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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를 꼽으라면 이황과 이이를 꼽을 것입니다
특히 성리학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학문적 성과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보면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학문적 성과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지 정말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이이와 이황은 후에 기호학파와 영남 사림파 그리고 서인과 동인 남인등의 당쟁의 학문적 토대요 시조가 됩니다
또한 그토록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고 그 제자들이 정치를 하던 시대에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 제대로된 싸움한번 못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고 그 몇십년 후에 또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고 참담한 수모를 당하고 백성들이 수십만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또한 그들 이후로 조선에서 여성의 권리가 억압이 되고 남녀차별이 심해지고 반상의 구별도 심해지고 사회는 폐쇄적이 되어갑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공리공론이나 공허한 논쟁이었기에
백성들의 삶이나 국가 경영에 아무런 보탬도 그렇다고 당대 이후 백성들의 정신적 만족감이나 행복이 더해진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학문이 진정 올바른 것이었다면 국가가 부강하고 백성들의 삶이 편해져야 맞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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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리학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학문적 성과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보면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학문적 성과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지 정말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이이와 이황은 후에 기호학파와 영남 사림파 그리고 서인과 동인 남인등의 당쟁의 학문적 토대요 시조가 됩니다
또한 그토록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고 그 제자들이 정치를 하던 시대에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 제대로된 싸움한번 못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고 그 몇십년 후에 또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고 참담한 수모를 당하고 백성들이 수십만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또한 그들 이후로 조선에서 여성의 권리가 억압이 되고 남녀차별이 심해지고 반상의 구별도 심해지고 사회는 폐쇄적이 되어갑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공리공론이나 공허한 논쟁이었기에
백성들의 삶이나 국가 경영에 아무런 보탬도 그렇다고 당대 이후 백성들의 정신적 만족감이나 행복이 더해진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학문이 진정 올바른 것이었다면 국가가 부강하고 백성들의 삶이 편해져야 맞는 것 아닐까요?
2010.12.13 00:41:26
흐르는 강물 / 흐르는 강물님처럼 학문의 의의나 가치를 부국강병에 대한 기여도로만 매긴다면, 폄하되어야할 학자는 이황/이이 이외에도 수두룩할 겁니다.
2010.12.13 02:14:52
흐르는 강물 / 이황이나 이이의 사상이 어떤 내용을 가졌는지 살펴보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관련 분야의 학자들이 쓴 서적들을 참고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네들의 사상이 조선이 밟아 나아간 사회/경제적 변화와 어떤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추적해서 뽑아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선 말기 개화파 성향의 지식인들은 대개 조선 성리학이 국가의 쇠퇴와 위기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고, 아니 만악의 근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신채호나 윤치호, 장지연 같은 이들 말이에요. 그런데 그 후 약 백년 뒤의 이영훈(네, 식근론의 그 이영훈...) 같은 이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가 거둔 기적에 가까운 성공이 고려 말에서 조선 성립기에 걸쳐 일어난 유교적 대전환과 불가분의 관련, 역사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리쩌허우 같은 중국 학자는 중국 주자학이 내성(內聖)에만 지나치게 편중한 나머지 외왕(外王)을 소홀히 하는(즉, 조선 실학을 말할 떄 흔희 거론되는 경세치용의 현실적 관심을 도외시 한), 그냥 넘길 수 없는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리쩌허우의 이 지적이 옳다면 이는 이이/이황으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어느 편이 옳은지 잘잘못을 가리는 작업은 제 능력 밖의 문제니까 거론하지 않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어떤 사상과 그 당시 및 이후의 역사적 결과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따지고 파헤치는 작업은 머리털이 다 뽑혀나갈만큼 무지하게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런 류의 논쟁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별 생산성 없이 우기기로 시종되는 말싸움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조 500년간의 성리학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성공에 문화적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썰'도 있어요.
[한국에 살아보니] 세계종교와 통하는 성리학
물론 검증이 불가능한, 아님 말고식의 무책임한 사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이런 시각도 있다는 거죠.
