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과거는 잘 아는대로 초시와 복시 문과가 있다.

복시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라 불리우며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졌으며 성균관의 정원은 200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과거가 생원 진사합격자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조방목에 등재된 14,682명의 문과 급제자의 출신을 보면 생원과 출신이 2753명 진사과가 2485명 유학이 5421명 원유계자가 3979명 기타가 44명이다.

 

여기에서 생소한 것이 유학 그리고 원유계자이다

유학은 학교에 재학중인 자로서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에만 정진할 수 있었는데 향교와 사부학당등 관학재학 중인자들이다.

그러니까 생진과를 통하지 않고 바로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원유계자라는 말은 이미 관직을 지니고 있거나 산품 관직자 관직을 지낸자등을 일컫는 말이다.

 

생진과나 유학은 다 아는 내용이라 할 수 있고 원유계자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원유계자는 음서나 취재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승진의 한계와 엘리트 코스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에 문과를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들이다.

이들중에는 기술관들도 있고 현감 현령 목사 등 당상관 1명을 비롯 참상관들이 가장 많고 참하관들도 있다.

 

이미 관직을 지닌 자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이유는 문과급제를 해야 떳떳하게 관료로서 대우와 승진을 받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음서로 관직에 나가는 경우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생원이나 진사로 합격을 하면 천거로 관직에 나갈수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문벌있는 집안에서 음서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라에 정변이나 일이 있을때마다 공신책봉이 있고 이때 대가라는 것을 하였다

대가는 본인이 받을 작위나 벼슬을 자식에게 대신 받게 해주는 제도로서 대가를 받게되면 자식은 자동으로 관직을 받게 되고 출사를 할 수 있다.

 

조선 초중기에는 지방 수령은 생원 진사나 음서중 취재를 통하여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지방직에서 급제자가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

 

문과 급제자의 부친의 직업은 대체적으로 생원 진사 또는 원유계자등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산품관들 현직이 아닌 작위만 부여받거나 실직이 아닌 사람들 교대로 맡아하는 체아직을 맡은 관리들도 과거를 보아 합격을 하면 원유계자로 분류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9급이나 7급 공무원이 재직중 고시공부해서 행정고시에 붙은것이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생원이나 진사로 합격한 사람들이나 운유자등은 통상 문과에 급제하기까지 걸린 연한이 12년정도까지 걸린다
물론 1-2년 3 -4년 6년까지 절반이상이 합격하지만 7-8년 걸린 사람들도 상당하다
원유계자들 중에서도 이미 합격하고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관직에 임용된 후에 생원 진사를 본 후에 문과를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통계를 보면 의외로  생원 진사를 보지 않고 공부하는 중에 바로 문과에 급제하는 사람 유학과 이미 품계가 있거나 관직에 재직중인 사람들이
정통코스로 가는 사람보다 많은 것이 의외이다.

 

또한 서얼들은 과거를 못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훗날 이것이 허용이 된다

1625년 이원익이 마련한 과거 허통사목에는 양첩의 경우 손자대부터 천첩은 증손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후 1708년에는 서얼을 부친으로 하는 사람은 신분을 업유 업무라하고 업유나 업무의 아들이나 손자는 유학이라고 출신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여 문과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러니까 서얼은 손자대부터는 과거를 볼수가 있던 것이다.

조선의 과거제도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경직되지 않았고 나름 재주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진출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는 봉쇄되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농민이나 생원 진사가 아닌 집안에서 자녀들이 생진시나 문과에 합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실제로 그 인원은 많지 않았다.

또한 출사를 해도 문벌에 따른 승진의 차별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양반의 군역과 조세부담

 

조선의 양반은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고 병작을 하엿는데 도지법과 타조법이 있다
타조법은 수확의 반을 나누되 세금을 지주가 부담하는 방식이고 도지법은 3분의 1을 받되 세금을 소작농이 받는 형태이다.
세금은 3천평 1결당 27말인데 일반 양인은 환곡 특산물 공물등의 의무가 있었고 양반은 이러한 부담이 없었다.

  양반도 세금을 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소작농이 그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군역은 향교와 성균관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양반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양반이 군역을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학생을 제외하고는 군역을 부담하였으며 나중에 방포방군제가 실시되었을때에 양반들은 군역을 면하고 대신 봉족이나 군포로 때우게 되는 것이다.

숙위군이나 이런 부분은 왕족이 친척이나 고위관료층에서 담당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군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이런 저런 명목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 본다.


조선의 노비제도

조선의 노비제도는 중국이나 고려보다 가혹하기로 둘째이다
본래 노비는 범죄자나 전쟁포로 빚진자등이다
따라서 당사자만 노비이고 그 후손은 노비가 아니었다 중국의 노비는  바로 당사자만 노비로 끝나는 것이고 그 가족이나 자녀는 양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한번 노비이면 자자손손 노비이며 심지어 양인이라도 노비와 결혼하면 본인은물론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아주 비 인도적인
제도였다.

노비는 주인이 관청에 신고하면 죽일수도 있었고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로 나누어지는데 고된 신역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비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는데 송익필 같은 경우는 유학으로 대성하여 휘하에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그 어머니가 천비여서 죽었을 경우에는 그 제자들이 명정에 뭐라고 써야하는가로 고민이 있었다.
서기 같은 경우는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