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의에 따르면 경험은 의식과 대상과의 만남의 산물이다. 가다머는 이와 관련하여 헤겔을 인용한다. <의식에 대한 앎과
의식의 대상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운동은 이로부터 새로운 진정한 대상이 생겨나는 한에 있어서 본래적인 의미의 '경험' 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에 따르면 경험은 항상 의식의 전도 혹은 재구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전도시키려는 경향의 근저에는 부정성(negativity) 의 요소가 놓여 있다. 경험이란 무엇보다도 <아님>에 대한 경험이다.
즉 경험 대상은 우리가 가정했던 것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경험된다. 우리의 경험 대상은 서로 다른 빛에서 조명되고 변화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변화된다. 새로운 대상은 낡은 대상을 지양한 진리를 담게 되는 반면에 낡은
대상은 <새로운 대상의 시간에만 기여할 뿐이다.>


 (중략) 가다머는 말한다.


 ...경험은 예견과 기대에 바탕을 둔 다양화된 환멸의 문제이다.
경험은 오직 이런 식으로만 획득된다. 경험이 고통스럽고 유쾌하지
 못하다고 해서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의 고통과 불유쾌함을 통해 우리는 경험의 내적 본성을 알게 된다. 
                                                                                                                                              (가다머 '진리와 방법'에서 재인용)


...부정성과 환멸은 경험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리차드 팔머, 이한우 역.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284-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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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멸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철저하게 자기 회귀적이며, 자기 냉소적이다. 환멸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는 되돌리지 못할 형태로 파괴하기 때문에, 그 끔찍한 파괴의 흔적이 구제 받지 못하는 경험들로 되어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인간은 구제받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에 의지하면서 산다. 죄의식의 깔끔한 속죄로 이것이 깨끗히 청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함이란! 자신을 철저히 환멸할 때까지 떨어져 본/ 혹은 자신을 떨어뜨려 본 인간은, 그러므로 두 종류이다. 자신 안에 최고의 청산 감각- 특히 죄의식에 대한- 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환멸에 대한 미래감각을 가진 자이거나. 즉, 벌써부터 환멸을 앞으로 다가올 자기 운명의 징조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이거나.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심연 위에서 더 깊은 곳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어둠의 이카루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환멸의 이카루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