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대통령 서거에 부쳐
그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할 사람이 없어서 안타깝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감동의 인간 승리의 주인공

인간은 어차피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법.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극적 서거가 생명을 단축시켰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보기 드문 好喪처럼 느껴진다. 현 정권과 시국에 대한 감정적 앙금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음껏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중의 인생은 위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다. 자식들에게 흥미진진하게, 또 자랑스럽게 얘기하기에 정말 좋은 인생이다.
김대중의 20~30대는 웬만한 젊은이라면 비관 자살이라도 할법한 지독한 불운으로 점철 되었다. 1954년 민의원 선거, 1958년 총선, 1959년 보궐선거, 1960년 5대 총선(4.19 직후라서 민주당이면 개나 소나 다 당선됐다)에 내리 낙선했다. 이 와중에 첫째 부인과 여동생을 잃고 가산조차 탕진했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에서 드디어 4전 5기 끝에 당선됐으나 그 사흘 후 일어난 5.16쿠데타로 인해 취임 선서도 못하였다. 결국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되어 겨우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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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국회에서 발언하는 김대중 의원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1년 교통 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이 때 운전사는 사망하고 자신은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불구가 되었다), 1973년 현해탄 수장 시도, 투옥-가택연금-사형 선고-무기징역으로 감형-사실상 미국 추방-정계 복귀-통일민주당 분당-1987년 낙선과 1992년 낙선-정계 은퇴와 번복, 그리고 3전 4기 끝에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이인제의 출마에 힘입은)대통령 당선, 이어 외환위기 극복, 국가 구조 개혁(4대 개혁), 생산적 복지, 남북정상회담, 노무현 정부 탄생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은 감동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장엄한 일몰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분노와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폭풍을 일으켰다. 삶에 대한 질긴 집착조차 끊어버리고 역사의 祭壇에 몸을 바친 행위는 가슴 저 깊숙한 곳을 숙연함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찬란하고 장엄한 일몰을 보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 빛과 열을 발산하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 태양이기 때문이다. 일몰 직후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이 아름답듯이, 김대중과 함께 민주, 개혁, 진보, 평화, 복지를 추구하던 인생들이 아름답다. 김대중과 함께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복되고 위대하다.


울 때 울어주는 정치인, 공감할 줄 아는 정치인

나는 지난 5월 29일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힘겹게 스스로 헌화를 하고 난 후, 권양숙 여사 손을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그를 기억한다. 5월 28일 서울역 광장 분향소를 찾아서 조문을 마친 뒤 “노 전 대통령이 받은 치욕•좌절•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단을 할 것 같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결에 대해 이보다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공감을 표한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혜안을 가진 정치인

김대중은 1954년 용산에 노동문제연구소를 냈다. 노동운동 평론가로 자처하면서 월간 ‘사상계’ 등에 글을 기고하곤 했다. 1950년대 중반이 어떤 시대인가? 일제치하와 해방공간에서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던 좌파들이 거의 다 참혹하게 죽거나 투옥되거나 월북한 시절 아닌가? 그래서 노동문제나 노동운동을 논하면 빨갱이 취급 받던 시절 아닌가?

사실 나만 하더라도 1980년대 초 띨빵한 나를 꼬드겨 학생운동에 밀어 넣어준 고마운 선배들이 있었다. 캠퍼스 분위기 자체가 데모와 불온(?) 서클 활동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노무현만 하더라도 30대 후반에 그를 깨어나게 하고 이끌어 준 부림 사건과 부산 운동권과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김대중에게는 그를 끌어 주고 밀어주는 선배도 사회 분위기도 없었다. 선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용케 살아남아,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혁명 노선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뿐이었기에 참다운 선배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한 30대 초반의 김대중의 행보는 역사의 큰 흐름을 뚜렷이 의식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보라고 보아야 한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김대중의 관심과 기대는 1963년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로 나타났다. 노동조합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1998년 대통령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4대 개혁(기업, 금융, 공공, 노동)을 추진하면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되었다. 4대 개혁 과정에서 발전노조 파업, 대우자동차 해외매각과 정리해고, 금융기관 구조조정(폐쇄, 통폐합, 인력 조정), 전교조 합법화, 민주노총 합법화 등이 있었고, 진보좌파는 이를 기화로 김대중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고, 주 타격방향으로 삼았다.

