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이렇게 보면 나는 이내, 내가 비록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도무지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아예 약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나의 거짓 둘러대기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장차의 행위에 대한 나의 의지를 거짓으로 둘러대 보았자 그것은 헛일일 터이고, 또 혹시 그들이 그걸 성급하게 믿는다 해도, 그들은 똑같은 화폐로 내게 되갚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준칙은 그것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자마자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욕이 윤리적으로 선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만 할 것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무런 자상한 통찰력도 필요하지 않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 경험이 없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도, 나는 단지 자문하면 된다. “너 또한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가?’ 하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준칙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도, 그로부터 너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생길 손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 수립에서 원리로서 적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96쪽, 백종현 옮김)

 

 

 

 

 

이분법적 사고
 

여기서 거짓말은 거짓 약속을 뜻한다. 참된 약속이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지킬 것을 스스로 마음 속 깊이 맹세한 약속이다(남에게 맹세하느냐 여부는 상관 없다). 거짓 약속이란 때에 따라서는 약속을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는 약속이다.

 

칸트는 사람들이 “거짓 약속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약속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본다. 거짓 약속이 만연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약속을 믿지 않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칸트가 보기에는 약속을 참된 약속과 거짓 약속으로 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에는 100% 절대적인 마음 속 맹세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절대적인 맹세를 한 약속은 참된 약속이며 맹세의 진실성이 100%에서 0.000001%라고 모자라면 거짓 약속이 된다. 하지만 100%가 있을 수 없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다.

 

참된 약속과 거짓 약속의 절대적인 이분법은 불신과 절대적인 신뢰의 이분법으로 이어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인 참된 약속을 하는 사회에는 절대적 신뢰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약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될 터”이다.

 

실제 세상은 어떤가? 칸트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인 맹세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거짓 약속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약속 체제가 붕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약속을 상당히 성실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기꾼들과 웬만하면 약속을 지키는 선량한 사람들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사기꾼으로 판명된 사람의 약속은 보통 믿지 않지만 선량한 사람들의 약속은 대체로 믿는다. 물론 100% 신뢰는 아니다.

 

요컨대 칸트적 의미의 참된 약속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도 약속 체제는 붕괴하지 않는다. 또한 사기꾼들이 많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선량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사기꾼과 선량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면 약속 체제는 붕괴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절대성이 문제였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절대성은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공리주의에 의존하는 칸트
 

칸트는 “그로부터 너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생길 손해 때문이 아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공리주의자가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실제로 도덕 철학자들은 칸트의 도덕 철학이 공리주의 도덕 철학의 대척점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

 

칸트가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는 공리주의와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왜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없는지를 따질 때에는 결국 손해 또는 결과의 문제를 따지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거짓 약속을 하게 되면 결국 사람들이 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화폐”(거짓 약속)를 돌려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즉 불신과 거짓이라는 손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공리주의(결과를 따지는 것)로부터 완전히 절연하고 싶다면 불신과 거짓이 만연하는 사회로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과 거짓 만연은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다 보면 칸트는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예컨대 “거짓말을 하지 말자”에 대한 논거를 댈 수가 없다. 여기에 칸트의 딜레마가 있다. 그는 추상적인 논의에서는 공리주의와 완전히 결별했다고 선언했지만 구체적으로 거짓말과 같은 것에 대한 규범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결국 공리주의(또는 그와 비슷한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조건 약속을 지키는 사회는 부도덕하다
 

어떤 사람이 들었던 예를 인용해 보겠다(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대충 요점만 써 보겠다):

 

A는 B에게서 총을 빌린다. 그리고 1년 후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1년이 지나서 A는 B에게 총을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그 무렵에 A는 B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자살 위험에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A는 약속을 어기고 적어도 우울증이 나을 때까지는 총을 돌려주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B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A의 행동은 부도덕하다. 왜냐하면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절대적인 규범을 어겼기 때문이다. 나의 도덕 관념에 따르면 A의 행동은 훌륭하다. 만약 A가 총을 팔아먹어서 돈을 챙기기 위해 약속을 어겼다면 부도덕하다고 볼 수 있지만 B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약속을 어겼다면 부도덕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내가 칸트가 이상적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절대적 규범 준수자가 오히려 부도덕하다고 보는 것은 순전히 나의 도덕 철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B가 권총 자살을 하든 말든 약속을 했으면 총을 돌려주는 것이 더 도덕적이라고 우긴다면 나는 반박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의 문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향은 논리적으로 반박될 수 없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불가능하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규범이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가치가 절대성을 요구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치들이 충돌할 때가 많은데 두 가치가 절대성을 요구한다면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위의 예에서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목숨은 소중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이다. 칸트는 다른 곳에서 “목숨은 소중하다”는 가치를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논거를 펴면서 옹호하고 있다. 칸트에게 두 가지는 모두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규범이다.

 

칸트의 논의에는 질적 분석만 있고 양적 분석이 없다. 이것은 칸트가 절대적 규범 준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따라서 위의 딜레마에 처해 있을 때 A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가치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가치가 모두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을 금고에 넣어서 돌려준 다음에 우울증이 나은 다음에 금고 열쇠를 주는 방법 등을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딜레마는 해결책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칸트는 뭐라고 말할까?

 

 

2009-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