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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간의 논의들은 제가 보기에 가치/사실의 고전적 구분에 대한 논쟁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lleviate님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가치 중립적인 명제는 사실상 혹은 원칙상 없다는 것이니까요(모든 명제는 발화되면 가치를 내포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명제는 발화될 때 아주 약한 정도, 거의 무시할 만한 정도라도 가치에 대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원칙상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과학철학 분야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문제이고, 보다 넓게는 관찰의 이론의존성 테제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alleviate님이 주장하려는 것도 이런 문제인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익숙한 주장을 위해서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철학적 논의들을 이용하셨기 때문에 흥미로운 논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두 논의들이 본래의 주장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면에서, 하나는 alleviate님의 주장과 오스틴의 입장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다른 하나는 alleviate님의 주장 자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전자는 alleviate님의 주장이 오스틴의 이론과 잘 부합하느냐의 문제이고, 후자는 이와 별도로 독특한 전략을 택한 alleviate님의 논의에서 어떤 의미를 제 나름대로 끌어낼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1. 일단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표현 자체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위 명제와 가치 명제는 다른 것이니까요. 당위 명제는 "~해야 한다"는 의무와 관련된 명제인 반면 가치 명제는 대상에 대한 평가까지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것이죠.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도 사실 명제/가치 명제의 구분과 관련된 것이지, 사실 명제/당위 명제의 구분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오스틴의 이론에서, performative 명제에 constative 명제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 명제는 그 사실이 참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그 사실이 참이라는 주장을 한다는(affirmation) 언어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내가 뭔가를 약속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거짓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실 확인 명제가 어떤 당위, 곧 어떤 의무를 내포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죠. 하나의 사실 명제가 또한 하나의 사실을 주장하는 언어 행위이기도 하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능한 반면, 하나의 사실 명제가 하나의 의무를 내포한다는 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1=2'라는 명제는 곧 '나는 1+1=2라고 주장한다, 확언한다'는 언어 행위이기도 하지만, 이 명제에는 어떤 (윤리적) 의무도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제의 내용과 대상 사이의 일치 여부로 한 명제의 의미를 판단했던 고전적인 인식론, 언어론을 넘어서려는 오스틴의 원래 의도에 보다 충실하자면,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가 발화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서 가치 명제로 보일만한 것도 사실 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의자가 부러졌다"란 명제는 그 맥락에 따라, 조심하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사실을 확언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맥락에 따라 '1+1=2'에서 어떤 당위, 의무를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 명제가 놓일 수 있는 수많은 맥락들 중 극히 일부입니다. 모든 맥락에서 저 명제로부터 당위를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alleviate님이 제기된 반박들에 대해 주시는 대답도 사실 명제들로부터 당위 명제를 끄집어내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어떤 의도 하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반칙왕님에게 한 대답을 보죠.
"반칙왕님은, "모든 사실 명제가 당위 명제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기 위해 본문에다 그 예를 제시하셨지요? 그렇다면 방금 본문에 써놓은 그 예들은, 반칙왕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가 됩니다. 즉, 그 사례들은 반칙왕 님의 '주장을 위한 맥락'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제시하신 사례들 '자체'는 '지극히 사실 사태를 기술하거나, 논리적 사실을 기술하는 사실적 명제'일 수 있지만, 이미 '활용' 문맥에서 '당위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실 명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왜 이 사실 명제가 '당위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당위'라는 말의 의미를 부당하게 확장한 것이죠. 어떤 특정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들은 단지 그 주장과의 논리적 연결관계 내에서만 일종의 힘(논리적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증명을 이끌어내는 명제들 간의 논리적 연결관계에 당위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명제/당위 명제를 구분한 뒤, 후자가 전자를 포괄한다는 점을 입증하려면, 전자에 후자의 속성이 있다는 점을 밝혀야지, 후자가 전자의 속성도 포함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후자가 전자의 속성을 포함한다면, 이는 후자와 전자는 구분되지 않는다거나, 더 나아가 전자가 후자를 포괄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뿐입니다. 즉, 모든 사실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당위란 말 속에 논리적 강제력까지 포함시킨다면, 이는 증명 과정 중에 당위란 말의 의미 자체를 변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alleviate님은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는 구분될 수 없다는 이야기와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이야기를 뒤섞고 있는데, 이는 당위라는 개념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위란 논리적 연쇄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의무는, 그저 이 말이 옳다, 받아들여라라는 강제가 아니라 특정한 실천 규범들입니다. '1+1=2'이 직접 내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규범을 명시하지 않고서는, 이 명제가 당위 명제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제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오스틴에 따르면(혹은 그에 대한 제 해석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맥락에 따른 언어 수행적 명제이고, 이 언어적 행동 안에는 사실을 확언하는 행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 모든 명제는 발화되면서 가치 명제가 된다는 말은 맞을 수 있지만 이 때의 가치는 '사실에 대한 확언, 주장'도 포함되는 폭넓은 것이어야 하며(아마도 이렇게 되면 '가치'란 표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constative/performative의 구분을 중심에 놓으면서, 사실/가치의 구분은 여전히 유지되는 편이며, 이 구분을 오스틴은 실천, 행위의 측면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나을 듯 합니다), 2. 모든 명제는 발화되면서 당위 명제가 된다는 말은 틀렸다고 봅니다.