국외에서 김대중과 비슷한 경로를 걸어간 사람은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이다. 김대중보다 1년 먼저 태어난 리콴유(1923년 생)는 1954년 노조지도자와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하고-그래서 색깔론 시비에 시달렸고 영국 식민 정부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55년 선거에서 국회의원(입법평의회 의원)에 당선되고, 1959년에 집권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과 노조와 크게 충돌하였다. 1940년대 말 영국에서 근 4년간 유학생활을 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30년 넘게 통치했으나, 결국 가부장적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대한민국보다 조금 더 풍요롭긴 하지만…… 그러나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싱가포르 보다 훨씬 발전 잠재력이 높은 국가를 만든 것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중경제론’을 펴냈다. 이는 박현채.임동규가 내용을 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사실 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녹여내어, 지식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경제 발전론 이자 국가 개조론을 펼친 정치인이 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 지혜를 총화 한 경제.사회 발전론과 총체적 국가개조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외주를 주든 직접 쓰든 이를 완전히 체화하여 경제.사회 구조 개혁을 논하는 정치인이 절실한 상황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의 내용을 깊이 숙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과문해서인지 현실 정치인 중에서 지적으로 김대중에 근접하는 정치인이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위대한 변절자

나는 1998년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해설서인지 모르겠다)을 접하고, 그것이 1980년대 공부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 개혁의 방향은 틀림없이 사회민주주의 내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을 근간으로 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당시 대우자동차 부평 기술연구소 과장(선임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김대중 기업 개혁의 파트너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6,500명의 사무기술직을 포괄하는 직선 사우회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1998년~2001년 사이에 이루어진 기업, 금융, 노동, 공공 개혁의 기조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대중경제론/민족경제론의 체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박승옥도 이렇게 썼다.

“1997년 이후의 김대중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수정 증보한 것이 결코 아니라 철저하게 배신했다” (박승옥 DJ '대중경제론'은 박현채 작품" 프레시안, 2005-07-12)

당연히 대우자동차는 일찍부터 해외매각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런데 몇 년간 열심히 활동하면서 보니 사무기술직조차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깨어있는 이익집단이 아니었다. 힘만 없었을 뿐 사고방식이나 행태가 생산직 노조와 다를 바 없었다. 오래지 않아 내가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 개혁의 철학, 가치, 이념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국인의 성정, 문화와 불편한 진실이 수두룩한 사회 운영 메카니즘도 살펴보고, 세계화와 지식정보화의 의미도 살펴보면서 대통령 김대중의 극적인 변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도 사민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미몽에서 확실히 깨어났다.

사실 1990년대 후반, (1980년대) 운동권 물이 덜 빠진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잘 맞는 정치적, 정책적 행보를 하는 정치 지도자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수상이었다. 그래서 나도 잠깐이나마 마하티르 팬이었다.(운동권 물이 거의 안빠진 사람들에게는 반미를 외치는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적, 정책적 행보가 정서에 가장 잘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비교하면서, 또 마하티르와 김대중의 성장 배경을 비교하면서 김대중이 빼어난 통찰력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변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김대중은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꿰뚫고, 대한민국의 생존.번영의 조건을 정확히 간파하여 과거의 고정관념(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류)을 창조적으로 파괴했고 나를 이를 지지한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과 대우자동차와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나의 지적 스승이다.

