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사회와 공정 사회, 과연 서로 충돌하는 것인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119151949&Section=02

 

 김대호님 글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김대호님은 양극화를 낳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진보, 개혁, 좌파가 내세우는 복지 사회론이 처음부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잘못 진단하고 있다고 본다.  김대호님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지배적 모순은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의 이윤추구로 대표되는 자본의 자유와 그에 따른 노동의 자본 종속의 심화가 원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수십년 지배해 , 관료 사회의 적극적 조장 혹은 무의식적 방치로 인해 고착된, 사회적인 보수와 상벌 체계의 불공정성에 있다. 즉 공공의식이 결여된 관료 사회가 공정성에 입각한 사회적 상벌 체계를 확립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 <과소 시장>- 그 안에는 특혜를 입고 노동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특혜와 높은 보수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회 특권층이 존재하는데-과, 과소 시장 밖에서 무자비한 경쟁에 노출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댓가와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다수의 임금/비임금 노동자들, 자영업자들로 채워지는 과대 시장이라는 두 가지 이중적인 시장 메카니즘이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갈등을 낳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김대호님의 기본 주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한다. 필자는 김대호님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1) 신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의 원인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모순과 구조적인 문제를 적확하게 파악하는 인식틀도 될 수 없다. 2)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제안된 각종 복지 사회 모델 역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 김대호님의 첫번째 주장은 한국 사회의 분석틀로서의 신자유주의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독특하게 급진적인 면이 있다.(독특하다는 말은, 그 급진성이 좌파적이라고 말할 수도, 우파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97 IMF 구제 금융 이후의 한국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규정하는 근본 심급이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면(!), 적어도 사태에 대한 한국 주류 좌파와 민주당 간판 정치인들의 진단은 출발부터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이고, 김대호님 역시 이러한 의도로 이 글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이 주장이 매우 문제성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검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김대호님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좀 부족한 것 같다.   

 

1. 신자유주의 존재 부정


   우선 김대호님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규정하는 변수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심지어,  김대호님은 신자유주의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한다

 

>>> (인용 시작)

 어쨌든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의 흐름이 거세진 1990년대 이후에는 주된 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로운 소비자 선택권이 작동하는 시장인 경우는 신자유주의-양극화 시비가 나올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등지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미국, 일본, 중국의 정치권이나 지식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비나 양극화 시비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 일까추측컨대 양극화라는 개념이 격차의 크기만 주목할 뿐 격차의 다양한 성격을 묻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신자유주의 시비를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확대해 버리면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의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라서, 한국, 중국, 브라질의 경제·사회 정책도 몽땅 신자유주의로 뭉뚱그려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강조는 인용자.)

 >>> (인용 끝)


 김대호님의 이런 논리는 두 가지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우선 첫째, 신자유주의가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라면, 적어도 우리 나라 사회에서 97 IMF 이후 피부에 와닿는 여러 사회 경제적인 현상들, 초국적 자본의 국내 금융 시장 유입으로 인한 한국 경제의 취약성 확대, 비정규직의 노동자의 양적인 증가와 정규적/비정규직 노동 임금 격차의 확대 등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김대호님이 즐겨 인용하는, 엄청난 수의 영세 자영업자군들의 존재는 물론 한국적인 노동 시장의 특수성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규정하는 주요 변수가 아니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김대호님 말마따나 신자유주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자연적인 전지구적인 확장의 국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의 신화가 무너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가 끊임없이 증가하며, 특히 청년 실업률이 높아지는 현상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한국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는 소위 우리나라 보다 잘사는 나라들을 경우를 살펴 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2. 모순의 근원 : 자본주의 시장 경제 자체가 아닌 한국 사회에서 특수한 불공정한 제도와 패거리 이익 추구 문화의 문제 


  여하튼, 김대호님에 의하면 관건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해외 무역의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 하에서 고착된 <사회적인 상벌 체계>를 면밀하게 살펴 보는데 있다. 한국 사회의 모순은 그에 의하면 이 사회적 상벌 체계가 관료 권력에 의해 불공정하게 왜곡되어 있다는데 있다. 여기서 <사회적인 상벌 체계>, 사회적으로 생산된 경제적, 사회적 급부를 분배하고, 각자에게 그에 맞는 적절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또 직업에 대한 경제적인 보수 체계를 시행하는 사회적인 시스템을 말한다. 이 사회적인 상벌 체계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고, 이것이 한국적인 여러 고질적인 문제점을 낳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말해서, 김대호님에 의하면 한국 사회의 근본 모순은 신자유주의라는 초국가적인 압력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축적된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김대호님에 의하면 관건은 이 사회적인 상벌 체계를 합리화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보상 체계가 고장 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끊이지 않는 갈등과 모순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관점은 결국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생산 요소들간의 역학 관계- 즉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노동의 자본 종속- 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그 생산 관계를 뒷받침하는 사회의 제도적인 역량- , 그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력 수준과 사회, 경제적인 보상 체계의 결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경제 결정론, 경제 환원론이 아니라 제도적 결정론의 관점에 가깝다. 필자는 이것을 편의상 '제도주의적 관점'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 제도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적인 보수/상벌 체계의 공정성 - 척도의 문제