조선 말기 개화파 성향의 지식인들은 대개 조선 성리학이 국가의 쇠퇴와 위기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고, 아니 만악의 근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신채호나 윤치호, 장지연 같은 이들 말이에요. 그런데 그 후 약 백년 뒤의 이영훈(네, 식근론의 그 이영훈...) 같은 이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가 거둔 기적에 가까운 성공이 고려 말에서 조선 성립기에 걸쳐 일어난 유교적 대전환과 불가분의 관련, 역사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리쩌허우 같은 중국 학자는 중국 주자학이 내성(內聖)에만 지나치게 편중한 나머지 외왕(外王)을 소홀히 하는(즉, 조선 실학을 말할 떄 흔희 거론되는 경세치용의 현실적 관심을 도외시 한), 그냥 넘길 수 없는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리쩌허우의 이 지적이 옳다면 이는 이이/이황으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어느 편이 옳은지 잘잘못을 가리는 작업은 제 능력 밖의 문제니까 거론하지 않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어떤 사상과 그 당시 및 이후의 역사적 결과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따지고 파헤치는 작업은 머리털이 다 뽑혀나갈만큼 무지하게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런 류의 논쟁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별 생산성 없이 우기기로 시종되는 말싸움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조 500년간의 성리학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성공에 문화적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썰'도 있어요.
[한국에 살아보니] 세계종교와 통하는 성리학
물론 검증이 불가능한, 아님 말고식의 무책임한 사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이런 시각도 있다는 거죠.
2010.12.13 04:29:34
말씀에 공감하고 저 역시 저의 주장을 논증할 학문적 능력도 없고 그 노력을 할 생각도 없으니까요
그냥 거칠게 이런점도 있겠다는 것이지요
링크한 글은 상당히 수준 미달이네요
내용을 떠나서도 글 자체가
단 하나 유교가 기독교의 발전에 연관이 있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주류교파입니다
즉 장로교가 한국인의 정서나 상황에 잘 맞아들어갔다는 이야기지요
그 까닭은 장로교의 정신이 유교의 선비정신과 상당히 일맥상통합니다
사실상 초대교회 목사들의 상은 선비의 상과 비슷하였습니다
또 장유유서랄지 예배역시 장로교 예배는 유교의 제사만큼 경건하고 조용했으며 충과 효가 신에 대한 충성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었지요
반면적으로는 유교질서에 반하는 평등이념이 유교의 한계를 초월하여 매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재능은 있으나 신분질서등에 억눌린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양반층에서 진보적인 이들은 기도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부하여 신학문을 도입하고 거기에다 선교사의 무상 교육혜택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도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요
그냥 거칠게 이런점도 있겠다는 것이지요
링크한 글은 상당히 수준 미달이네요
내용을 떠나서도 글 자체가
단 하나 유교가 기독교의 발전에 연관이 있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주류교파입니다
즉 장로교가 한국인의 정서나 상황에 잘 맞아들어갔다는 이야기지요
그 까닭은 장로교의 정신이 유교의 선비정신과 상당히 일맥상통합니다
사실상 초대교회 목사들의 상은 선비의 상과 비슷하였습니다
또 장유유서랄지 예배역시 장로교 예배는 유교의 제사만큼 경건하고 조용했으며 충과 효가 신에 대한 충성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었지요
반면적으로는 유교질서에 반하는 평등이념이 유교의 한계를 초월하여 매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재능은 있으나 신분질서등에 억눌린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양반층에서 진보적인 이들은 기도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부하여 신학문을 도입하고 거기에다 선교사의 무상 교육혜택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도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요
2010.12.13 17:54:16
몇가지 보태자면
유교에는 크게 2갈래가 있는걸로 압니다.
詞章과 經世입니다.
경세는 말그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고, 사장은 그냥 시, 문, 구 같은 문학입니다.
성리학과 유교에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는 경세가 기본 축이 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 이후로 갈 수록 사장이 강화되고 경세는 묻혀버리죠.
또 유교에서 중시하는 4개의 가치관 중에서 인, 의, 예, 지 이 네가지 중에서 특히 조선시대 후기를 주름잡는 노론은 예에 중점을 두고 예학인 엄청나게 발전하죠.
유학자들이 돌아다니면서 효자비나 열녀문 같은거 세우는 짓 말입니다. 왜 예학이 강조 되느냐 그건, 조선시대가 가진 경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 할 수가 없게되자 '착하게 살면 다 된다'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면서 면피한 것이지요.
사방에 유민이 생겨나고 도적이 생겨나는데, 도적을 향해서 '늬들이 사악해서 그래' 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은건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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