2. 그러므로 저는 당위 명제라는 말을 가치 명제로 바꾸고 입증하고자 하는 포인트를 명확히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제안은 원래 alleviate님의 주장, 즉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란 주장을 모든 명제는 맥락의존적이며 가치의존적이라는 주장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오스틴과 별개로 이것이 alleviate님이 하고자 하는 원 의도에 가까워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꾸면 뻔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대신 쓸데 없는 오해와 논란을 없애고 논의를 명료화시킬 수는 있죠. 더 나아가 오스틴의 논의를 경유하면서 한 가지가 추가됩니다. 명제의 맥락의존성은 지식의 절대성을 회의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지식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가 됩니다. 즉, 어떤 조건들 하에서 우리는 사실 명제를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게티어 반론은 흥미롭습니다. 영미 철학적 맥락에 익숙치 않고 또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 반론 자체가 그다지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습니다. 언급하셨던 대로, 이미 데카르트가 이와 유사한 반론을 한 바 있죠(물론 게티어 반론은 영미철학 내의 논의에서는 그와 구분되는 함축을 가지겠습니다만). 제가 철학사적 틀을 떠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반론이 지식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반론 자체가 이미 참된 절대적 지식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게티어 반론에서 드러나는, 참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이 그럼에도 지식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 실재와 필연적인 연관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객관적 실재와 연관을 맺지 않을 가능성, 참되고 정당화된 믿음이 실재와 우연히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이미 우리가 어떤 참된 지식을 알고 있을 때에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철수가 어떤 지식을 갖고 있을 때, 그는 이 지식이 참된 지식인지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가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즉 철수는 그 지식이 틀렸을 가능성 자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은 그가 지식과 지식이 아닌 것을 검증할 수 있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지식이 자신이 인식하는 사실과 부합하며 다른 이들에게 정당화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판단합니다. 게티어 반론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런 철수의 지식을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다른 절대적 지식을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영화 세트를 실제 기와집으로 믿고 있는데, 이런 믿음의 오류 가능성은 그 기와집이 영화 세트라는 절대적 지식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이것은 이미 퍼트남이 제시한, "통 속의 뇌" 가정을 반박하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사실 이런 논리는 소박 실재론을 비판하는 칸트에게서 이미 발견됩니다. 우리가 실재와 달리 현상만을 지각하기 때문에 실재와 다른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주장은 오직 실재가 현상과 다르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며, 그런 한에서 우리는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앎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실재와 다르며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없다라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입니다.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재에 대해 잘못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오직 실재에 대한 참된 앎과 동시에 오류로 밝혀질 뿐입니다. 스피노자가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기준이라고 얘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실재에 대한 "절대적" 무지 속에 빠질 수 없으며 항상 참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누구에게 있는가이죠.
게티어 반론은 우리의 앎이 실재와 완전히 유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그러한 완전한 유리 자체가 이미 실재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므로), 우리 앎이 유한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지식은 참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견해는 지식이 경험적, 논리적 기준을 공유하는 하나의 인간 공동체 내에서만 생산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사실 하나의 공동적인 주관성이며 그런 한에서 유아론적인 것입니다. 게티어 반론은 이런 유아론적 주관성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주관성은 실재 자체와 만남으로써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주관성을 통해 깨어진다는 점입니다. 철수의 지식을 그릇된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참된 지식을 소유한 또 다른 어떤 자이지, 실재 자체가 아닙니다. 게티어 반론은 실재 자체가 철수의 지식을 그릇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따라서 철수가 자기의 검증 기준 내에서 스스로의 믿음을 그릇된 것으로 기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수의 지식은 실재와 맞아떨어집니다. 다만 "우연히" 그러할 뿐인데, 이 "우연성"을 철수는 자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게티어가 자신의 반론 속에서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어떤 주체, 그 우연성을 알고 그 우연성을 말할 수 있는 주체만이 철수의 믿음을 그릇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이란 이처럼 항상 "어떤 타자에 의한" 반증의 테스트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이는 포퍼식의 실증주의적 반증 테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반증 방식들이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한에서 포퍼가 비판했던 정신분석학이나 맑스주의도 반증될 수 있는 과학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반증들은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점이며 따라서 검증/반증 테스트 자체를 어떻게 규정 내지 표준화, 단일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양한 반증들이 가능하도록 상이한 검증 기준들을 가진 공동 주관성들(미래의 주관성들까지 포함하여)을 관계맺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를 끌어오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되는가? 제가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는 이런 확실성을 비판하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이란 어떤 사물, 대상과 같이 고정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어떤 상태, 보다 정확히는 매일 우리가 행하는 실천들 자체입니다. 그 나날의 다양한 실천들을 우리가 단 하나의 낱말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 실천들이 마치 사물과 같이 고정되어 실재와 1:1 대응을 하는 듯 착각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가질 수 있는 함축들과 귀결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와 생각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이런 아이디어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우리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에서 비롯되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논쟁에서 벗어나 지식과 과학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갈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상대주의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절대주의적인 방식으로, 즉 고정된 어떤 사물로서 실재와 1:1 대응하는 것으로 개념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화를 버릴 경우 우리는 검증기준을 공유하는 유아론적 주관성들, 이 주관성들이 맺는 관계들, 이 관계에 역사, 시간이 포함되는 방식들 등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과 실재 사이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지식과 실재의 일치가 지식 "내부에서" 변화하는 양태들입니다. 이렇게 지식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절대주의/상대주의 논쟁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준다는 것이, 제가 오스틴과 게티어를 경유하는 alleviate님의 논의를 유의미하게 맥락화하는 방식입니다.
