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암울한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권위에 의존하며 미신과 왕정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역전이 일어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정 또는 천동설이 상식이 되는 순간 왕정주의자 또는 천동설 옹호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현상은 계몽주의자나 개혁주의자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미신과 보수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꼭 온전한 계몽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고 바뀌는가? – 진화 심리학적 가설들

자연 선택의 핵심에는 번식 경쟁이 있다. 번식에 유리한 특성이 승리한다. 여기서 진리 경쟁이 아니라 번식 경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 선택의 논리에서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한 개체가 아니라 번식에 더 성공한 개체가 승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대한 욕망만으로 똘똘 뭉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리에 대한 일관된 추구에 엄청나게 가까운 현대 수학과 현대 과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아마 진리가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리가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근처에 맹수가 있을 때 맹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과 여전히 안전하다는 소망적 사고에 빠진 사람 중 누가 번식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맹수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에 대비하여 도망가거나, 자식을 챙기거나, 맹수를 공격한 사람이 더 성공했을 것이다. 동굴에 곰이 세 마리 들어가는 것을 본 다음에 두 마리가 나온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여전히 곰이 한 마리 이상 동굴에 있다고 계산한 사람은 동굴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겠지만 곰이 다 나왔다고 생각한 사람은 동굴에 들어가서 곰에게 잡아 먹힐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진리에서 어느 정도 멀어질 때 번식에 도움이 되었을 경우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자신 또는 자신의 친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왜곡해서 남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번식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즉 이해 관계에 따라 때로는 어느 정도 사고를 왜곡하는 것이 더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사고가 이해 관계에 지배 받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자본가 계급은 자본주의의 장점만 보고 약점은 외면하는 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사고를 되도록 일치시키는 것도 번식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독불장군은 친구를 사귀기도 결혼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부족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남들이 믿는 대로 믿는 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설사 그런 믿음이 미신적이어서 어느 정도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만약 그 손해가 친구나 애인을 사귀는 것으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면 번식 경쟁의 관점에는 충분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연 선택은 본질적으로 진리 경쟁이 아니라 번식 경쟁이다.

인류는 지식을 쌓는 경향이 있다. 현대에는 학술지의 논문 형식으로 엄청난 지식을 쌓았다. 원시 부족의 경우에도 그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생존과 번식에 매우 중요한 지식들이 음성 언어의 형태로 전수되었다. 그 부족이 사는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정보 등을 비롯하여 온갖 지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지식들 중 일부가 미신이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그 지식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면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는 그만이다. 어린이는 어느 것이 쓸만한 정보이고 어느 것이 미신적 정보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주변 어른들이 한결같이 믿는 것을 따라 믿는 것이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믿음의 대가가 매우 다르다. 예컨대 “어떤 종의 뱀이 독사인가?”와 관련된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종의 뱀에 독이 없는데도 독이 있다고 잘못 믿는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그 뱀을 피하는 데 쓸데 없이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 즉 그 종의 뱀에 독이 있는데도 없다고 잘못 믿는다면 어떨까? 뱀에 물려 죽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한쪽 믿음이 치르는 대가가 매우 클 때에는 대가를 적게 치르는 쪽으로 믿는 것이 낫다. 즉 정확히 알기 힘들다면 덮어놓고 뱀에는 독이 있다고 믿는 것이 적응적인 관점에서는 유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진화했던 아프리카의 뱀 중 소수만이 독사였음에도 불구하고(우리 조상은 모든 뱀이 치명적인 독사인 호주 대륙에서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이 뱀을 덮어놓고 두려워하도록 진화한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위험의 형태로 명제가 제시되었을 때 대체로 믿는 쪽으로 오류를 범하도록 진화한 듯하다. 종교 지도자들은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식의 명제들 들이대면서 인간의 이런 경향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대체로 남들이 믿으면 덩달아 믿는다는 점, 자신의 이해 관계에 유리하도록 사고를 왜곡한다는 점은 진화론의 논리와 잘 부합할 뿐 아니라 20세기 심리학자들이 행한 여러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제시한 진화 심리학적 가설 즉 자연 선택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고를 왜곡하도록 진화했으며 남들이 믿는 것을 덩달아 믿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 상당히 가망성이 있다고 본다. 이 가설이 맞다면 인간은 고전적 합리성의 개념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비합리적으로 설계되었으며 따라서 논리적, 실증적 논거만으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빈 서판론의 부작용

나는 위에서 대중의 지적인 능력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인 평가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다. 특히 대중에 대해 극단적으로 신뢰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열 받을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만만치 않게 내 생각에 반기를 들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레닌주의자들은 전위 정당(노동자 대중 또는 민중을 지도할 정당)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대중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 그렇다고 레닌주의자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한편으로 나는 타고난 지능이 사람마다 달라서 지능이 낮은 사람은 특히 양자 역학 같은 어려운 이론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과학과 미신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IQ와 지능과 관련된 행동 유전학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인간이 어떤 면에는 진리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어떤 면에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무턱대고 믿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진화 심리학 이론과 관련되어 있다.

많은 좌파가 행동 유전학과 진화 심리학을 무척 싫어하며 그에 대한 반대테제인 빈 서판론(blank slate, tabula rasa)을 믿는 경향이 있다. 빈 서판론에 따르면 타고난 지능의 차이라는 것은 없으며 인간마다 지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순전히 환경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타고난 인간 본성이라는 것도 거의 없어서 믿음의 형성과 관련해서도 학습 능력이 있을 뿐이며 사고를 왜곡하거나 무턱대고 믿는 경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다면 궁극적인 평등의 희망을 포기할 필요도 없으며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나의 개인적 경험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판단해볼 때 사람들은 합리적인 논거로만 설득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큰 이해 관계가 걸렸을 때, 자신이 속한 집단의 믿음과 어긋났을 때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득해도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진보와 관련된 이론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설득하려고 할 때 빈 서판론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은 쉽게 낙담해서 진보는 불가능하다며 진보 운동의 대열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클 것이다. 헛된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이 단기적으로 활력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만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큰 것이다. 인간의 지적, 합리적 능력에 대한 상당히 암울한 평가가 처음에는 진보주의자가 취하기에는 너무 냉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계몽 운동과 진보 운동은 쓰디쓴 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20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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