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도 없는 안철수 까기는 싫고 요즘 동네북이 된 친노와 문재인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나부터 노까와 문까가 되어 친노와 문재인을 가루가 되도록 까려고 합니다. 콩과 친노는 까야 제맛입니다.


친노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람들에게 친노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친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친노란 같은편이고 바른말과 옳은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선 내가 상식이라는 절대적 신념을 갖고있으며 이를 돌려서 말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노라고 불리는 반대편에게 친노란 친노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쉽게 자기입장과 말을 바꾸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영논리를 포장하는 친노의 말에는 예의없음과 싸가지없음으로 가득하다. 반면 문재인의 처음 이미지는 요즘의 규격화된 친노의 이미지와 분명히 달랐다. 노무현의 국민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고함을 지른 친노의 무례를 대신 사과한 문재인은 기존 친노의 이미지를 벗어난 친노였다. 

내가 생각하는 친노는 대충 이렇다. 친노는 자신들은 주류들과는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류가 가진 학벌 재력 인맥 권력에 대해 스스로 비주류라고 생각하는 컴플렉스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친노의 모순은 더있다. 친노는 친노 내에서도 운동권과 진보라는 틀에서 성골과 진골로 서로 반목할 정도로 순혈을 강조하는 배타적인 순혈주의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린우리당 시절 백팔번뇌라고 불릴정도로 파편화된 일종의 정치적 다문화를 인정하는 이질적인 다문화주의가 공존하는 이상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더구나 친노는 노무현 정권 마지막까지 누가 권력을 잡느냐 어떻게 권력을 잡느냐 이런 식으로 권력을 잡는 주체와 과정을 더 중시하면서 김영삼이 이회창을 비토하듯 친노역시 정동영을 비토했다. 이러한 친노에 대해 내부갈등엔 강하지만 정작 외부의 적과의 싸움엔 약하다는 평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앞둔 친노가 싸우기도 전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직감하고 정신승리를 해버리는 일종의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맞담배를 피웠다는 식의 무용담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친노는 노무현 정권 집권기간동안 탈레반이나 점령군처럼 그들만의 서열주의와 계급주의에 취해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운동권과 진보라는 경력을 내세워 부채의식과 죄의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한 친노의 악습은 곧 친노와 가까우면 그의 과거가 어떠했든 중세시대에 교황이 면죄부를 남발하듯 정치적 사면을 남발했고 그러한 친노와 어떤 식으로든 맞서는 사람들에겐 계급장 떼고 붙자는 김근태와 대북송금이 걸린 박지원 등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가혹하리만치 보복했는데 그 방식 역시 구태정치인이라는 일종의 주홍글씨를 달아버리고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그들을 정치적 사법적으로 완전히 매장시켜버리는 가혹한 방식이었다. 

현재의 새누리는 그런 친노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다. 내가 생각하는 새누리는 이렇다. 새누리는 끊임없이 새누리가 가진 강력한 당선이 보장된 공천권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 그렇게 영입한 인사는 이념적으로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계급적으로는 재벌부터 서민까지 다양하다. 친노에겐 절대 자신들과는 함께 정치할 수 없는 영입불가대상이 존재하지만 새누리는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그누구라도 새로운 피란 이름으로 새누리의 영입대상이 된다. 새누리에게 수용의 한계란 없다. 이렇게 아무리 이질적이라도 수혈하듯 문어발처럼 새로운 피를 영입하는 새누리는 친노가 가진 순혈주의보단 혼혈주의에 더 가깝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있다. 그렇게 영입한 새누리의 새로운 피는 이재오 김문수가 그랬듯이 새누리가 가진 정체성에 흡수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친노처럼 순혈주의로 무장한 집단에서도 그 안에서 다시 백팔번뇌와 같은 이질적인 다문화주의가 판치는 것과는 반대로 새누리는 그 어떤 이질적인 인물을 영입해도 그 안에서 그들을 새누리의 정체성에 동화시켜버리는 일종의 동화주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새누리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목표를 가진 새누리는 그만큼 권력지향적이다. 누가 권력을 잡든 어떻게 권력을 잡든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좋다. 권력만 잡으면 나머지 문제는 알아서 정리된다. 이러한 새누리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의지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친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체성따윈 선거에서의 절대승리라는 지상목표를 가진 새누리에겐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친노의 본질적인 태도에도 큰 문제가 있다.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것과 자존심을 세우는 건 다른 이야기다. 친노가 정말 세상을 바꿀 마음이 있었다면 뜻은 세우되 태도는 항상 겸손했어야 했다. 그런데 친노는 그러지 않았다. 현재 친노에겐 예의없음과 싸가지없음이라는 평가가 항상 따라다닌다.