3. 이와 별개로, 논쟁의 와중에 제기된 논의에 대해 한 두 마디 해두고 싶습니다.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의 논리적 도출에 관한 존 설의 주장에 대한 옹호 중에 설득력 있는 것은 칼도님의 반론입니다. 약속이 제도인 사회에서 약속을 하면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부과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논리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여전히 이 둘이 논리적 도출 관계로 엮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의무가 있다"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사실 명제일 수 없습니다. 이건 "해야 한다"는 당위를 사실 명제처럼 보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우리는 의무를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인칭이고 다른 하나는 3인칭입니다. 전자의 관점에서 의무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따라서 자연적,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귀결되는 기계적 결과가 아니라 나의 의지적 노력과 자유로운 선택(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의한 행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의무는 사실과 구분됩니다. 다음으로 3인칭 관점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다른 이가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실제로는 의무를 부과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철수는 법을 지켜야 한다"란 말을 생각해보죠. 여기에서 "지켜야 한다"란 말에 대응하는 실제적으로 관찰가능한 사실이 있습니까? 의무는 감각적으로 관찰가능한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의무는 오직 의무를 주는 자와 의무를 수행하는 자의 관계 안에서만 유의미하게 말해질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철수는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철수에게 법을 부과하는 자와 같은 입장에서 이 의무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만 의무의 핵심인 이 "~해야 한다"의 강제력이 포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류학이 그러하듯이 어떤 의무를 순수하게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 기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연장자가 어린이를 공경해야 한다"와 같은 경우에서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런 기술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의무 관계를 기초로 단지 다른 내용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기술에서 순수하게 사실 기술인 것은 연장자와 어린이가 맺는 관계이지, "~해야 한다"는 말이 가진 강제력 자체는 사실 기술의 대상이 아닙니다. 즉 이 기술은 "~해야 한다"는 당위의 형식에 어떤 사회는 연장자가 어린이를 공경한다는 사실 내용을 넣어놓은 것입니다.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에서 "~해야 한다"의 당위적 관계 속에 이미 들어가 있고 그런 관계의 형식을 다른 사회에 "투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회에서 "어떤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게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찰처럼 보이는 것도 의무는 의무 관계 속에서만 파악되기 때문에 항상 이미 의무, 당위의 차원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의무를 부과한다"란 말은 지금의 논의에서 기초적인 술어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표현을 마치 어떤 객관적인 물건을 주는 사태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칼도님이 "1) 사실: 약속이 제도인 사회에서, 그리고 해당 사회의 모든 성원이 암묵적으로나마 약속 제도에 동의한 경우, 약속 행위는 약속한 이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라고 쓰셨을 때, 여기에는 이미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덕하님의 입장에 대해 간략한 질문입니다. 이건 직접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일단 생각난 김에 여기에 적어두겠습니다. 답변이 없으면 다시 직접 여쭈어보도록 하죠. 이덕하님은 alleviate님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면 C는 “약속을 지켜야 모든 사람에게 이로우니까”라고 상당히 칸트스러운 답을 내놓습니다. 저는 이런 C의 답변이 칸트의 오류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답이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를 가정하고 있음에도 칸트와 C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칸트는 의무론적 윤리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입니다. 그는 도덕 법칙을 선이나 악에 대한 내용적 규정 위에 정초하는 일에 적극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칸트는 왜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느냐란 물음에 대해 그것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적인 대답을 내놓으면서 도덕 법칙을 최상의 원칙으로 올려놓은 사람이라는 얘기죠. 이덕하님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이롭다라는 공리주의적 대답을 "상당히 칸트스"럽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다른 글들에서, 이덕하님은 과학의 교권과 윤리의 교권을 철저히 분리하려는 입장을 보여주셨는데, 이런 입장만큼 칸트적인 입장도 없습니다.
특히 3번 항목의 경우, 얼마 전 코지토님의 글을 보았을 때처럼 통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군요. 제가 말하고 싶었지만 지식과 능력이 부족해서 하지 못한 말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셨네요. 딱 제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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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의무가 있는지 없는지가 사실의 문제임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은 쉽습니다. 사람들이 일각수가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일각수가 있는 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의무가 있다고 믿으면 의무가 있는 것이 사실이 됩니다. 또는 적어도 사람들이 의무가 있다고 믿는 것이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성립하기위한 필요조건입니다. 여기서 머리가 약간 혼란스러워지면서 의무가 결국은 믿음의 한 종류라면 어떻게 사람들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일 수 있느냐고 의문을 품는 분들이 생깁니다. 사람들 머리 속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입니다. 사람들이 약속행위가 그 행위를 한 이들에게 약속을 지킬 의무를 부과한다고 믿고 있는지 믿고 있지 않은지는 사회학이든 인류학이든 사회과학적으로 확인가능합니다. 그리고 믿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면, 그 확인은, 좀 단순화시키면, 동시에 해당 사회 성원들에게 약속 지키기가 하나의 의무로 주어져 있다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의무는 그 의미상 당위를 함축하는데, 어떻게 당위가 사실일 수 있느냐고 반론하면 안됩니다. 서얼은 사실이 이미 당위를 함축하기 때문에 사실로부터 당위가 도출될 수 있는 한 경우를 예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서얼의 논변(제가 좀 풀기는 했지만 결국 제 논변이 아닙니다)에 대한, 예상되는 가장 합리적인 반론을 저는(역시 엄밀히 말하면 저라기보다는 서얼의 논변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을 처음 한 이들을 대표해서) 이미 처음 댓글을 달때부터 미리 봉쇄했습니다. 이 논변은 '다른' 사회를, 또는 모든 사회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에서 당위가 도출될 수 있는 어느 한 경우를 예시하기 위해 문제의 사실이 반드시 어느 사회에서나 '관찰'될 필요는 없습니다. 약속행위가 약속을 지킬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은 '약속'이라는 낱말이 있는 사회에서만, 또는 문제의 논변의 주체와 대상자들이 '공속'하는 사회에서만 사실이면 됩니다. 저는 실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든 부당하게든 당위를 도출시키려고 하는 사실이 왜 모든 사회들에서 사실로 관찰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회들에서 사실로 관찰되어도 나쁠것은 없습니다! 또, 실제로 약속행위가 그 행위를 한 이에게 약속을 지킬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은 서얼이나 제가 속한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사회들을 포함해서 인간이 인간이 된 이래의 모든 사회들에서 사실로 관찰될 수 있다고, 초월론적 논증을 통해, 합리적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의무가 있다고 믿으면 의무가 있는 것이 사실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다른 글에서 "믿음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여기에서 어떻게 "고로, 믿음은 사실이다"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물론, 존 서얼은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했습니다만...)
