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펼쳐졌던 미실과 덕만 사이의 진실 게임이 아주 흥미롭게 펼쳐졌죠.

"허패와 진패를 가르는 싸움"에서 덕만은 미실에게 일식의 정확한 시간을 적어놓은 진패를 제시하고 이것이 진패인지 허패인지 판단하라고 강요합니다. 미실의 오른 팔인 설원랑은 "허패일까 진패일까 고민하는 것부터 덕만에게 말려드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 당시의 격물(과학)의 수준에서, 일식이 "정확히 어느 시간"에 있을 것인지 아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천문을 읽는 월천을 덕만에게 빼앗겨버린 미실로서는, 그 허패와 진패를 가른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기에, 허패일지 진패일지를 판단하라는 덕만의 판에 발을 담그지 말라는 조언이죠. 즉, 거짓/진실의 이분법이 아닌, 거짓/진실을 생산하는 체계의 문제라는 것을 승부사다운 기질로 알고 있는 것이죠.

미실은 이미 일식이라는 격물을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읽어내는 자로서, "천신황녀"로서 등극하게 됩니다. 즉, 언제 비가 내릴 것이며, 언제 일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등... 그리하여, 천신황녀로서의 미실은 이번에도 일식이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있다면 언제 있을 것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만 되는 것이죠. 미실은 결국 덕만이 제시한 진패를 허패로 읽는 실수를 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숨겨져 있는" 일식, 혹은 격물(과학)이라는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미실에 의해서라면 사사로운 권력을 위해 숨겨져야만 하는 어떤 것입니다. 숨겨진 체로 천신황녀에 의해 예언되기만 할뿐인 하늘의 뜻, 즉 미신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죠. 그러나, 덕만에게라면, 이 진실, 즉 일식, 혹은 과학은 모두에게 밝혀져야만 하는 것이죠. 이 논리가 정치의 희생양이었던 격물사인 월천을 설득할 수 있었던 논리이죠. 덕만은 월천에게 첨성대를 그려 보여 준듯 합니다.

가면의 정치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여겨지는 가면... 기실, 진실은 어디에도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죠. 가면을 통해 드러나죠. 가면이 진실입니다. 천신황녀로서의 미실의 가면이 격물사인 월천을 잃고 일식이 언제 일어나는지 오판하는 순간, 즉, 미실의 가면이 거짓이 되는 순간, 그녀의 가면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죠. 즉, 일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천신황녀로 추락하는 것이죠.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는 미신, 어떤 본질이 우리의 삶을 근거 짓는다는 허상... 혹은, 무엇이라도 있는듯 숨기려고 하는 권력... 구린 것을 더 구린 것으로 덮는... 대운하를 4대강으로 덮는...

여기서 글을 멈춰야 겠네요.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많이 복잡하기도 한데다, 이번 주 한 편만으로도, 할 말이 한도 끝도 없지만, 이 정도로도 쓸 말은 쓴 듯하네요...

덧글: 윗 글과 맥락이 다른 아래의 글을 덧붙여야겠네요. 몇 달 전에 "가면의 정치학"으로 싸이에 썼던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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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집시법"이 통과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권력"의 다중 혹은 민중의 익명성에 대한 두려움과 이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겠네요. 그리하여, "미네르바"에 "박대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그러하고, 인터넷 실명제와 "최진실법"을 입법하려는 것이 그러하죠.

 

가면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된 이유는 푸코의 고고학에 대해서 읽다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어서 입니다.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자신은 어떤 얼굴(face)을 갖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우리의 자아들이란 가면(mask)들의 차이”라고 말을 하는 것과 이글의 제목인 가면의 정치학이라는 용어가 잘 들어 맞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푸코는 레이몽 루셀에 대한 글에서 가면 뒤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무엇이 감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가면에 다름 아니겠죠. 이 논리는 라캉에서도 보여지는 응시(gaze)의 논리이기도 하죠.

 

이전에도 간략히 썼듯이, 푸코의 고고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고학이 그러한 것처럼 "감추어진 것(the hidden)"을 발굴하는(dig into and dig out) 것이 아닙니다. 랑시에르가 그러하듯, 문서고에 널려있는 문서들을 끄집어 내는 것에 불과하죠. 랑시에르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대해서, 칸트와 같은 초험(transcendental)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노동자의 문서를 끄집어냅니다. 이 문서에서, 한 건축가가 어떻게 자신의 방식으로, 즉, 자신의 "미학적" 응시(gaze, seeing)로 건축물을, 그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지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푸코는 범죄인에 대한 판결문들, 광인에 대한 심문을 기록한 문서들, 광기의 문학들 등등을 제시합니다.