 그런데 김대호식의 제도주의 관점에서 독특한 것은 사회적인 보상과 상벌 체계를 판정함에 있어, 개별적인 직업군들이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경제적으로 얼마나 '적절한' 보상을 가져가느냐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한 나라에서,1인당 평균 GDP 대비 특정 직업군의 임금 비율의 국제간 비교는 직업군에 따른 사회적인 상벌 체계를 측정하는 유효한 바로미터로 간주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1인당 GDP 대비 우리 나라 초등학교 정교사의 임금 비율이 4배 수준인데 비해, 다른 나라의 경우에 그것이 2.5배나 3배 정도라면 그것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정교사들이 사회적인 상벌 체계에서 과도한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통찰에 있어서, 결국 사회적인 상벌 체계의 척도는 그 나라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성이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순전히 국제간 비교에 의한 상대적인 수치로만 파악되게 된다. 과연 이렇게 국가 내부의 역사적인 상황을 전혀 고려 하지 않은, 직업군의 1인당 GDP 대비 임금비라는 상대적인 수치 척도만을 가지고 특정 직업군에 대한 그 사회의 보상 체계의 공정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사실 이런 제도주의적인 접근 방식에서는 반드시 고려 되어야 하는 점이나, 여기에 대해서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어떠한 진지한 고찰도 시도된 적이 없다. 

  

일정한 생산 수준하에서 한 나라의 1인당 GDP 대비 직업군의 임금 수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측정해 보는 것이 그 사회의 상벌 체계를 일정한 관점에서 나름대로 평가해 보는 하나의 분석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변수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인 상벌 체계가 공정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나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남김 없이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처럼, (사회적인 상벌 체계가 심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사회적인 상벌 체계 역시도 우리 나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과 모순들을 남김 없이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봐야 한다.  

 

김대호님은 계속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없는 각종 사회 모순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기술한다. 이것은 김대호님의 어법을 빌리면, <신자유주의의 안경>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사회적인 상벌 체계의 공정성>의 안경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모순들이다.

 

>>> (인용 시작)

국가에 압도적으로 책임이 있는 불합리한 격차는 이 뿐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 인재-이는 수백조 원의 금융 자산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몇 개의 '' 직업의 이면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면허증의 숫자 규제와 지나친 독점권 보장(변호사법, 의료법 등)이 버티고 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한국 공공 부문(공무원공기업)의 매력과 공공 부문-민간 부문의 격차도 마찬가지다. 행여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격차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인해) 민간 부문이 세계화, 자유화된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서라거나, 민간 부문이 못나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소리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종 복지 혜택을 무더기로 제공하여, 복지 재정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복지병을 만들어내는 기초생활보장제도(혹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의 불합리한 격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산물이다. 한편, 식당 아줌마와 건설 노가다(일용 잡부)로 상징되는 하층 근로자의 처우가 15~20년 동안 거의 답보 상태인 것은 중국(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단순 근로자의 대량 수입(방치)과 이들의 노동권에 대한 과소 보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략)…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부당하고도 극심한 처우 격차를 생각해 보라. 한국의 시간 강사는 전임에 비해 실력이나 노력이 많이 부족해서 처우가 낮은 것은 아니다. 대학의 가혹한 이윤추구 탓도, 대학 간 과도한 경쟁 탓도 아니다. 오히려 대학의 서열 구조로 인해 대학 간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서 문제다. 하여간 신자유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국가가 사용자라면(몽땅 국립대학이라면)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듯이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낼 사람이 학위의 효용을 의심하는 학생과 학부모인 한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다. 복지로 시간 강사 문제를 완화 할 수는 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닐까?

그 외에도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극심한 격차, 대기업·공기업 생산직의 급격한 노령화(노동시장의 수준에 비해 너무 높은 고용 임금 수준), 수도권 집중과 지방의 총체적 피폐화 등도 기본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힘 있으면 전후좌우 보지 않고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몰염치하게 추구하는 뿌리 깊은 문화, 관행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문제들은 복지로 고통을 약간은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사실 좋은 학과 및 학벌을 따기 위한 사교육 열풍, 해외 유학 열풍, 고시·공시 열풍, 과도한 스펙 쌓기, 시간 강사 문제, 최악의 자살률과 저출산 고령화, 낮은 고용률과 너무 낮은 청년 고용률, 좀체 줄지 않는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 문제 등은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개방화, 자율화, 민영화, 규제 완화 수준이 유달리 높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복지 수준이 낮아서 악화되는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핵심 원인이 아니다.