칼도님의 저 말씀에 약속행위를 대입하여 형태를 조금 바꿔보면, "사람들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 된다"가 됩니다. 좀더 세분해 보겠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 믿음(당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다. - 사실
고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제가 칼도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논리만 가지고 특정 사회에 한정해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히틀러가 지배하던 시기의 독일을 예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유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 믿음(당위)
"유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다. - 사실
고로, 유대인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사실에서 당위가 도출될 수 있는 어느 한 경우를 예시하기 위해 문제의 사실이 반드시 어느 사회에서나 '관찰'될 필요는 없습니다. 약속행위가 약속을 지킬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은 '약속'이라는 낱말이 있는 사회에서만, 또는 문제의 논변의 주체와 대상자들이 '공속'하는 사회에서만 사실이면 됩니다."라는 말씀을 보면, 유대인 학살에 관한 저의 논리가 아주 불합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그런데 칼도님이 예로 드신 존 서얼의 논변이나 칼도님의 주장을 보면, 역시 저와 기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약속이라는 단어와 약속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보느냐부터가 달라 보이는군요. 저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화시켜 보면, 칼도님은 "의무란 사회적 사실로 존재하며, 약속이라는 말 속에 이미 당위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약속이라는 행위를 했다면 당연히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반면, 저는 "의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약속이라는 행위는 그렇게 할 의사가 있다고 표명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추가로' 의무를 부과할 수도 있고, 부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면 의무를 부과할 것이며,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있다면 의무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칼도님의 견해와 저의 견해가 둘 중 하나만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관점의 차이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관점의 차이로 보고 싶습니다. 제가 오독하거나 오해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 바랍니다.
사회적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제 관점에서는 존 서얼과 달리,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믿고 있구나" 정도로 보입니다. 만약 약속이행의 의무가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면, "그런 의무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로 보겠지요. 역시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고 그런 틀로 보겠지요.
게티어의 반례의 포인트는 어떤 믿음이 지식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은
1. 참이어야 한다.
2. 정당화되었어야 한다.
라는 두 가지 조건 외에도 그 믿음을 가진이가 그 믿음을 참이라고 믿는 이유의 원인이 2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인트를 어디엔가 써먹기^^위해 써먹는 이가 반드시 이 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믿음, 즉 지식을 갖고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갖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당화되었고 그래서 참이라고 믿지만 실은 참이아닌 믿음을 갖고 있는 누군가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미국 정부및 미국 주류언론의 믿음을 참이지만(자신의 그) 정당화가 아니라 석유욕심이 그 믿음을 가진 이유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지식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즉 게티어 반론의 포인트는 정당화된 믿음과 참인 믿음을 동일시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정당화'라는 인식적epistemic 절차가 '참이냐 거짓이냐'는 인식론적 문제를 결판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은 그저 대전제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삼단논법을 통해 이끌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내가 당위 차원 안에 있다면 당위 차원의 규범에 종속된다는 말일 뿐이죠.
저는 연필이 있는 것과 의무가 있는 것이 왜 다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의무가 있는지 여부도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관찰 가능한 차원에 있습니다. 물론 의무는 감각적 대상이 아니고 일종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대상만이 사실->당위가 성립하는 경우가 있느냐를 둘러싼 논쟁에서의 그 사실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연세대학교도, 삼각형도 감각적 대상은 아니지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얼은 ' 대전제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삼단논법을 통해 이끌어내고' 있지만 (누구도 대전제에 함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대전제로부터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끌어내지는 것이 당위인것은, 그 대전제가 이미 당위차원에 있기때문' 만'이 아니라 사실차원에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설이 삼단논법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사실 전제에 이미 결론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당위 명제입니다. 따라서 전제도 당위 명제여야하지, 사실 명제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당위의 구분을 유지하면서, 사실로부터 당위를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추가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제가 인류학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의무 형식을 다른 사회에 "투사"한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당위 명제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 같습니다. 잘 보시면 알겠지만, 제 말은 의무의 각 내용들은 다를 수 있지만, 그 형식인 "~해야 한다"는 공통적이며, 이 형식은 오직 의무 관계 안에 있을 때에만 이해되고 포착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만약 어떤 의무도 없는 사회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는 다른 사회에서 누군가가 어떤 행동들을 한다는 사실만 관찰할 뿐, 이 누군가가 도덕적 규범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 즉 그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어떤 규범을 어떤 경우에는 따르고 어떤 경우에는 따르지 않는 그런 과정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반규범적 행위는 단지 어떤 다른 적극적 행위일 뿐, 규범에 반하는 행위로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는 설의 논의가 유효하려면, 모든 당위 명제의 내용이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반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당위 명제가 가진 내용의 보편성이 아니라 모든 당위 명제를 당위 명제로 만들어주는 그 형식 자체의 보편성과 이 형식이 얻어지기 위한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논의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존재양태가 다르다는 것은 어느 것은 사실이고 다른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의 사실이라는 것, 그래서 각각의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들이 서로에게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의무가 있다"와 "연필이 있다"는 서로 환원될 수 없고 다른 성격의 사실이므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이는 보통 후자가 있는 차원에서 전자의 차원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설이 하는 것은 이와 다른 것입니다. 의무가 사실로서 있는 차원에서 그 의무의 법칙이 '나'라는 개별 케이스에 적용되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미 당위의 차원을 전제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당위가 사실로서 있는 차원을 전제한다는 얘기입니다. 칼도님이 실제로 주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반복합니다만, 당위가 사실로서 존재하는 차원은 연필이 사실로서 존재하는 차원과 다르고 양자는 서로 환원불가능합니다. 당위의 차원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은 동어반복입니다. 설의 논리는 그래서 삼단논법입니다.저의 논점은 간단합니다. 당위 차원을 사실 차원과 구분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차이는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그런 존재와 무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내의 차이입니다. 지금 하고 계신 것은 당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인데, 허수아비 비판입니다.
