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거사 한분이 문중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시대 기호학파등을 인용하면서 오류가 있어서 이참에 글을 쓰려다 잘 정리된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선 중기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탄생과 갈등 

 http://blog.naver.com/js1440/80063291998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탄생 배경

 

16세기 이황과 이이의 탄생은 조선조 문벌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 이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 기론 기치를 높이 들고 각기 문호를 성대히 열면서 각각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 동족마을을 형성했다. 이들 동족마을은 현자 (賢者)들에 의해 각자 문호를 열고 명성을 얻어 자연스럽게 문벌을 형성해 나갔다

 


기호지방에서는 이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사류들 간에는 학파와 문벌의 차이가 있었고, 이황과 이이의 ‘이기이원론’ 즉 주리론과 주기론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예학으로 꽃피운 기호학파의 종장 사계 김장생의 문벌로 발전하게 된다

기호학파는 이이 이후 성혼 송익필 중심인물이며, 종장 사계 김장생에 이어 신독재 김집, 노서 윤선거, 명제 윤증 같은 뛰어난 후진들이 남긴 예학의 선비정신을 면면히 계승하며 이후 노소, 신구 간의 갈등은 동서로 분열하고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학문적 주장과 함께 정치적 주장을 달리해왔다.

 


한편 16세기 초반에 일시 조정에서 활동한 조광조는 한양 사람이었지만, 영남 사림파의 학맥을 이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6세기 후반, 선조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림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관료로서 조정에 대거 진출하게 되는데  그 사류의 주류를 이루기는 이황의 후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이 많았다.,

 


  영남학파는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로서 그 대표적 인물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탁(鄭琢), 우성전(禹性傳)은 이황의 문도이며,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은 조식의 문도였다. 양 문하에 모두 출입한 인사도 있는데, 김우옹, 정구(鄭逑)가 이에 속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모두 동인의 인물들이다.

  박순(朴淳), 심의겸(沈義謙), 정철(鄭澈), 윤근수(尹根壽), 송익필(宋翼弼) 등은 성혼과 이이의 사상을 흠모하는 자로서 서인의 중심인물들이며. 김장생, 조헌(趙憲), 이귀(李貴), 안방준(安邦俊), 정엽(鄭曄) 등이 이이의 문도들이다  

 

 


기호학파의 전개

 


기호학파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에 대립되는 말로, 유학자들의 철학 유파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이李珥를 조종으로 하여, 성혼·송익필이 중심인물입니다. 이들은 학문에서 서로 대립적인 논변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견해가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학들이 이들 세 스승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학파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이 뿌리를 내린 고장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포함합니다. 동쪽은 관동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관서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호남지방과 경계를 이루었습니다.  

 

기호학파에서 배출한 인물로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장생, 정엽, 한교, 이귀, 조헌, 안방준, 송시열, 권상하 등입니다. 이들을 분당의 당쟁과 관련하여, 기호의 서인이라고 합니다.  

 

송시열 이후에 권상하·한원진·이간·김창협·김창흡·김원행 등이 학파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이(李珥)는 <이기설>을 내세웠는데, <주기적 이기설>, 혹은 <불교적 이기설>, <도교적 이기설>이라고도 합니다. 그의 설은 <정주성리학>에서 출발하여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설을 담고 있는 저술이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과 <순언醇言>입니다.  

 

철학적 전제로서의 본질은 일원적 본원성에 있다고 말합니다. 양면성이 있다고 하여도,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원적 본원성本源性에 속한다고 보았습니다. 李珥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있어서, 원초적 작위인 발發이 이원二元일 수 없으며, 이기理氣가 서로 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發의 속성을 오직 氣에만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다 같이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형체와 작위가 없는 것(無形無爲), 기는 형체와 작위가 있는 것(有形有爲)이라고 하였습니다.  

 

송시열은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지어 이이의 말을 고증하려 하였습니다.  

 

영남학파의 이현일은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를 주기파 또는 기학파라고 불렀습니다. 

 

 

기호학파의 학맥과 발전 

 


기호학파는 이이의 수제자 김장생(1548~1631)이다. 그의 호는 사계(沙溪)인데, 예학에 조예가 깊어 저술이 많았다. 성리학은 오로지 이이의 학설을 따라서 이황의 호발설을 비판하고, 이이의 학설이야말로 깨뜨릴 수 없는 정론이라고 칭송했다.

