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팅만 하다가 재밌는 주제가 나와서 몇 마디 끼어들어 봅니다.
일단 저간의 논의들은 제가 보기에 가치/사실의 고전적 구분에 대한 논쟁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lleviate님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가치 중립적인 명제는 사실상 혹은 원칙상 없다는 것이니까요(모든 명제는 발화되면 가치를 내포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명제는 발화될 때 아주 약한 정도, 거의 무시할 만한 정도라도 가치에 대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원칙상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과학철학 분야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문제이고, 보다 넓게는 관찰의 이론의존성 테제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alleviate님이 주장하려는 것도 이런 문제인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익숙한 주장을 위해서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철학적 논의들을 이용하셨기 때문에 흥미로운 논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두 논의들이 본래의 주장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면에서, 하나는 alleviate님의 주장과 오스틴의 입장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다른 하나는 alleviate님의 주장 자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전자는 alleviate님의 주장이 오스틴의 이론과 잘 부합하느냐의 문제이고, 후자는 이와 별도로 독특한 전략을 택한 alleviate님의 논의에서 어떤 의미를 제 나름대로 끌어낼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1. 일단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표현 자체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위 명제와 가치 명제는 다른 것이니까요. 당위 명제는 "~해야 한다"는 의무와 관련된 명제인 반면 가치 명제는 대상에 대한 평가까지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것이죠.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도 사실 명제/가치 명제의 구분과 관련된 것이지, 사실 명제/당위 명제의 구분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오스틴의 이론에서, performative 명제에 constative 명제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 명제는 그 사실이 참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그 사실이 참이라는 주장을 한다는(affirmation) 언어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내가 뭔가를 약속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거짓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실 확인 명제가 어떤 당위, 곧 어떤 의무를 내포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죠. 하나의 사실 명제가 또한 하나의 사실을 주장하는 언어 행위이기도 하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능한 반면, 하나의 사실 명제가 하나의 의무를 내포한다는 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1=2'라는 명제는 곧 '나는 1+1=2라고 주장한다, 확언한다'는 언어 행위이기도 하지만, 이 명제에는 어떤 (윤리적) 의무도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제의 내용과 대상 사이의 일치 여부로 한 명제의 의미를 판단했던 고전적인 인식론, 언어론을 넘어서려는 오스틴의 원래 의도에 보다 충실하자면,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가 발화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서 가치 명제로 보일만한 것도 사실 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의자가 부러졌다"란 명제는 그 맥락에 따라, 조심하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사실을 확언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맥락에 따라 '1+1=2'에서 어떤 당위, 의무를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 명제가 놓일 수 있는 수많은 맥락들 중 극히 일부입니다. 모든 맥락에서 저 명제로부터 당위를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alleviate님이 제기된 반박들에 대해 주시는 대답도 사실 명제들로부터 당위 명제를 끄집어내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어떤 의도 하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반칙왕님에게 한 대답을 보죠.
 "반칙왕님은, "모든 사실 명제가 당위 명제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기 위해 본문에다 그 예를 제시하셨지요? 그렇다면 방금 본문에 써놓은 그 예들은, 반칙왕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가 됩니다. 즉, 그 사례들은 반칙왕 님의 '주장을 위한 맥락'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제시하신 사례들 '자체'는 '지극히 사실 사태를 기술하거나, 논리적 사실을 기술하는 사실적 명제'일 수 있지만, 이미 '활용' 문맥에서 '당위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실 명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왜 이 사실 명제가 '당위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당위'라는 말의 의미를 부당하게 확장한 것이죠. 어떤 특정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들은 단지 그 주장과의 논리적 연결관계 내에서만 일종의 힘(논리적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증명을 이끌어내는 명제들 간의 논리적 연결관계에 당위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명제/당위 명제를 구분한 뒤, 후자가 전자를 포괄한다는 점을 입증하려면, 전자에 후자의 속성이 있다는 점을 밝혀야지, 후자가 전자의 속성도 포함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후자가 전자의 속성을 포함한다면, 이는 후자와 전자는 구분되지 않는다거나, 더 나아가 전자가 후자를 포괄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뿐입니다. 즉, 모든 사실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당위란 말 속에 논리적 강제력까지 포함시킨다면, 이는 증명 과정 중에 당위란 말의 의미 자체를 변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alleviate님은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는 구분될 수 없다는 이야기와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라는 이야기를 뒤섞고 있는데, 이는 당위라는 개념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위란 논리적 연쇄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의무는, 그저 이 말이 옳다, 받아들여라라는 강제가 아니라 특정한 실천 규범들입니다. '1+1=2'이 직접 내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규범을 명시하지 않고서는, 이 명제가 당위 명제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제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오스틴에 따르면(혹은 그에 대한 제 해석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맥락에 따른 언어 수행적 명제이고, 이 언어적 행동 안에는 사실을 확언하는 행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 모든 명제는 발화되면서 가치 명제가 된다는 말은 맞을 수 있지만 이 때의 가치는 '사실에 대한 확언, 주장'도 포함되는 폭넓은 것이어야 하며(아마도 이렇게 되면 '가치'란 표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constative/performative의 구분을 중심에 놓으면서, 사실/가치의 구분은 여전히 유지되는 편이며, 이 구분을 오스틴은 실천, 행위의 측면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나을 듯 합니다),  2. 모든 명제는 발화되면서 당위 명제가 된다는 말은 틀렸다고 봅니다.