"당위란 실제로는 없고, 머릿속에서만 있는 관념 혹은 믿음이며, 따라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제가 주장하니까 저렇게 말씀하신 걸로 이해됩니다. "당위가 사실로서 있는 차원"에서의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으니, 칼도님 말씀마따나, 제가 너무 주관적인 기준, 그래서 토론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했나 봅니다. 어쨌든, big world님의 말씀과 칼도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 주관적인 기준은 저만의 것으로 남겨 두고, 두 가지 차원의 사실을 각각 인정하는 게, 즉 당위 차원의 사실도 그 차원 나름의 사실로 인정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ig world님과 칼도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잘 배웠고, 더 생각해볼 거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혹은 서얼은 허수아비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당위가 사실로 존재한다는 주장과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당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그 당위를 사람들이 믿고 지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언젠가의 한국 사회에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당위가 존재했습니다. 반면 어떤 당위가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당위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약속을 지킬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과 책상위에 연필이 있다는 사실이 왜 빅월드님이 구별하는 방식으로 구별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약속이라는 제도 안에서) 약속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이가 약속을 지킬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제도적) 사실이라면, 이 사실들을 기술하는 명제에서 약속한 이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명제가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추론됩니다. 당위차원과 사실 차원의 구분을 전반적으로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적 사실들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당위함축을 지닌다는 것이 서얼의 주장입니다.
2. 제도적(또는 제 식대로 당위적) 사실들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당위 함축을 지닙니다. 따라서 그 자체로 당위 함축을 지니지 않는 사실들과 제도적 사실들은 구분됩니다. 제가 "연필이 있다"와 "의무가 있다"를 구분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는 당위적 차원의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칼도님의 서술과 무엇이 다릅니까? 반복하지만 문제는 다른 지점입니다.
3. "그 자체로 당위 함축을 지니는 제도적 사실들로부터 그 함축된 당위를 이끌어낸다"와 "당위적 차원의 대전제로부터 이 대전제에 함축된 개별 당위 명제를 이끌어낸다.", 저는 이 둘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칼도님의 것이고 후자는 제 것입니다. 다른 글의 댓글에서 칼도님은 "당위 명제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는 말에 반박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설의 예에서 대전제인 사실 명제는 당위 명제를 함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논의는 끝난 것이죠. 대전제에는 당위 명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설은 이 대전제에서 당위 명제를 이끌어냅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대전제에 당위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당위적 차원을 전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석유 욕심 때문에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주장이 참이고(실제로 갖고 있고) 그것이 참임을 보여줄 여러가지 논거들을 가지고 있다면(사진 증거, 이라크 정권으로부터 얻어낸 정보 및 국제 역학의 분석 등등의 온갖 근거들로 구성한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 미국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이 단지 석유 욕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지식을 비판한다면,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게티어 반론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게티어 식으로 반론하려면, 이라크가 실제로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지만 미국이 설명하는 대로 어떤 전략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어느 무기 상인이 잠시 이라크의 군사 무기 창고에 몰래 대량살상무기를 숨겨놓았을 경우와 같은 우연을 상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고 그 믿음에 대한, 빅월드님이 거론한 종류의 정당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나한테 미국 정부가 갖고 있는 동일한 믿음은 내가 갖고 있는 종류의 정당화가 아니라 석유욕심에 의해 야기된 일종의 원망믿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내가 갖고 있는 종류의 정당화와 '비슷한' 정당화를 제시할 것입니다만, 나는 그 정당화가 부족하며, 실질적으로 미국 정부가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이유는 석유욕심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 사례가 게티어의 반례에 맞든 안맞든, 게티어의 반례가 게티어가 말하는 조건을 다 갖춘 믿음, 즉 게티어적 의미에서의 지식을 가질 수 있거나 갖고 있음을 전제한다는 빅월드님 주장은 여전히 사실이 아닙니다. 즉 게티어의 조건을 신봉하는 이가 어떤 믿음을 평가하고자 할 때, 그 자신이 우선 그 믿음을 게티어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족시키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티어의 조건을 신봉하는 이가 어떤 믿음을 평가하고자 할 때, 그 자신이 우선 그 믿음을 게티어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족시키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티어 반론은 전통적인 지식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도 지식이 아닐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무리 우리가 확실하게 알더라도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막연한 의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저는 이것이 "합리적"인 의심이기 위해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완전한 지식을 상정할 때에만 우리는 게티어식으로 전통적 지식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식을 제대로 된 지식이 아닌 것으로 기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완전한 지식을 제시할 때에만, 대상이 되는 지식이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는 점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게티어 반론은 항상 그런 식으로 보다 완전한 지식(어떻게 얻어졌는지는 모르지만)을 제시하고 이를 그렇지 못한 지식과 비교합니다. 완전한 지식의 존재는 게티어 반론이 가능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그런 완전한 지식을 우리 인간이 아닌 다른 신이 가진다고 가정하고 그런 완전한 지식의 내용에 대해 우리가 전혀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전통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식이 왜 그럼에도 지식이 아닐 수 있는지 합리적으로 논증해낼 수 없습니다. 막연하게 어떤 완전한 지식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는 게티어 반론을 전개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고, 그런 믿음이 정당화된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통 속의 뇌라고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퍼트남이 보여준 대로, 이 믿음은 그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를 논박해야 하므로 자기 모순적입니다. 게티어 반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만약 이 반론을 지식의 조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볼 경우 그러합니다. 제가 보기에 게티어 반론은 지식의 조건을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한 논변이지, 지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 여부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논변은 아닙니다.
1. 게티어의 반례에 대해 제가 혼동/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정합니다.