 


당시 이황의 후학으로 김장생과 필적할 만한 이로 정경세(鄭經世)가 있었다. 유성룡을 통하여 이황의 학문을 전수받은 정경세는 김장생과 편지를 통해 퇴계·율곡 두 학자의 격물설 토론을 통해 이이의 학설을 ‘기록의 잘못이리라’고 했으며, 김장생은 이황의 학설을 ‘분명치 못할 뿐 아니라,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두 학파의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각파의 학자들이 조술을 더할수록 비판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김장생과 김집 부자의 문하에 송시열(1607~1689)이 있다. 우암(尤菴)이라는 호로 불린 송시열은 이이-김장생의 학설을 이어 받아 특히 이황의 호발설에 대한 비판이 철저했다.

 


그는 “주자어류에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고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다.’라 한 것이 있는데, 퇴계가 평생 주장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라 하여 이황의 학설이 오류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한편 나아가 “주자의 이 말이 혹시 기록자의 실수인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여 이황이 근거로 삼은 주자어류의 원전이 오류라고까지 주장한다.

 


송시열은 당시 서인을 대표하는 산림학자로서 북벌을 도모하던 효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조정에서 권위가 매우 막강했다. 이 때문에 학파적 이론을 달리하는데다가, 당론의 와중에 휩쓸려 예송 문제와 관련해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하다가 결국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다시 관작이 회복되고 그 스승 김장생, 김집과 함께 문묘에 배향됐다.

 


송시열의 문인 가운데 학술과 문학이 걸출한 이로 윤증이 있다. 그러나 당쟁의 와중에 송시열과 사제의 의리가 끊어져 구수가 되었다. 송시열의 학통은 여러 제자 가운데,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1721)가 계승했다. 수암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그의 학통을 계승한 이는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1751)이다. 한원진은 권상하 문하의 동문들 사이에 벌어진 인물성동이론을 시종일관 주장한 결과 권상하의 인가를 받아 그 적전이 되었다. 인물성동이론은 다음에 상론하기로 하며, 한원진은 또한 스승의 위촉을 받아 송시열 이래의 숙원이었던 ‘주자언론동이고’를 완성한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2 영남학파  

 

 

영남학파는 기호학파에 대립되는 말로, 유학자들의 모임인 철학 유파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 전기에 김종직이 영학파를 열었고, 중기에 조식이 남명학파, 이황을 종주로 하는 토계학파, 장현광을 중심으로 하는 여현학파가 일어났습니다.   

 

영학파는 고려의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학맥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정치, 경제, 법률,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실제적인 학문인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하였습니다.  

 

이 학파에서 정여찬, 김굉필이 나와 도학에 정진하여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정여찬은 중용을 연구하였고, 그에게서 주리설(主理說)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으로서 학문의 목표를 삼고 존양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습니다.  

 

김굉필의 학통은 조광조 김안국으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성수침. 성혼 부자에게 이어졌습니다. 김안국의 학통은 김인후에게 이어졌습니다.  

 

조선 중기에 영남우도에서 조식을 따르는 남명학파가 생겼습니다. 이 학파에서 오건, 김우옹, 정구, 최영경, 김효원, 곽재우, 정인홍, 정탁, 하항, 하진 등이 나왔습니다. 이 학파는 반궁체험(反窮體驗), 지경거의(持敬居義), 충신진덕(忠信進德,) 독행수도(篤行修道)를 학풍으로 하였습니다.  

 

이 학파는 조식의 영향을 받아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척하고 실천궁행으로 학문과 덕행을 쌓아갔습니다. 기절(氣節0과 의리를 숭상하였습니다. 학식은 대학과 중용에 밝았습니다.  

 

영남좌도에서 일어난 이황의 문하를 퇴계학파라고 하였습니다. 이 학파가 기호학파와 쌍벽을 이룬 학파입니다. 이황의 문하에서 출사한 이가 많았습니다. 조목, 기대승, 김성일, 유성룡, 남치리, 이덕홍, 황준량, 권호문, 김륵, 홍가신, 정사성, 김사원, 유중엄, 조호맹, 박광전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사칠이기분대설四七理氣分對說>, <물격설物格說>을 지지하고 옹호하다가 주리설主理說로 발전하였습니다.  