2. 그러므로 저는 당위 명제라는 말을 가치 명제로 바꾸고 입증하고자 하는 포인트를 명확히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제안은 원래 alleviate님의 주장, 즉 모든 명제는 당위 명제란 주장을 모든 명제는 맥락의존적이며 가치의존적이라는 주장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오스틴과 별개로 이것이 alleviate님이 하고자 하는 원 의도에 가까워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꾸면 뻔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대신 쓸데 없는 오해와 논란을 없애고 논의를 명료화시킬 수는 있죠. 더 나아가 오스틴의 논의를 경유하면서 한 가지가 추가됩니다. 명제의 맥락의존성은 지식의 절대성을 회의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지식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가 됩니다. 즉, 어떤 조건들 하에서 우리는 사실 명제를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게티어 반론은 흥미롭습니다. 영미 철학적 맥락에 익숙치 않고 또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 반론 자체가 그다지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습니다. 언급하셨던 대로, 이미 데카르트가 이와 유사한 반론을 한 바 있죠(물론 게티어 반론은 영미철학 내의 논의에서는 그와 구분되는 함축을 가지겠습니다만). 제가 철학사적 틀을 떠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반론이 지식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반론 자체가 이미 참된 절대적 지식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게티어 반론에서 드러나는, 참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이 그럼에도 지식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 실재와 필연적인 연관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객관적 실재와 연관을 맺지 않을 가능성, 참되고 정당화된 믿음이 실재와 우연히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이미 우리가 어떤 참된 지식을 알고 있을 때에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철수가 어떤 지식을 갖고 있을 때, 그는 이 지식이 참된 지식인지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가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즉 철수는 그 지식이 틀렸을 가능성 자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은 그가 지식과 지식이 아닌 것을 검증할 수 있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지식이 자신이 인식하는 사실과 부합하며 다른 이들에게 정당화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판단합니다. 게티어 반론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런 철수의 지식을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다른 절대적 지식을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영화 세트를 실제 기와집으로 믿고 있는데, 이런 믿음의 오류 가능성은 그 기와집이 영화 세트라는 절대적 지식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이것은 이미 퍼트남이 제시한, "통 속의 뇌" 가정을 반박하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사실 이런 논리는 소박 실재론을 비판하는 칸트에게서 이미 발견됩니다. 우리가 실재와 달리 현상만을 지각하기 때문에 실재와 다른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주장은 오직 실재가 현상과 다르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며, 그런 한에서 우리는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앎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실재와 다르며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없다라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입니다.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재에 대해 잘못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오직 실재에 대한 참된 앎과 동시에 오류로 밝혀질 뿐입니다. 스피노자가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기준이라고 얘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실재에 대한 "절대적" 무지 속에 빠질 수 없으며 항상 참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누구에게 있는가이죠.
 게티어 반론은 우리의 앎이 실재와 완전히 유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그러한 완전한 유리 자체가 이미 실재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므로), 우리 앎이 유한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지식은 참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견해는 지식이 경험적, 논리적 기준을 공유하는 하나의 인간 공동체 내에서만 생산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사실 하나의 공동적인 주관성이며 그런 한에서 유아론적인 것입니다. 게티어 반론은 이런 유아론적 주관성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주관성은 실재 자체와 만남으로써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주관성을 통해 깨어진다는 점입니다. 철수의 지식을 그릇된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참된 지식을 소유한 또 다른 어떤 자이지, 실재 자체가 아닙니다. 게티어 반론은 실재 자체가 철수의 지식을 그릇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따라서 철수가 자기의 검증 기준 내에서 스스로의 믿음을 그릇된 것으로 기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수의 지식은 실재와 맞아떨어집니다. 다만 "우연히" 그러할 뿐인데, 이 "우연성"을 철수는 자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게티어가 자신의 반론 속에서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어떤 주체, 그 우연성을 알고 그 우연성을 말할 수 있는 주체만이 철수의 믿음을 그릇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이란 이처럼 항상 "어떤 타자에 의한" 반증의 테스트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이는 포퍼식의 실증주의적 반증 테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반증 방식들이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한에서 포퍼가 비판했던 정신분석학이나 맑스주의도 반증될 수 있는 과학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반증들은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점이며 따라서 검증/반증 테스트 자체를 어떻게 규정 내지 표준화, 단일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양한 반증들이 가능하도록 상이한 검증 기준들을 가진 공동 주관성들(미래의 주관성들까지 포함하여)을 관계맺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를 끌어오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되는가? 제가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는 이런 확실성을 비판하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이란 어떤 사물, 대상과 같이 고정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어떤 상태, 보다 정확히는 매일 우리가 행하는 실천들 자체입니다. 그 나날의 다양한 실천들을 우리가 단 하나의 낱말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 실천들이 마치 사물과 같이 고정되어 실재와 1:1 대응을 하는 듯 착각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가질 수 있는 함축들과 귀결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와 생각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이런 아이디어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우리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에서 비롯되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논쟁에서 벗어나 지식과 과학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갈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상대주의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절대주의적인 방식으로, 즉 고정된 어떤 사물로서 실재와 1:1 대응하는 것으로 개념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화를 버릴 경우 우리는 검증기준을 공유하는 유아론적 주관성들, 이 주관성들이 맺는 관계들, 이 관계에 역사, 시간이 포함되는 방식들 등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과 실재 사이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지식과 실재의 일치가 지식 "내부에서" 변화하는 양태들입니다. 이렇게 지식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절대주의/상대주의 논쟁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준다는 것이, 제가 오스틴과 게티어를 경유하는 alleviate님의 논의를 유의미하게 맥락화하는 방식입니다.

