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최근 '훼방꾼'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사실, 박지원의 그 발언은 약간 의외였다. 현역 정치인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정치력과 판단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박지원의 발언으로서는 상당히 경솔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박지원이 발언의 당사자로 지목한 시진핑의 경우 이제 중국의 차기 최고지도자로서 막 공식 무대에 오르는 셈인데, 내심이야 어찌 되었건 객관적으로 매우 밀접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한국 정부에 대해 그렇게 '무례한' 발언을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시진핑이 문제가 된 그 발언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박지원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외통수에 걸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박지원의 이번 발언을 놓고 놓치기 어려운 호재를 만난 것으로 여길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박지원의 발언으로 상당히 깊은 내상을 입은 이명박의 입장에서는 더욱 물실호기, 벼렀던 공세를 퍼부을 태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발언 파문은 단 며칠만에 찻잔 속 태풍이 되어가는 모양새다. 지난 주말을 고비로 뉴라이트 찌라시 등 일부 꼴통들의 발악 외에는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에서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이것은 뭔가 상당히 큰 힘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한국 정부나 조중동, 한나라당 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으로는 당장 미국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번 사안을 놓고 정부나 한나라당에 입조심을 시킬 이유는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월요일(25일)에 시진핑이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일인 이 날 시진핑은 공식 석상에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잘은 모르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인 지난 10년간은 중국의 고위층에서 저런 내용이 공식적인 발언을 통해서 나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외교적 행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번 시진핑의 발언을 보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유추했다. 물론 짐작일 뿐이다.

첫째, 시진핑과 중국정부는 박지원의 문제 발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동시에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이번 발언이 더 이상 정쟁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비공개 메시지를 전한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내정 간섭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국 정부로서는 실제로 이런 정도의 간섭을 할만한 명분이 있다. 중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걸려있는 문제이고, 한중 우호관계라는 점에서도 이 문제가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우기에 충분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명박 정부가 중국 정부의 이런 메시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지난 정부 10년간에 비해 현정권 들어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의 관계도 훨씬 약화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일종의 컴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카드는 중국 정부가 쥐고 있다. 시진핑이나 중국 정부가 만일 "박지원이 전한 그 발언은 사실이었다"고 나서기라도 한다면, 이명박 정권은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아마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명박 정부로서는 중국 정부의 그런 메시지에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수락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박지원 발언 파문이 급작스럽게 소멸된 배경이었다고 본다.

둘째, 중국 정부는 박지원 발언 파문을 소멸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박지원이 전했던 그 메시지 즉, 중국 정부가 남한의 현재 이명박 정권을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공식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매우 담대한 조치이자, 극히 중대한 국면 전환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진핑의 문제 발언 즉 '이명박 정권은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이라는 발언은 사실 '이명박 정권은 동북아 평화 나아가 중국의 평화와 안녕을 공격하는 훼방꾼'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국 정부가 현정권 아래의 남한을 자신들의 적대 국가로 평가하고 그 평가를 공식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국제관계의 특성상 또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 관행상, 중국 정부의 저러한 평가가 당장 한중간의 경제 관계나 기타 공식/비공식, 정부/민간 관계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중국은 이명박 정권 등장 후에도 상당기간 한국 정부와의 우호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위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동북아지역을 포함한 국제 관계에서 하는 역할과 위상은 중국으로서도 소홀히 할 수 없을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이런 기대를 거의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진핑 발언은 그것을 최초로 공식화한 외교적 행동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기대를 버리지 않는 상대에 대해 중국은 충분히 양보하고 이런저런 손해를 감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접는 순간, 매우 냉혹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국제관계에서는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한중 관계는 더 특이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체제와 이념이 다르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렸던 상대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난 몇천년간의 양국 관계도 아직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짐작일 뿐이다. 하지만 이왕 얘기 나온 김에 더 개인적인 감상도 꺼내보고 싶다. 우리나라 언론 보도에서는 주로 시진핑의 얼굴만 봐서 잘 몰랐는데, 이번에 어느 언론에선가 김대중과 시진핑이 서로 악수하는 사진이 실렸다. 아마 문제가 된 그 발언이 나왔던 모임을 앞두고 찍은 사진 같은데, 시진핑이 김대중보다 거의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컸다.

시진핑의 얼굴 자체도 극히 강하고 담대하고 냉철한 인상이다. 지적 능력도 대단하다. 그런데 저 덩치까지 보니 솔직히 기가 질리는 느낌이다. 대단한 역량과 파워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후진타오는 매우 온유하고 타협적인 성향으로 보이는데, 시진핑은 정반대 스타일이다. 중국은 시대적으로 자기들에게 주어진 과제에 따라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이라도 있는 걸까? 후진타오가 미국과 전세계 국가들과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시진핑은 이제 강하게 대결하는 역할도 서슴치 않을 그런 인물 같다.

앞으로 한중관계 또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를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 '격랑(激浪)'이라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