 

이황의 철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와 기는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음)인데 , 이를 이물二物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일 뿐이고, 기는 기일 뿐이라는 이자이기자기(理自理氣自氣)를 내세웠습니다.  

 

이황은 이와 기에 실질적인 작용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이발이동(理發理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理인 태극에 스스로 동정動靜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황은 이에 가치를 부여하여, 理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氣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였습니다.  

 

장현광을 중심으로 여헌학파가 생겨났습니다. 장현광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설氣發理本說>을 내세웠습니다. 그는 이와 기를 이불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학파에서 김응조, 전식, 유진, 조임도, 노형필, 신적도, 정극후, 선우협 등이 나왔습니다.

 


영남학파의 학맥과 발전

 


이황의 후학들 가운데, 학문을 후학에게 전수하여 근대에까지 이른 이는 김성일과 유성룡, 정구 세 사람이다. 이황을 가까이 모시기는 조목이 가장 오래 되었고, 도산서원의 이황 신위에 배향되기는 조목 한 사람 뿐이지만, 학문의 전수가 지속되지를 못했다. 이 중에 김성일과 유성룡은 안동에 뿌리를 둔 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높은 직위에 올랐고,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후학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성주 출신 학자 정구는 이황과 조식 양 문하에 모두 출입했으나, 뒷날 조식의 문인 정인홍과 불화하면서 이황의 연원에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된다. 유성룡의 학문은 앞에 기술한바 김장생과 논변한 정경세에게 전수되었고, 정경세의 학문은 유성룡의 아들, 유진(柳袗)을 거쳐 유원지(柳元之)에게 전해졌다. 정경세(1563~1633)는 인조반정 이후 영남의 남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학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특히 예론에 밝았고, 이러한 그의 학문은 유진을 거쳐 유원지에게 이어졌다.  


유원지는 이른 바 기해예송에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하는 영남남인소(嶺南南人疎)가 있을 때, 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학자였다. 유원지의 학문은 다시 정경세의 손자인 정도응에게 전해졌고, 이 학맥에서는 근대에 유심춘과 유주목이 배출한다. 그들은 모두 유성룡의 후손들이었다. 대체로 유성룡의 학맥은 풍천의 하회와 상주를 중심으로 계승됐으며, 하회는 유성룡의 후손들의 집성을 이루고 있으며, 상주는 정경세와 유진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김성일의 학문은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형제에게 전해졌다.  


장흥효와 이휘일은 일생을 처사로 지냈으나, 이현일(1627~1704)은 산림으로 국가의 초빙을 받아 숙종 초기에 일시 사환하여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당시 서인과 근기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는 사이에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가 이현일이다. 이현일은 송시열이 이황의 학설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했던 인물로서“ 율곡이씨 논사단칠정서변”을 지어 율곡의 이기설을 축조 비판했다.  


이이의 성리설에 대한 이현일의 비판은 영남 유학자로서 본격적으로 가해진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현일은 “퇴계 선생의 사단칠정에 대한 설명은 백세후에라도 의심이 없으리라”고하여 퇴계설을 적극 지지하고, 이어서 “율곡이 이것을 의리불명이라고 비판하여 이기호발이 잘못이라 하고서 전고에 불명한 것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그 문화의 학도들도 이를 전술하여 마음대로 주장한다.”고하여 퇴계학설을 비판한 이이와 그 후학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이현일은 360여 명에 달하는 문도들을 배출했으며 그의 학문은 그 아들인 이재(李栽), 1657~1730)에게 이어졌다. 그의 이기사칠론은 부친에 이어 퇴계 학설을 준수한다.  


이재의 학문은 다시 이상정(李象靖, 1711~1781)에게 전해졌으며, 그는 이재의 외손이었다. 이상정의 학문은 남한조(南漢朝)를 거쳐 유치명(柳致明)에게 전수됐다. 유치명의 학문은 김도화·김흥락에게 전해졌으며, 김흥락은 김성일의 후손으로서, 김성일에서 김흥락에 이르기까지의 학맥은 모두 안동지역의 지연과 혈연 중심으로 전수된 퇴계 학설의 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리공론의 철학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는 우리 역사에서 철학유파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학문이 심화되고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철학 유파가 공리공론에 빠져서, 철학이 철학자들만을 위한 학문으로 머물렀다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가 이룩한 철학 유파는 당시에 양반이라는 유한계급이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참 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늘메신문 글 김학용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