핵심 원인은 선망하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에 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그 생활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다수의 일자리가 사회 통념에 비해 너무 열악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몽땅 1997년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고작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획기적인 복지 확대이다. 당연히 복지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과장한다.

이들의 실천적인 귀결은 1987년 이후 진보 동네의 부동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노동권 옹호, 자본권 억압"이다. 당연히 노동이 아닌 자영업자와 공식 실업자와 사실상 실업자와 청년층에 대한 대책이 없다. 자본이 노동을 매우 무서워하고, 고용을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는 한 고용 확대는 쉽지 않기에,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도 사실상 없다. 복지국가론에서 오직 유효한 것은 세금을 통한 공공 부문 확대와 보건-의료-복지 스펙을 강화하여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 (인용 끝) 


다 좋다.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단락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원청 대기업/하청 중소기업간 문제, 비정규직 교수/정규직 교수 문제, 공공 부문 공무원/사적 부문 노동자들의 문제, 국가가 면허를 발급해 주는 고급 전문 직종 종사자들의 배타적 이익집단화 문제 등등.. 김대호님은 이러한  각종 사회 구조적인 모순들을 꿰뚫고 있는 근본 원인이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생활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선망하는 일자리의 한쪽 편에는 대기업 노동자, 초중교교 정교사, 의사, 변호사등 고급 전문 직종 종사자, 일반직 공무원, 그리고 물론 불노소득 지대 생활자들과 CEO 등 각종 고급 관리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쪽 편에는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소수의 사람들의 백그라운드에서 배제된, 다수의 모든 일반 근로자들, 자영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소위 대기업 귀족 노조와 CEO 등 상위 관리 계층을 특권 그룹 하에서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공무원들과 초중등학교 정교사들까지도 이 그룹으로 끼워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무엇이 빠져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는 그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정작 여기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김대호님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순과 문제점을 사회심리적인 차원으로 환치 하려고 할 때 드러나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생활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은, 얼핏 보면 위에서 언급한 1인당 GDP 대비 측정 방법에 의해 객관적으로알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로지 각 나라들간의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수치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사들이 1인당 gdp 2만불 시절에 3만불의 연봉을 가져갔는데, 우리나라 교사들이 1인당 gdp 2불 시대에 4만불을 가져간다고 해서 이것을 과연 생산력 수준에 비해 교직이라는 직업에 대한 보수의 수준이 너무 높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으, 어떤 선망하는 일자리에 대한 보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은, 해당 사회에서는 강력한 경쟁을 촉발하는 유인이 되고, 역으로 그 사회가 교사들에게 다른 사회보다 더 양질의 노동력을 요구한다는 표시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은가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생활 수준이 너무 높다>는 명제에서, 결국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의 선호체계에 의해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볼 때,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어떤 일자리에 대한 보수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망하는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군을 제외하면, 특정 직업에 대한 보수 체계는 대개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된다. 변호사나 의사라는 직종이 상대적으로 높은 고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에, 나는 그 직종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이러한 상벌 시스템- 결국 특정 직업에 대한 가격을 매기는 것과 유사한- 을 어떻게 국가가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가?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은, 그러므로 적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의 심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예외적인 경우, 예컨대 국가가 공무원을 채용할 때도, 정부가 공무원의 임금 수준을 정할 때에도 그 임금의 적정성이 다른 나라와의 임금 수준과의 산술적인 비교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또 고급 전문 직종에 대한 라이센스 발급의 경우에도 변호사나 의사의 '적정' 급여 체계를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은 오로지 시장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에서는 사회적인 상벌 체계의 공정성의 명분하에 국가가 개입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여지도 없고, 또 그러한 조치를 정당화 시킬 근거 또한 없다. 복지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2차적인 조절과 그 분배 메커니즘으로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안정적인 생활 수준과 근로 조건을 제공해 주는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는데 반해, 경쟁에서 도태되어 밀려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복지는 바로 공정한 경쟁이 산출해 내는 불가피한 결과들을 보완적으로 조정하는 장치인 것이다. 복지 모델은 공정 사회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더 진전될 수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는 사회상이다. 그러므로 공정 사회를 모델로 하여 복지 사회 모델을 비판하는 것은 애초부터 문제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복지 제도를 강화하고 강조하는 것이 사회적인 상벌/보수 체계의 공정성을 약화시키는가? 경쟁의 룰을 더 공정하게 만든다고 해서 과소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 있을까? 오히려 과소 시장에서 발생하는 과잉 소득을 이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장치가 세수 증대를 통한 복지 재원 확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