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보면 흔히들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하여 잘못된 고증들이 나오고는 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양반만이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조선시대 신분제도와 그 변천을 간략하게 두 번에 나누어 서술하고자 합니다.

 

먼저 조선시대 신분제도는 초기와 후기에 따라 그 성격과 형태가 달라지게 됩니다.

장장 오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으니 어쩌면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이 법에 규정된 것과 실제 현실이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일단 조선초기부터 중종때 까지는 초기의 신분질서가 대체적으로 지켜졌고 비교적 차별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중종 명종이후부터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양반이라는 말 대신 사족이라는 용어가 더 선호되면서 배타적인 신분질서를 갖게 됩니다.

 

사실 사림은 훈구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실상은 성리학적 이상과 관념을 따르느라 더 경직되고 오히려 훈구파가 현실적인 정치를 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물론 사림들의 경직된 신분고착은 사림으로 불리우던 지방 유림들의 정계진출 및 당시 양반의 증가와 맞물려 관료로 진출하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것도 원인이 될 것입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어 집니다

천인은 노비를 말하는 것이고 권리도 의무도 없는 그런 신분입니다

양인은 국가에 군역과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으며 대신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이 양인은 다시 문무 관료를 지칭하는 양반과 상한 (常漢)또는 서인(庶人) 으로 불리우는 평민으로 나누어 지고 이중 양반은 문반과 무반 그리고 기술직에 해당하는 잡직이 있는데 사실상 문반 반열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리고 평민은 농민 공,상, 그리고 칠반천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에는 관직 (실직이나 散職)에 있는 사람만 양반이었으나 점차 관직을 지낸 사람과 그 가족 가문을 양반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양반은 초기에는 직업적인 분류였으나 중 후기부터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적 분류로 변천해 갑니다

 

이영화가 지은 조선시대 조선 사람들이나 자게 게시물에 나온 4대가 관직을 지내야 양반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오류가 있습니다

4대가 아니라 四祖 인데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이름을 과거시험 단자에 쓰게 하였는데 쓰지 않거나 못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文科榜目에 의하면 태조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문과 합격자 1,796명중 四祖의 이름이 전혀 기록이 되지 않은 사람이 361명이나 되고 장원중에도 4조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4조 명단을 제출하게 한 것은 양반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응시 자격이 없는 서얼 승려 공,상등 부적격자를 가리기 위한 장치인 것이었습니다

 

다만 양인중에서 칠반천역과 공,상인은 하급 무관이나 잡직에만 응시할 수 있었고 농민이 주를 이루는 일반 양인들은 과거 응시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또한 음서나 서리로 출사한자 기술직등은 限品 去官制라하여 일정 직급 이상은 승진할 수 없었는데 이것도 그들이 기술직이거나 전문인으로서 인문적 소양과 정책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적당하지 않다는 의미였지 신분에 의한 제약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양반의 자제라도 문과급제를 못하여 서리로 출사를 하면 6품까지만 승진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직이라도 문과를 볼 수 있었고 급제를 하면 제한없이 승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직종을 의미하던 양반이 세월이 흐르면서 신분의 분화가 생겨납니다.

아무래도 관직의 수는 한정이 되어 있는데 출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으니 경쟁이 치열해 지고 결국 과거 급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그러다 보니 급제 경험자가 많은 가문이나 경제적 능력 그리고 출중한 선생을 초빙할 수 있는 문벌 집안이 유리해 질 수 밖에 없고 소수의 가문에서 관직을 독점하게 됩니다.

 

또한 양반계층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에 몰두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지방토호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조선 선조이후에는 점차로 양반이 단순히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신분용어로 변천해 갑니다.

그리고 양반이라는 말 대신 사대부 사족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여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양반은 근원이 문반과 무반관료를 지칭하는데 있었기에 출사하지 못한 양반집안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는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기에 사족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게 되고 이것이 양반계층으로 고착화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관직을 지내지 않아도 양반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양반 계층으로서 행세를 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경학과 문장에 일정한 소양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 유씨 집안은 200년 동안 한명도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도산서원에 출입하고 당당히 양반 대접을 받았습니다.

반면 몰락한 양반이나 경제력이 없는 양반 역적으로 몰린 가문등은 노비가 되기도 하고 양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가 분화되면서 고착이 되는 반면에 양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갑니다.

임진왜란등의 전쟁을 겪으면서 전공이 있는자 납속책 공명첩등으로 국가에서 노비라도 양인으로 속전시키고 양인에게는 벼슬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족보를 사거나 하는 편법으로 양반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지위하락과 함께 신분차별도 더 엄격하고 심해져서 혼인이나 벼슬길 등에서 신분이동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즉 중인의 자녀는 중인의 직업이나 기술직등으로 농민이 주류인 평민들은 수십년 동안 걸리는 과거공부를 할 수 없거나 해도 바늘구멍을 뚫을수가 없고 그래서 대부분 포기합니다

사실 과거 사시 300명 합격시대를 생각해 보면 대대로 벼슬을 지내거나 학문을 하고 유명한 당대의 석학의 지도와 영향을 받는 집안과 일반 양인의 자제가 경쟁하는 것이 승산이 없는 것이지요
더욱 사시는 그래도 매년 300명이고 과거는 3년마다 게다가 사시는 그래도 공정성이 그리 문제된 적이 없지만 과거는 당파나 집안의 영향력이 상당히 미치는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원칙적으로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양반은 세습되지 않는다입니다.
그러나 후기에 갈 수록 세습이 되고 타고나는 계층이 됩니다

 

다음편에는 양반의 조세부담이나 군역부담 노비제도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