누군가 갖고 있는 한 믿음이 지식이기 위해 게티어는
a) 그 믿음이 참이다.
b) 그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여기서 정당화된다는 그 믿음이 참임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뒷받침할 상식적으로 납득될만한 만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갖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외에 c) 정당화가 믿어야만 하는 이유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조건 a)와 b)를 충족시키면서도c)는 충족시키기 못하기 때문에 지식이라 할 수 없는 경우를 제시하는 것으로 논변됩니다. 간단하게는 다음과 같습니다:
존스와 스미스가 같은 회사에 지원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스미스가 1) <존스가 고용될 것이다> 와 2) <존스의 주머니에 동전이 10개 있다> 둘 모두를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또한 3) <고용될 사람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10개 있다>고 믿는 것도 정당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4) 존스가 아니라 스미스가 고용되었고 5) 스미스의 주머니에도 동전이 10개가 있습니다(스미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3)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밝혀지지만, 스미스가 3)을 '아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스미스는 3)을 믿어야만 하지만 그가 믿는 이유는 1)과 2)가 아니라 4)와 5)이어야 합니다.
2. 이라크 사례
게티어 반례에 대해 혼동/오해가 있었으니 당연히 제가 든 이라크 사례는 게티어 반례의 형식에 들어 맞지 않습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미국 정부의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지식이 아님을 입증하려면 그 정당화가 그 믿음을 참이 되게 하는 정당화가 아님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미국이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정당화보다는 중동 석유가 안정적으로 미국에 공급되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가 미국 정부가 그 믿음을 갖게 된 '진정한' 이유일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은 자기 스스로는 정당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속깊은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게티어 반례를 도구로 해서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데올로기 비판 개념과 맞물리는 점이 있을까 싶었는데, 별로 아니었습니다.
3. 게티어 반례와 인식론적 회의주의
게티어 반례는 순전히 누군가 갖고 있는 믿음이 지식이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충분조건의 규정을 향하고 있습니다(사실 이 규정이 성공했는지는 계속 논쟁중입니다). 이 규정을 위해 행해진 사유실험 속에서는 우리는 참인 명제들과 게티어적 의미에서의 지식인 명제들을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그 규정의 수용이 그 자체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부정을 함축하거나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닐듯 합니다. 이 점은 나중에 부연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칼도님은 여전히 게티어 반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게티어 반론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지식의 조건들을 다 충족했는데도 어떤 지식이 지식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아니라 말이죠. 즉, 스미스는 칼도님이 추가하신 것과 같은 어떤 세 번째 조건(이미 암시한 대로 이 조건 자체는 두 번째 조건에 다른 어떤 것이 뒤섞여 있는 불분명한 것입니다)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세 번째 조건을 규정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티어 문제에서 스미스가 충족시키지 못한 그런 '규정된' 조건은 '아직' 없습니다. 그건 이 문제를 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답해야 할 사안이죠. 칼도님이 추가하신 세 번째 조건, "c) 정당화가 믿어야만 하는 이유이어야 한다"은 그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칼도님의 원래 의도에 맞추어 이 조건을 다시 말해보자면, "믿음의 근거로 제시하는 정당화는 그 믿음에 대한 '실재적' 정당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미스가 3)을 믿는 것은 4)와 5)의 근거에서여야 한다고 할 때, 4), 5)의 근거들과 3)의 믿음 사이에는 단순히 정당화 이상의 결합 관계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1), 2)와 3) 사이에도 정당화에 의한 결합 관계는 이미 존재하니까요. 이런 정당화 이상의 결합관계를 칼도님은 "이유"란 표현으로 나타냈고 저는 "실재적"이란 표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에 해당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c)는 조건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는 사실 게티어 문제 그 자체입니다.
2. 정당화가 믿어야만 하는 이유이어야 한다는 것은
3)에 대한 믿음이 지식이 되려면 3)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1)과 2)에 대한 믿음이어서는 안되고 4)와 5)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니 4)와 5)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4)와 5)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는 것은 1)과 2)에 대한 믿음은 3)을 우연적으로만 정당화해주는 반면 4)와 5)에 대한 믿음은 실재적으로 정당화해주기 때문입니다. 형식화시키면
'어떤 사람 S가 명제 P를 안다'의 필요충분조건은,
1) P가 참이고
2) S가 P를 믿으며
3)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되며
4) P에 대한 S의 믿음의 정당성은 참인 명제로부터 도출된다
가 되겠네요.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듯 하니, 이 규정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모양입니다.
2. 문제는 게티어의 사례 속에 나오는 스미스처럼 (4)와 (5)(원래 스미스 사례에서 붙는 번호들은 쌍괄호로 표기하겠습니다)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1)과 (2)가 지식이 아니라고 검증해줄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입니다. 지금 칼도님이 제시한 조건은 스미스 자신의 입장에서 다 충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미스가 보기에는 (1)과 (2)도 칼도님의 조건 4)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다만 (4)와 (5)를 알고 있는 게티어와 논문을 읽는 우리 독자만이 외부에서 스미스의 지식이 진짜 지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달리 말해 어떤 정당화는 "우연적"이고 어떤 정당화는 "실재적"인지를 판별해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원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스미스의 외부에서 (4)와 (5)에 대한 지식, 즉 진짜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전제할 때에만 게티어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본론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므로 이 점은 더 부연 않겠습니다.
제가 진화윤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생각이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 철학은 조금 깊이 파고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나 그의 글을 상세히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흉한 속내를 들킨 느낌이군요.
