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개론

요즘 우리나라 진보 진영에 유령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바로 국개론이다. 이른바 '국민이 개XX' 라는 자조적인 신조어다. 아마도 서민들이 자기 이익은 팽개치고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당을 지지한다거나, 수도권 이기주의나 영남지역주의처럼 탐욕에 기반한 투표를 한다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정치에 아무 관심조차 없는 현상을 통털어서 비난할 때 쓰는 말로 알고 있다. '민중이 넋이 주인되는 세상' 에서 '국민이 개XX인 세상'으로 바뀌는데 불과 20여년 밖에 안걸렸으니,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고 상전벽해라 하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국개론 논쟁의 뿌리는 매우 깊다. 아마도 150여년전 독일의 페르디난트 라살이 '노동자들에게 비밀 평등선거가 완전하게 보장된다면, 폭력 혁명이 아니더라도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라살의 그런 생각을 부르주아에 타협하는 종파주의로 비난했지만,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비추어도 쉽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선거에서 노동계급의 정당에 투표를 할 것이고, 그러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쟁취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거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그래서 사실 라살의 생각은 마르크스의 수제자들도 딱히 반박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레닌이 혁명 성공 후에 자신만만하게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선거를 실시했다가 패배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설마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시 역사상 최초의 국개론자는 레닌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볼셰비키당을 냉담하게 외면한 노동자 농민들을 향해 레닌은 아마도 속으로 개XX들이라고 욕 좀 퍼부었을 것이다. 아뭏든 그 사건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후로 소련에서 민주적인 선거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전통은 북한을 비롯한 모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어받았다.  

모택동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우가 막 대장정을 끝내고 연안에 입성한 모택동을 인터뷰할 때, 모택동이 미국의 정치제도와 선거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노우에게 이것 저것 캐묻던 그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비밀 평등선거를 보장받고 있음에도 사회주의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몹시 고민하면서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모택동 역시 미국의 그런 노동자들을 향해 속으로 개XX라고 욕을 했음직 싶다. 

라살의 구상이 현실에서 실현된 것은 그 후로부터 무려 120여년이나 지난 남미의 칠레에서였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건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에 맥없이 권력을 물려주어야 했지만. 아뭏든 그 전까지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은 민주적인 비밀 평등 선거에서 단 한차례도 승리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선거때마다 패배하면서 얼마나 절망하며 노동자 농민들을 향해 개XX라고 욕을 퍼부어댔을 것인가.

어쨌든 라살의 구상은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결합하여 이후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념이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고, 이후 유럽 선진국들이 복지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민주의 정당들은 애초에 라살이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선거를 통해 노동계급의 정당이 집권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거였기 때문이다. 라살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민주의 정당들은 혁명 노선을 버리고, 마르크스 이론을 버리고, 부르주아 정당들과 타협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긍정하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나서야 겨우 노동자 농민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고, 집권도 할 수 있었다. 

사실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선거를 통해 진정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해줄 것으로 인정한 계급정당은 볼셰비키도 아니었고, 모택동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사민주의 정당들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노동자들이 가장 행복과 풍요를 누리며 살았던 국가는 소련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었고 사민주의 정당들이 집권했던 유럽의 복지국가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거때마다 자신들에게 냉담한 노동자들을 향해 개XX라고 욕을 해대던 사람들은 역사의 패배자였고, 부르주아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며 갖은 비난을 들어야했던 노동자들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을 한거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에게는 해묵고 골치아픈 숙제가 있다. 자신들은 노동자 서민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지극 정성으로 받드는데도, 정작 그들은 먼발치서 냉담하기만 한 어이없는 현상. 아마 그들의 수준에서 그런 현상을 쉽사리 이해하는건 정말 힘이 들 것이다. 이것은 진보정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노라고 목놓아 외치는데도 서민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중산층들은 뉴타운이니 뭐니 하면서 본인들 이익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민주당 역시 그들을 절대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결국 그렇게 고민하다가 마침내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국민들이 개XX라서 그런거라고. 

그런데 되묻고 싶다. 국개론을 떠드는 그 사람들은 대체 선거라는 것을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선거는 오로지 국민 각자가 자신들의 욕망을 사회를 향해 표현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냉정하다. 대형마트에 수없이 진열된 상품들을 쇼핑하는 소비자들보다 더 냉정하게 고르고 골라서 자신의 한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도장 찍는 행위에는 각자의 적나라하고 솔직한 욕망만이 반영될 뿐이다. 한나라당을 찍는 어떤 서민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해가 안된다고?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이득이 되기 때문인건데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그 냉정한 계산앞에서 그 어떤 선의도 도덕도 발붙일 곳이 없다. 이 세상에 이타적인 투표행위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물론 투표장의 그 작은 욕망들이 모이고 모여서 거대한 탐욕으로 변신할 수 있다. 개XX소리가 저절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의도하지 않은 탐욕들마저도 스스로 교정하면서 전진해온 위대한 진보의 역사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입에서 개XX 소리가 나오거들랑 얼른 손털고 차라리 한푼이라도 더 벌 궁리를 하는 것이 인생살이에 더 현명하고 사회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이 얼마나 허접했으면 그 서민 그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나라당에 한표를 찍고 돌아서겠는가? 그 참담한 심정을 느끼고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것이다. 그 작고 아름다운 욕망들을 진보로 이끌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우선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그 욕망들이 모여서 탐욕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거대한 탐욕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진정한 이득이 되라는 것을 정치와 정책으로 설득하고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투표장의 그 냉정한 욕망들이 한국 사회를 순식간에 바꿔줄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권 어느 뉴타운에, 반공과 지역주의를 떠드는 영남의 어느 별볼일 없는 도시에, 스펙쌓기에 골몰하는 어느 대학의 도서관에, 야근과 철야로 밤새우는 어느 회사의 사무실에, 어느 귀족노조 조합원의 머리에 둘린 빨간 머리띠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취방에, 수매가에 시름하는 어느 호남의 농촌 마을에, 밤 12시에 학원마치고 집에 오는 어느 청소년의 어깨위에 있다. 그곳에서 얼핏 탐욕스런 개XX 같아 보이는 시민들의 정당한 욕망들을 발견해내고 끌어내지 못하면, 우리나라 진보에는 희망이 없다. 

==== 4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