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하게 썼기 때문에 글이 다소 두서가 없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
최근에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주 부톤 섬 바우바우 시에 있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로 한글이 채택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한글의 ‘세계화 1호’ 해외서 공식 표기 문자로 채택) 이는 분명 경축할 만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례만으로 '한글'이 '세계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의견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입니다.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언어들(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말레이어와 자바어, 순다어 등과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일로카노어 등)은 모음 구조가 단순해서 대체로 아, 이, 우, 에, 오 등의 기본 모음밖에 없습니다. 3-6개 정도의 모음만 사용하죠.(타갈로그어는 좀 극단적인 경우로, 외래어를 배제한 순수 타갈로그어의 경우 모음은 단 3개-아, 이, 우- 뿐입니다. 현대에는 외래어 등을 표기하기 위해 에, 오를 추가해서 현재 5개의 모음을 씁니다.) 또, 이들 언어는 연속자음군이 별로 없습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어의 경우 표기상 연속자음은 'ng', 'sy', 'ny', 'kh'의 넷 정도뿐인데, 음성학적으로 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표기법상' 두 문자로 나타낸 것일 뿐 단 하나의 자음입니다. 즉 인도네시아어의 경우 일부 외래어를 제외하면 연속자음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당연히, 찌아찌아어 역시 이러한 음성학적 특질들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이들 언어는 음절 문자가 아닌 이상 현재 주로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표음 문자(알파벳, 키릴 문자, 아랍 문자, 데바나가리 문자, 태국 문자 등)를 사용해도 만족스럽게 표기가 가능한 언어입니다. 한글이 익히기 쉽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강점을 보일 곳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한글로 (이런 표기가 쉬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할 때 생기는 문제점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음절 단위로 모아써야 하는 한글이 타 언어를 표기하는 데 가장 난점이 되는 부분이 연속자음군인데, 특히 게르만어와 슬라브어 등에 연속자음군이 많습니다.(스트르치 프르스트 스크르스 크르크 참조. 여기서 r은 음절적 자음(syllabic consonant)이므로 이 문장은 4음절입니다.) 그런데 한글에서 음절을 구분하는 데 구분이 되는 단위는 모음이기 때문에 한글로 이런 연속자음군을 제대로 음절별 표기를 하려면, 모음 중심으로 모아써야 하는데, 그러려면 괴상한 겹자음군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풀어쓰기를 하든가. 이런 난점 외에도 타 언어에서 한글의 모음에 할당되는 조음위치의 상위함 문제도 존재합니다. 같은 모음이라고 인식하는 경우에도 모음 사각도 같은 걸 그려보면 묘하게 위치가 다른 경우가 있거든요. 자음의 경우 파찰음, 치경음 같은 경우는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할 때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쓸데없는 발음 규칙을 추가해야 할 필요도 생겨 버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직 자질문자이기 때문에 한글을 좀 좋게 보는 정도이고, 그 외의 '장점'은 사실상 별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순수히 언어학적인 견지와는 별개로, 찌아찌아족이 처하게 될 사회언어학적 상황 역시 조금 우려가 됩니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정식 국어는 알파벳으로 표기되는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네 언어와 매우 유사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면서 표기법이 다른 데 대한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코딩이나 출판 체계가 완전히 다른 한글을 들여오면서 새로운 문학 저술이 자생적으로 생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중등학교 수준 교과서와 참고서 등의 충분한 인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아마 인도네시아어에서 번역해 오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알파벳으로 타이핑하면 약간의 철자만 바꾸어도 될 것을 한글로 타이핑하기 위해서는 전체 코드를 갈아엎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투자는 시간 낭비, 자금 낭비, 재원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런 것을 할 시간에 알파벳으로 찌아찌아어를 보급하는 세계적 단위의 캠페인을 조성하고, 국내에서 사실상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는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언어의 언어학적 연구에 자금을 투자하였더라면 더욱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에는 일본어와의 유사성도 종종 지적되는 언어들이 많은데, 이런 부분을 둘러보면 연구의 중심에 언어를 놓을 수 있는 일부 인류학이나 고고학(고대 동남아시아인들의 해양 진출에 관해서, 라든지. J.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보면 관련 언급이 좀 나옵니다.) 분야에서 적어도 '무턱대고 한글을 보급하는 것' 보다는 우선순위를 앞에 둘 수 있는 과제들이 아직도 산더미같이 쌓여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당장 시급한 것은 한글의 국제화 따위 공상적 기획보다도, '한국어'의 문화적, 지적 위상을 높이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이 분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도 과대선전의 기미가 상당할 뿐더러 그다지 문화적 영향력도 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일본문화 전면개방 후 한국의 문학 시장은 일본 문학에 상당 부분 침식당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계는 인터넷 불법공유 환경과 겹쳐서 이중타격을 받아 거의 고사상태에 빠졌지요. 서점에 가면 장정, 서체 등 외적요인은 꽤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고급 연구서는 별로 찾아보기 힘든 실정은 여전합니다. 심지어 연구의 기초가 될 번역서들도, 대학 학부 수준 정도를 넘어서면 볼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지적인 유행을 타기 쉬운 몇몇 분야에 번역이 집중되는 정도에 그치지요. '번역사업'이란 걸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출판업자나 학자들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프라부터 재정비하지 않고 무턱대고 '한글' 만을 수출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p.s.
여담입니다만, 최근에 위키피디아 프로젝트에서 부동의 1위의 문서량을 자랑하는 영어 위키백과가 드디어 300만 문서를 돌파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2-5위를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문서량일 뿐더러, 깊이 척도 역시 영어가 압도적인 1위입니다.) 반면 한국어의 위키백과엔 이제 겨우 10만 9천 개 정도의 문서밖에는 없습니다. 남한의 총 인구수와 비슷한 사용인구를 가진 폴란드어가 60만 개를 넘는 문서수로 4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략 남한의 1/3, 1/2 정도 사용인구밖에 없는 스웨덴어와 네덜란드어가 각각 32만 6천, 55만 4천 개 정도의 문서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터키어조차 13만 4천 개 정도의 문서량으로 한국어를 앞질러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 위키백과의 경우, '알찬 글'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영어나 일본어에서 옮겨온 번역 문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학술 관련 분야의 경우 주석을 뒤져 보면 대부분이 외국 서적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위키백과의 언어간 비교가 지적 영향력의 비교에 그렇게 엄정한 척도로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어의 경우는 다른 언어들과 비교시 아직 너무 부족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어 보입니다.

Sicut erat in principio, et nunc, et semper,
et in saecula saecul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