사실 저는 이 논의에서 다른 속셈(?)을 갖고 고의로 '가치 명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당위 명제'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말로는 당위 명제라는 용어 자체를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요. 즉, 사실 명제의 주관 초월성, 절대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현대 학문들에 대해, 니체식으로 말하면 계보학적인 '의심'을 조금 더 강조하기 위해서랄까요. 그러니까, "즉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란 주장을 모든 명제는 맥락의존적이며 가치의존적이라는 주장으로 바꾸면 된다."라는 본문의 표현은 100% 맞는 것이지만, 뒤에도 쓰셨듯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아서 말이죠. ^^;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얘기가 나와서 참 반갑군요. 제가 철학으로 대학원 갈 생각을 했을 때(지금은 아니고) 전공하려고 생각해둔 게 비트겐슈타인(에다가 양념(?)으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일상 언어철학+지젝류의 MTV 철학) 이후 일상 언어학파 쪽이어서 비트겐 원전은 닳도록 봐왔었거든요. 게티어 문제도 할 말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서 일단 지금은 이만...
몰라서 그랬다면 이해가 가지만, 알고도 그랬다면 질이 나쁜데?
빅월드/
대부분 사실 명제들은, 언제나 가치/맥락 의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물은 H2O다."라는 사실 명제조차 실제로는 " "물은 H2O다."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므로 너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따위의 함축적 의미를 자동적으로 내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당위 명제의 위상에 있게 된다 -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사실 명제'들 속에는, 항상 그 명제가 '사실'과 실제로 일치하며, 그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 라는 당위적 주장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입장에 제기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2)의 구분기준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입니다. 다음으로, 이건 좀 쉽고도 뻔한 얘기지만, "모든 명제는 결국 당위 명제"라는 주장은 사실 명제입니까 당위 명제입니까? 여기에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게 위해서는 이것도 당위 명제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는 왜 당위 명제인가요? 결국 이 명제가 어떤 강제력,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가리켜주는 하나의 사실 명제를 제시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99.999999% 사실 명제처럼 보이는(우리가 그렇게 닥치고 사실에 대한 기술 명제라고 간주하는 수많은 명제들) 당위명제(A)들과 그냥 당연히 당위명제처럼만 보이는 당위 명제(B)들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어떤 주장의 정당화를 할 때 A를 열심히 인용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소위 이건 '사실 명제'야 -라고 우기면서 말이죠. 가령 수학에서 유클리드 공리계를 바탕으로 어떤 완벽한 수학 증명을 하나 내놨다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이 증명이 왜 정당화되며, 사람들이 왜 이 증명을 신뢰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클리드 공리계에서 공리로 삼고 있는 몇몇 문장들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볼 때 거의 99.99999%는 참인 것이라고 인정되며, 타당한 수학적 증명은 그 공리들이 참이라고 가정될 경우에 연역적으로 완벽히 타당한 형식을 보장받게 되니까요. 즉, '정당화'는 완벽한 사실 명제를 가정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유클리드 공리계의 경우도, 그 공리 자체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고(미분 기하학적 사고방식의 필요), 더 생각해본 결과 다른 비유클리드 공리계로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가정하는 전제들이 무조건 100% 맞는 사실 명제라고 모든 이들이 절대적으로 그것을 믿었다면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증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 명제'라는 네임벨류(?)를 내세우는 것은, '강력한 방식'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엄밀하게 개념을 살펴볼 때 그릇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했듯, 게티어 등 여러 맥락을 통해 인간에게는 '절대진리/사실'의 선점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이 세상 모든 '사실 명제'에는 "이것은 사실이다. 너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지 않는 이상은 이것을 믿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맥락이 깔리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는 99.9999999999%로 사실이라도 '믿어지는' 당위 명제들과, 그보다 못하게 당위적 요소를 지닌 당위 명제들만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미 당위 명제 내에서 사실 명제에 가까운 당위 명제와 그렇지 않은 명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고 질문했습니다. 99% 사실명제와 1% 사실명제를 무슨 기준에서 구분합니까? 이미 암묵적으로 사실/당위의 구분이 alleviate님의 논의에서 작동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99.999..%의 사실 명제만 가질 수 있다면(이런 가정은 합리적일 수 없습니다만 이하에 또 논의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것을 사실 명제로 규정하면 됩니다. 사실 명제/당위 명제 구분을 주장하는 분들도 이런 입장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건 그냥 개념 정의의 싸움이 될 뿐입니다.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라고 하고 그 안에서 사실에 가까운 명제/당위에 가까운 명제를 구분하는 것과, 그냥 명제들을 사실 명제/당위 명제를 구분하는 것(당연히 수많은 정도차를 포함하는 구분) 사이에 실제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나요?
2. 정당화와 관련해서:
정당화는 어떤 식으로든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님이 아무리 99.99..% 사실 명제로 정당화를 시도한다 해도, 정당화하는 동안에는 그 명제가 100%, 완전히 확실하다고 주장해야만 합니다. 이걸 "소위 이건 '사실 명제'야-라고 우"긴다고 표현하셨는데, 정당화는 억지로 "우기는" 게 아닙니다. 님은 지금 정당화 내부와 외부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우긴다고 생각하면서 합리적인 정당화를 전개할 수는 없습니다.
근거 없이 예로 들어간 수치들 때문에 또 다른 오해가 발생할 수 있어 첨언합니다. 어떤 사실의 확실성은 아시다시피 맥락에 따라 다릅니다. 0.00...1%의 정확도가 중요한 논의에서는 99.99...9% 확실한 사실은 정당화 논거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70% 확실한 사실도 논의 맥락에 따라 완전히 확실한 사실로 인정되어 강력한 정당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황에서 100% 확실한 사실(이런 객관적 기준은 사실 설정할 수 없습니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상황이 설정하는 기준에 따라 100% 확실한 사실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99.99..%~0.000...1%에 이르는 사실 명제들의 단순 계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100% 사실로 인정되는 다양한 사실 명제들이 있고, 어떤 정당화가 됐든 간에 그 정당화의 근거로 쓰이는 사실 명제들은 "이 정당화 내에서는" 100% 확실한 것으로, 즉 그 정당화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확실한 사실로 인정되고 주장됩니다. 그 사실이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면 정당화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실이 갖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일과 이 사실을 정당화 근거로 쓰는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정당화는 "합리적" 논증의 정당화를 가리킵니다.