 

이 문서고에서 끄집어내는 문서들, 혹은 언표들은 희소성과 규칙성(regularity)을 가집니다. 어떤 언표의 희소성에 의해서 가치의 교환이 발생하고, 교환 관계가 만들어지죠. 흔하디 흔하게 널부러져 있던 어떤 언표가, 어떤 역사적 시기에 가치가 희박해지고, 한 공동체는 이 언표를 교환하느라 바빠지겠죠. 유럽에서 18세기 중반 부터, 광기와 태만(delinquency)이라는 언표가 대두됩니다. 그 이전 시기들에도 , 광기와 태만은 존재했던 것들이었지만, 이 시기에 태만은 하나의 범죄로서, 형벌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감옥에, 작업장에 감금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8세기, 유럽의 거리들을 자유롭게 배회하던 거지들과 부랑자들은 태만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로 감금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광기, 태만은 정신의학을 그리고 형사법을 어리둥절케 하는 어떤 무엇이죠. 존재하지도 않는 광기와 태만을 정의내리고, 감금해야하는 정신의학과 형사법의 당혹감… 혹은, 그 희박한 광기와 태만이라는 것들의 의미를 찾아야하는 정신의학과 사법… 사실, 광기와 태만은 그것들의 사생아들일 뿐이죠. 광기의 고향은 요양소라는 진실… 이제 광기와 태만은 유럽을 휩쓰는 유령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60, 70년대의 풍경을 채우던 “광녀”들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병원으로 향하게 되죠. “내 귀에 도청장치”라는 망상증(편집증이라고 주로 번역되는 paranoia)이년대를 표지하는 하나의 언표-사건이 될터이구요. 또한 이 시기에 정신병이 급증합니다. 그 이전에도 이러저러한 정신병은 있었을 텐데, 중요한 것은 80년대에,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입원하는 환자가 폭증한다는 것이죠. 입원환자 중에서 두 번 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80

 

그리고 푸코는 어떤 언표가 어떻게 규칙적으로 등장하면서, 특정 담론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드뢰피스와 레비나우, 그리고 로베르토 한의 경우는 푸코의 이 개념을 "규제(regulation)"라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즉, 담론이 언표를, 그리하여 개인을 규제한다(regulating)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인 거죠. 언뜻 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푸코가 거부하는 "억압 가설"로 넘어가는 첩경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과는 다르게, 푸코는 그의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상당부분 억압가설을 벗어나 있죠. 그리하여, 푸코의 관심사는 특정 담론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특정 언표들이 어떻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지, 규칙적으로 등장하는지를 보이는 것이고, 이를 통해, 근대에 어떻게 인간학이 탄생하고, 임상의학이, 형법과 사법이, 시민사회가 탄생하는 지를 보이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어지듯이, 푸코의 <담론의 질서>, <니체, 역사, 계보학>의 시기에 고고학을 폐기하고, 계보학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죠. "경제학적 인간," "시민사회의 탄생"을 다루는 78년의 <<생체정치의 탄생>>에서도 이전의 저서들과 동일하게 고고학적 방법이 사용됩니다.)

 

이렇듯, 문서고, 문서, 언표라는 개념들은 감추어진 것, 초험적인 것을 지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혹은 너무 흔해서, 우리가 미쳐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지시하는 개념들이죠. 즉, 너무 가까이 있는, 특정 언표 등등등... 문학의 예를 들면, 18세기에 형성된 사실주의라는 문학의 정전들. 이 정전들이 그리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적,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부르주아 시민사회적인 세계와는 다르게 다른 세계를 그리는 문학들이 있죠. 문서고들이, 문서들이, 언표들이 있습니다. 이 문학들, 언표들은 숨겨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즉, 비밀에 부쳐져 있고, 숨겨져 있어서, 어떤 특정 권위를 지닌 자들 만이 비밀스럽게 회람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문학들, 이 언표들은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어서,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이 널부러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죠. 심지어 이러한 저항의 문학들, 저항의 언표들은, 정전에 침투할 정도로, 너무도 흔한 것들이죠. 너무도 흔해서,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죠.

 

다시, 지식의 고고학은 숨겨진 것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의 자아들은 가면들의 차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지식의 고고학은 그렇게 분산되 있는 언표의 표면들, 혹은 가면들의 형성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지식의 고고학은 우리의 자아들이 쓰고 있는 가면들로서의, 글쓰기들, 실천들, 행위들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융은 우리의 얼굴 뒤에 숨겨진 인격을 말하는 것에 반해, 라캉은 우리의 얼굴이 바로 인격이라고 말합니다. 얼굴 뒤에 숨겨진 인격이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마치, 세미나 11권에서 베일(veil)은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베일 뒤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베일일 터입니다. 현상과 본질(appearance and reality)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죠. 현상은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현상이 곧 본질인 셈이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 이러 저러한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죠. 그 가면이라는 얼굴이 그의 본질을 들어낸다는 것을 모르는 체 말이죠. 혹은 감추면서, 들어낸다고 말해도 좋겠네요. 이명박이 쓰고 있는 가면을 보면, 그의 얼굴을 보면, 사태가 어떠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면의 정치학은 또한 가면쓰기의 놀이이기도 하죠. 여성의 섹슈엘러티를 가면(masquerade)이라고 라캉이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권력의 폭력은 그 가면을 벗겨내려는 것에 다름아니죠. 사드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발가벗은 무녀의 살갗조차도 벗겨내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 권력은 우리의 가면의 정치학을 파괴시키기 위해, 우리의 가면의 윤리를 파괴시키기 위해, 마스크(방한대)를 벗겨내려 하고 있네요. 마스크를 벗겨낸 후에, 권력은 또 우리에게서 무엇을 벗겨내려 할까요? 사드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춤추는 무녀의 옷을 벗겨내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해 살갗까지도 벗겨내는 폭력으로서의 권력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