3. 이와 별개로, 논쟁의 와중에 제기된 논의에 대해 한 두 마디 해두고 싶습니다.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의 논리적 도출에 관한 존 설의 주장에 대한 옹호 중에 설득력 있는 것은 칼도님의 반론입니다. 약속이 제도인 사회에서 약속을 하면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부과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논리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여전히 이 둘이 논리적 도출 관계로 엮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의무가 있다"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사실 명제일 수 없습니다. 이건 "해야 한다"는 당위를 사실 명제처럼 보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우리는 의무를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인칭이고 다른 하나는 3인칭입니다. 전자의 관점에서 의무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따라서 자연적,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귀결되는 기계적 결과가 아니라 나의 의지적 노력과 자유로운 선택(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의한 행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의무는 사실과 구분됩니다. 다음으로 3인칭 관점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다른 이가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실제로는 의무를 부과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철수는 법을 지켜야 한다"란 말을 생각해보죠. 여기에서 "지켜야 한다"란 말에 대응하는 실제적으로 관찰가능한 사실이 있습니까? 의무는 감각적으로 관찰가능한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의무는 오직 의무를 주는 자와 의무를 수행하는 자의 관계 안에서만 유의미하게 말해질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철수는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철수에게 법을 부과하는 자와 같은 입장에서 이 의무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만 의무의 핵심인 이 "~해야 한다"의 강제력이 포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류학이 그러하듯이 어떤 의무를 순수하게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 기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연장자가 어린이를 공경해야 한다"와 같은 경우에서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런 기술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의무 관계를 기초로 단지 다른 내용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기술에서 순수하게 사실 기술인 것은 연장자와 어린이가 맺는 관계이지, "~해야 한다"는 말이 가진 강제력 자체는 사실 기술의 대상이 아닙니다. 즉 이 기술은 "~해야 한다"는 당위의 형식에 어떤 사회는 연장자가 어린이를 공경한다는 사실 내용을 넣어놓은 것입니다.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에서 "~해야 한다"의 당위적 관계 속에 이미 들어가 있고 그런 관계의 형식을 다른 사회에 "투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회에서 "어떤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게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찰처럼 보이는 것도 의무는 의무 관계 속에서만 파악되기 때문에 항상 이미 의무, 당위의 차원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의무를 부과한다"란 말은 지금의 논의에서 기초적인 술어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표현을 마치 어떤 객관적인 물건을 주는 사태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칼도님이 "1) 사실: 약속이 제도인 사회에서, 그리고 해당 사회의 모든 성원이 암묵적으로나마 약속 제도에 동의한 경우, 약속 행위는 약속한 이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라고 쓰셨을 때, 여기에는 이미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덕하님의 입장에 대해 간략한 질문입니다. 이건 직접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일단 생각난 김에 여기에 적어두겠습니다. 답변이 없으면 다시 직접 여쭈어보도록 하죠. 이덕하님은 alleviate님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면 C는 “약속을 지켜야 모든 사람에게 이로우니까”라고 상당히 칸트스러운 답을 내놓습니다. 저는 이런 C의 답변이 칸트의 오류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답이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를 가정하고 있음에도 칸트와 C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칸트는 의무론적 윤리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입니다. 그는 도덕 법칙을 선이나 악에 대한 내용적 규정 위에 정초하는 일에 적극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칸트는 왜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느냐란 물음에 대해 그것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적인 대답을 내놓으면서 도덕 법칙을 최상의 원칙으로 올려놓은 사람이라는 얘기죠. 이덕하님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이롭다라는 공리주의적 대답을 "상당히 칸트스"럽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다른 글들에서, 이덕하님은 과학의 교권과 윤리의 교권을 철저히 분리하려는 입장을 보여주셨는데, 이런 입장만큼 칸트적인 입장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