3. 지식의 근본적 오류 가능성의 가정에 대해서:
그 자체로 자기모순적인 가정입니다만, 어쨌든 님처럼 우리는 그래도 모든 사실 명제가 실제로는 틀렸다고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이런 상상은 일관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 퍼트남의 "통 속의 뇌" 논증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에 토대해서 우리가 사실 명제로 인정하는 것을 사실 명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자꾸 궁극적인 차원을 얘기하시는데, 그런 궁극적 차원을 "합리적으로" 상정할 수 없습니다. 게티어 반론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근거에서 우리가 가진 지식이 불완전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려면 이미 완전한 사실 명제를 안다고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가진 지식이 절대적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가진 것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대적 객관적 진리의 소유 여부는 말할 수 없는 문제, 무의미한 문제입니다. 이걸 제쳐두고 나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확실한 명제들은 사실 명제들이라고 보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계속 그런 주장을 하신다면 고전적인 상대주의 논박법에 따라 설령 게티어 반론을 님처럼 해석한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가질 수 없다는 절대적 진리만은 가지고 있다고 답해두죠.
4. 지식에 대한 원칙적 회의의 가치와 기능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모든 사실 명제는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문에서 이미 주장한 대로, 하나의 사실 명제는 오직 또 다른 사실 명제에 의해서만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확실한 사실 명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지금의 우리가 아닌 미래의 다른 사람이 될 뿐이죠. 이런 방향에서 지식 내부에서 이뤄지는 변화들에 주목해야지, 자꾸 지식 자체의 불확실성에 호소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거듭말하지만 그야말로 쓸데없는 회의일 뿐입니다.
지식의 진보는 기존 지식에 대한 회의 못지 않게 참된 지식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어느 누구도 alleviate님처럼 원리적 차원에서 모든 사실 명제의 근본적 불확실성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내지 않습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창시자들은 단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수학적 지식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의 진보에 기여하는 기존 지식에 대한 회의는 아주 한정적이며(어느 특정한 지식 한 두 가지) 그에 반해 지식의 진보에 기여하는 기존 지식에 대한 확신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예로 드신 유클리드 기하학의 문제는 따라서 alleviate님이 주장하는 "모든 사실 명제는 당위 명제"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결론:
지식의 진보를 위해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서, 모든 지식의 원리적 불확실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지식의 원리적 오류 가능성은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입니다. 저로서는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내용이 반복된 부분도 있고, 또 다시 논의를 확대시키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별도로 답변하지는 않겠습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논점들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명확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주신 답변들에 감사드립니다.
2. 저는 정당화를 할 때 "이건 100% 확실한 사실 명제야."라고 발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용해도 됩니다. 저도 그렇게 사용하구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 이는, 양자세계에서 볼 때는 확실히 말해질 수 없지만 일상 생활이라든가 거시 물리 세계에서 "이 책상은 고체야."라고 발화하는 것이 유효한 것과 같은 상황이지요.
3. 사실 게티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진작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들먹여도 될 일이지만.. 말씀하신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어야 하겠지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을 사실 명제라고 명명하는 언어 방식이 정당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님도 우리 지식의 절대 진리성을 결코 검증할 수 없다는 '진리'에 동의하시니까) 모든 사실 명제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당위적 효과를 지닌, 불확실한 가치 명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실히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적어도 1) 절대진리에 대한 완전한 검증 자체가 인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2) 사실 명제란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최대치의 진리 근사값에 불과한 것이다 -라는 두 가지 점에는 님도 동의를 하시니까 말입니다.
4.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군요. 만약 모든 사실 명제가 당위적 명제일 수 있다-라는 제 주장을 어느 정도 동의하고 같은 맥락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제가 제기한 것이 기하학 공리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사실 명제'라고 못박아 둔 공리를 일부 수정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탄생시킨 것은, 애초에 사실 명제라고 주장되던 것이 다른 사실 명제들에 의해 공격받아 수정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유클리드 공리도 그저 어떤 '당위적, 가치적 명제'였던 것인데, 상대성 이론에 대한 수학적 증명에 있어서 그 '가치적 명제'가 담고 있던 내용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가치'를 끌어들여 전제 자체를 수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성 이론에서는 평평한 공간이 아니라 휘어진 공간에서의 수학적 공리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평평한 공간이나 휘어진 공간이나 궁극적 사실은 아니므로, 휘어진 공간에 그것에 맞는 수학적 공리계가 '필요'하다는 '가치 판단'에 의해) 예전에 확고한 것으로 믿어졌던 것을 수정한 새로운 비유클리드 공리계를 갖다 쓴 것이지요.
저는 일종의 <철학적 탐구>에서의 비트겐슈타인식 사고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명제'들의 관계와 명제 자체의 개념은 '놀이'와 '놀이의 도구들'과 다름이 아니며, 논다는 것은 애초부터 특정 공리를 그냥 준수하는 것으로부터만 가능하며, 특정 공리란 것은 개별자들의 '기호'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크립케가 정리한 '규칙 준수의 역설' 아시죠? 궁극적 규칙들은 우리가 그 규칙들을 따른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바로 그 규칙을 준수하는 이유는? 당연히 인간들의 기존 가치 체계에서 당위적 판단에 의해 "~를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 모든 사실 명제는, "나는 이 사실 명제가 옳다고 생각한다. 너도 다른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이것을 사실 명제라고 믿어야 한다," 따위의 '진리-권력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게 무의미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아요. 항상 '발전'은 사실 명제-당위 명제 틀 내부에서도 가능한 것이지만, 명제 틀 자체를 회의하는 근본적 성찰에서도 가능하다고 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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