연애 유경험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친노는 최악의 연애대상이다. 일반적으로 호의란 상대방에게 바라지 않는 것이며 상대방이 언제든지 거둘 수 있는 것이다. 호의는 권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호의를 베풀다와 권리를 행사하다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배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배려를 해주는 건 상대방의 고마운 호의로 받아들여야지 당연한 권리로 인식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상대방의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친노의 태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혁통에 대한 손학규의 호의를 권리로 착각한 친노는 통합직후 친노에게 손을 내밀었던 손학규를 오히려 유방이 한신을 토사구팽하듯 정치적으로 매장시켜버렸다. 먼저 호의를 보낸 상대방에게 미안한 일을 해선 안되며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 그즉시 미안함을 표시해야한다. 그게 인간적인 예의다. 

만약 상대방이 미안함도 모른다면 연애시장에서 그런 상대와는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미안함의 정도는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론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두어야 한다. 연애시장에서 책임회피형 인간은 보통은 책임전가형 인간으로 발전한다. 정때문에 모진 인연을 못끊는 경우도 물론 있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잘못을 감싸줄 수는 있어도 잘못을 덮을 순 없다. 잘못을 덮기위해 무리수를 두거나 또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연애를 나는 너무 많이 봤다. 

지금 친노는 믿을 수 있는 이미지보다는 언제든지 먼저 호의를 베푼 상대방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안철수 이야긴 하기 싫지만 아마도 지금 안철수는 스스로가 공언했던 말이 우스워지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그런 친노를 보며 새정치에 대한 열정이 상당부분 거세된 상태일 것이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단어 앞에는 보통 자기희생과 자기헌신같이 자기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만큼 희생과 헌신은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할 수도 없다. 연애를 예로 든다면 사랑은 어느한쪽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행복한 연애를 하기위해서는 상호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랑은 어느한쪽이 다른한쪽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노력하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사랑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며 결코 오래갈 수도 없다.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역할분담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친노는 그러지 않았다. 김대중을 위해 동교동계가 스스로 영광된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친노는 문재인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친노의 무례함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신 사과했던 문재인은 분명 처음에는 친노같지 않은 친노였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보여준 문재인의 모습은 그러한 이미지를 점점 갉아먹는 과정이었다. 친노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다보니 지난 총선을 기점으로 확장성에 제동이 걸렸고 이념편향과 포용력부족이라는 뼈아픈 비판 속에서 정치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현재의 문재인은 친노계파를 벗어난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지 못했다. 

국회의원직 사퇴를 던지라던 주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임기를 지키겠다는 이상한 명분을 방패로 끝까지 던지지 못했다. 문재인은 문재인의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지난 대선당시 문재인에게 필요했던 건 노무현이 아니라 문재인이었다. 문재인이 큰 정치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를 정치로 이끈건 노무현이지만 이젠 국민만 보고 가겠습니다 문재인은 이렇게 문재인의 말로 사람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누가봐도 사람들이 지난 대선에서 바란건 노무현을 극복하라는 거지 노무현을 계승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문재인은 노무현과의 인연은 인정으로 놔두고 노무현을 존중하되 노무현의 스피커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을 내세워야했다.

대선 이후는 더 황당했다. 내가 지금 문재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앞으로 문재인이 뭘 걸든 노무현을 위해선 아무것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걸고 싶다면 국민을 위해 걸어라. 좋은 사람이 되긴 쉽지만 훌륭한 대통령이 되긴 어렵다. 국민들은 좋은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좋은 대통령은 국민들에겐 그냥 사람좋기만 한 무능한 대통령일 뿐이다. 

문재인은 이상한 타이밍에 이상한 승부수를 던졌다. 영화 타짜에서 조승우가 그랬다. 확실하지 않으면 손모가지 걸지말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날라간건 문재인의 대선후보급 정치생명이었다. 해프닝으로 끝났던 것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문재인보다 종북사냥이라는 더 좋은 먹이감으로 눈을 돌린 새누리의 전략적 판단 덕분이었다. 이상한 승부수 하나로 순식간에 문재인의 존재감이 날라갔다. 문재인의 정치적 무게감도 날라갔다. 대권후보로서 야권통합후보에서 친노계파수장으로 전락했다. 

노무현의 승부수는 타이밍의 예술이었다. 반면 문재인의 승부수는 김한길의 승부수마저 함께 날려보냈다. 그렇게 문재인은 대선이후 만신창이가 된 민주당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제공을 했으면서도 그 책임은 끝까지 당대표인 김한길에게 미뤘다. 문재인이 개인사정으로 불참했을때 김한길은 문재인의 뒷수습을 위해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천막농성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선 마지막까지도 끝까지 임기를 지키겠다던 명분으로 던지지 못했던 문재인의 사상구 의원직은 한순간에 NLL대화록의 진위여부와 바꿀 수 있는 싸구려가 되었다. 이건 사상구민들에게도 모욕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살고있는 지역구가 고작 노무현의 NLL대화록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