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가 건드리면 안 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몇몇 글을 보고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갔더랬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만 쓰지요.

1. 한의학은 아직 과학이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사이언스 science 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지식의 체계라는 뜻에서 '학문'으로 번역하면 맞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과학'내지는 과학이라는 뜻에서 '과학'으로 번역하면 맞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XX학'은 과학이자 학문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지식의 체계이기는 하지만, 과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2. 과학은 저마다 관할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물리학이 관할하는 영역과 화학이 관할하는 영역(자연현상)이 다릅니다.
이런 영역 구분은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에 따라서 정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유낙하운동을 화학에서는 다루지 않으며, 화학의 어떤 법칙으로도 자유낙하운동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물리학으로 화학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혹시나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요즘은 영역을 서로 뛰어넘어서 같이 연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그래도 영역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3. 의학은 과학과 기술의 복합체다
의학의 기본 뼈대는 화학이나 생물학이나 물리학 같은 다른 학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의학은 인체의 생리현상, 병리현상, 약리현상을 관할하는 과학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문의 바탕 위에 진단과 치료를 위한 기술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의학은 과학에 속하는 부분도 있고, 기술에 속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4. 의사의 오진과 의학의 한계
한 20년쯤 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일본 토쿄대 의사들의 오진율이 13%나 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들은 오진율이 높아서 깜짝 놀랐고, 다른 의사들은 오진율이 낮아서 깜짝 놀랐다...
의사의 오진은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기술적인 영역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청진기의 음을 듣고도 여러 의사 중에 어떤 의사는 오진을 합니다.
또 어떤 의사는 엑스레이사진을 보고 알아채는 것을 다른 의사는 보고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런 오진을 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중복해서 합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오진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술은 경험에 의해서 향상될 소지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진을 이유로 의학에 심각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비록 의학이 모든 병을 제깍제깍 진단/치료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의학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눈꼽만큼이라도 손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5. 과학이란 무엇인가?
R. 카르납의 [과학철학입문]에 보니,
과학은 법칙이랍니다.
그리고 법칙이란 반복되는 규칙성을 말로 표현한 것이랍니다.
요즘에도 카르납의 과학에 대한 정의가 그대로 통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6. 의학은 왜 과학인가?
서양에서 발달한 자연과학은 반복되는 규칙성을 매우 정밀하게 관찰하고 추론하고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대로 논문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든 그 법칙에 의심이 생긴다면, 논문에 들어 있는 내용을 검토해 보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관찰하였는지, 엄밀하게 추론하였는지, 엄밀하게 확증되었는지 의심자는 검토하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 법칙으로 공인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혹은 그 이상에서 배우는 모든 법칙들은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것들입니다.
의학은 이런 자연과학에서 법칙을 차용해 왔고, 자연과학에서 과학의 엄밀성을 차용해 왔습니다.
의학논문들은 바로 의학이 과학임을 잘 보여줍니다.
의학의 법칙에 의문이 간다면, 의학논문을 읽고 관찰과 추론과 확증 과정에 대하여 검토하고 반박하십시오.
그래서 의학의 법칙들은 대개 확신할 만큼 믿을 만한 것들입니다.
이중맹검법 같은 것들이 엄밀하게 추론할 수 있도록 하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7. 한의학은 왜 과학이 아닌가?
한의학은 나름대로 지식체계이기는 합니다만,
그 지식들이 어느 하나도 법칙으로서 공인된 바가 없습니다.
관찰도 추론도 확증도 한 적이 없는 명제(혹은 문장, 혹은 진술, 혹은 주장)들로 이루어진 지식입니다.
그러니 한의서의 어떤 문장이 법칙처럼 보이더라도 그건 법칙으로 대우하면 안 됩니다.
아직은 의심쩍은, 불확실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걸 함부로 믿겠다는 사람은 사실은 종교인이지, 과학자가 아닙니다.

8. 그렇다면 한의학을 과학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의학에서 미심쩍은 지식(문장)을 확실한 법칙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확실히 폐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진단과 치료를 더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약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듯이,
인간의 목숨과 건강을 놓고 미심쩍은 치료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건 무당에게 가서 굿으로 병을 치료받겠다는 것과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9. 한의사들은 진단과 치료로 돈을 버는 데에 바쁩니다.
그만큼 한의사는 한의학의 과학화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의사를 상대로 한의학을 논하는 건 서로에게 시간낭비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자는 다른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다른 한의사들을 대신해서 한의학을 과학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의학자들이 과학화에 관심을 크게 두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게 우리 한의학의 비극입니다.

10. 한의학의 미래는 어찌 될까?
어떤 의사들은 한의학을 완전한 사기 완전한 쓰레기로 생각합니다만,
그건 그들이 무식하거나 지나치게 오만해서 나온 생각입니다.
제가 전망하기로는, 한의학이 과학화된다면,
극히 일부 지식만 법칙으로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고, 의학/약학에 흡수될 것입니다.
한의학의 소멸이 안타까운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의학의 발전으로 더 나은 진단/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창조적 파괴로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