나는 기업, 금융, 공공 부문에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대거 도입하고, ‘생산적 복지’의 기치아래 사회안전망을 대폭적으로 강화하고, 정보통신 산업을 일으킨 김대중의 정책기조가 큰 틀에서 옳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이 김대중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열심히 달려간 것도 큰 틀에서 옳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요 은행과 기업의 지분이 외국인들에게 너무 많이 넘어가고, 해외 변수(외국인 투자자)에 너무 취약하고, 신용카드 대란, 부동산 대란, 양극화, 청년실업, 비정규직, 사교육, 공공부문으로의 인재 쏠림 등 무수히 많은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한국이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노선의 엄청난 폐해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대한민국과 민주.개혁.진보 진영과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정책적 오류를 과감히 시정할 줄 아는 위대한 변절자였다. 하지만 민생과 민주주의와 민족 화해.협력에 대한 초심은 바꾸지 않았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정책적으로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대중을 변절자로 비난한 사람들이 진짜 변절자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김대중을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 취급하던 좌익활동가들(1950~60년대)도 있고, 김대중을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취급하는 진보좌파들도 있다.


아쉬운 안목

김대중은 1970년대 걸음마 단계이던 재야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옹호했다. 이는 당시로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또 이 때문에 군부 등 보수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비토를 받았다. 이런 긴 역사성 때문에 당시 재야민주화 운동의 주류는 1987년 이후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김대중은 이유야 어떻든 재야민주화 운동 세력을 끊임없이 수혈하였다. 동시에 전문가 세력도 정당에 끊임없이 수혈하였다. 총학생회장 출신 386을 주도적으로 수혈한 사람도 김대중이다.

김대중의 수혈에 대해 수많은 비판이 있다. 김대중 때문에 한국의 진보와 개혁이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한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신진 정치세력을 발굴하고, 기회를 주고, 키워내는 정치인이 김대중 말고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솔직히 한나라당은 정치 후세대에 대한 육성적 관점이 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보개혁 동네에서는 정치 후세대를 생각하는 안목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하나같이 자신의 눈앞의 정치적 이익과 생존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이라는 모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진보개혁 동네는 김대중 보다 역사적, 정치적 안목이 더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대중은 1960년대 후반, 이철승,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해 보아서 인지, 2007년, 진보개혁의 지리멸멸 각개약진의 시대에 386 정치인들이 패기 있게 치고 나와서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386 정치인들은 그 누구도 이 주문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김대중이 2007년 당시 386 정치인과 같은 위치였다면, 확신컨대 2007년의 그 지리멸멸한 꼴은 연출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聖과 俗을 참으로 잘 조화시킨 정치인

김대중은 동교동계라는 조직을 거느렸다. 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서슬 퍼런 집권세력의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돈과 관련하여 김대중의 쫀쫀한 일화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인간들도 많이 거느렸다고 알고 있다. 나름대로 조직 운영에는 쓰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은 재야, 시민운동, 학계, 종교계, 노동계, 문화계, 경제계 등 다양한 분야 인사들과 교류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배려하고 활용하였다. 이는 거대하고 복잡한 국가경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한국 정치와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진보개혁 동네에서 그 누가 김대중과 같은 강력한 ‘정치 사단’을 거느리고, 또 다양한 분야의 인맥을 만들어나가는지 알지 못한다. 어찌 보면 김대중은 장사꾼이자, 속물이자, 마키아벨리스트이고, 어찌 보면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이상적인 정치인은 원래 절반은 장사꾼이고 절반이 목사/스님이라면 김대중은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진보개혁 동네는 노무현의 위대한 유산뿐 아니라 김대중의 위대한 유산도 제대로 승계하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깝다.

대한민국과 진보가 길을 잃고 헤매고, 문명이 총체적으로 후퇴하는 듯이 느껴지는 통에 위대한 길잡이에 대한 아쉬움이 왜 없겠냐 마는, 그래도 ‘恨’과 감정적 앙금을 억누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민장은 영남이든 호남이든,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국민 다수가 머뭇거리지 않고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는 호상이다. 대한민국은 몇 십 년 내에 지폐에 들어갈 지도 모르는 위대한 현대사 인물 하나를 얻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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