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인가 그랬습니다.
낮에도 돈을 벌어볼까 하고 방배동의 치킨+피자집에 배달원으로 일을 시작했지요.
이런 종류의 배달은 처음 해 봤는데요,
문제는 지도였습니다.
주문받은 곳을 찾아가려면 지도가 정확해야 하는데,
지도와 현실이 많이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은 지도의 번지수나 명칭이 잘못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도는 지적도상의 번지수로 구별이 되어 있는데,
실제로 가 보면 두세 개의 지번이 합쳐져서 빌딩 하나가 되었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빌딩이든 가정집이든 일일이 번지를 확인해 봐야 했는데,
특히 번지수 표시가 잘 안 보이는 집이 많아서 밤에나 비오는 날에는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배달이 한가할 때야 별 문제가 없지만,
배달이 밀려 있는데 이렇게 집을 못 찾으면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한 달 반만엔가 치킨+피자집을 때려치우고,
배달일을 하려면 우선 지도부터 수정해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방배동에는 방배본동, 1234동 이렇게 5개의 동이 있습니다.
한 집 한 집 찾아다니면서 번지수와 지도를 비교해서 수정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전지 3장짜리 방배동지도를 구입해서 이를 흑백으로 3장씩 복사했습니다.
복사한 지도를 적당한 크기만큼 잘라서 가방에 넣고,
씨티플러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매일 3~4시간 돌아다녔죠.
걸어다니면 피곤할 것 같아서 그랬는데, 차라리 걸어다녔으면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수정할 곳이 있으면 복사한 지도에 표시하고,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노트에도 수정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러기를 한 달 정도 해서 결국 전 지역을 확인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작대로변의 작은 가구점들은 빼고 전 지역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서래마을(프랑스인들이 많이 산다고 하죠)도 확인했습니다.
복사한 지도를 펼쳐 놓고, 수정액을 발라가면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시간이 꽤 걸려서 1주일인가 걸렸습니다.
수정하다가 진력이 나면 만화방으로 놀러가곤 했죠.
수정작업이 완료되고 나서 이것을 축소복사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이제 들고다닐 만한 사이즈가 되었습니다.

모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수정한 것인데 혼자서 보기에는 좀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도회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도를 수정하여 다시 인쇄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재고를 소진할 때까지는 다시 인쇄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언제나 되어야 수정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려서 저는 지도회사의 담당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지도 수정 자료는 내가 제공하겠다.
수정한 지도를 100장을 프린터로 출력해 달라.
그 지도를 내가 250만원에 사서 한 장당 3만원에 팔겠다.

구로동엔가 있는 지도회사에 가서 수정작업을 도왔습니다.
기존의 지도는 번지수 대로 사각형 칸을 나누어 놓았지만,
저는 작은 골목까지 일일이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번지가 합쳐져서 한 건물이 된 경우는 빨간색 선으로 건물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1, 2, 3 번지가 합쳐져서 한 건물이 들어선 경우에는 기존 3칸 위에 빨간색 사각형을 그려서 한 건물임을 표시했죠.
수정작업은 1주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더니, 웬걸 2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왔다갔다 하면서 귀찮았고, 목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오토캐드를 사용해서 지도를 만들고 수정하더군요....
어쨌거나 작업 완료했습니다.
지도회사에서는 택배로 100장의 지도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지도수정+프린터 작업에 들인 돈이 280만원이 넘었으니
부지런히 지도를 팔러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몇 곳을 들어가서 지도를 3만원에 팔려고 해 보니, 다들 안 사겠다고 그럽니다.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은 지도의 크기가 전지 크기가 아니라서 싫다고 그러고,
젊은 사람들은 단골 고객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고 그러고,
소방서에 갔더니 자기네는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공짜로 받은 지도가 있다고 싫다고 그럽니다.
제가 지도를 폐기처분할 때까지 5장인가 팔았습니다.
돈만 날리고 헛수고만 한 꼴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서 방배동을 속속들이 가 보게 되었고,
수정한 지도를 치킨배달(그 뒤에 다시 다른 데에 취직했습니다)에 이용하면 배달이 정말 쉬웠습니다.
어느 골목 몇 번째 집...
이런 식으로 지도를 보고 기억하면, 그 위치에 주문한 집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 ^
나중에 제가 수정작업할 때 40여 곳을 잘못 수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심했었지만 실수는 피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ㅠ ㅠ

지도를 수정하고, 그걸로 치킨배달을 한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면,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주소의 관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도로이름식으로 찾는 것이 쉽게 찾아진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도로이름이 중구난방인데,
그 도로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쉽겠냐 이거죠.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다 네비게이션을 사서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어요?
노무현정부에서 이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저는 반대를 했더랬습니다.
그렇게 하면 도리어 찾기가 어려워진다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도로이름을 정할 때 상호 타협할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
방배동 1번지부터 3000번지까지, 대개의 경우 블럭을 기준으로 번지수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843번지와 844번지는 바로 한 도로의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방배8431길 24번지 이런 식이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위치를 대강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실제로 집을 찾아가는 것도 쉬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