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자의 도그마와 빈 서판론자의 도그마
 

단순화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연구할 때 빈 서판론자들은 “타고난 인간 본성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환경, 문화, 경험, 교육 때문이다”라는 도그마에서 시작하는 반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타고난 인간 본성이 있으며 이 인간 본성은 상당 부분 자연 선택에 의해 주조된다”라는 도그마에서 시작한다.

 

빈 서판론자들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타고난 인간 본성이 전혀 없다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본성이 없다는 쪽의 결론을 사수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오직 너무나 증거가 강력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들은 어떤 표현형이 타고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확실하지 않을 때에 그들은 항상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다”라는 명제에 집착한다. 이것이 그들의 연구 전략이다.

 

 

 

 

 

진화 심리학의 출발점: 착상과 부족한 실증
 

여기서 “부족한 실증”이라고 부른 것에는 대중의 상식, 전체 학자들 사이의 상식, 특정 학파 학자들 사이의 상식, 충분히 엄밀하지 않은 연구 결과 등을 포괄한다. “남자는 늑대다(남자가 원하는 것은 성교다)”, “인간은 원래 질투를 하도록 생겨먹었다”, “두들겨 맞고 좋아할 사람 없다”, “계모는 원래 구박하기 마련이다”와 같은 대중의 상식들이 있다. 남녀 성차에 대한 온갖 불완전한 연구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착상의 주요 양상은 자연 선택과 연결된다. 계모와 관련하여 진화 심리학자들은 아주 쉽게 친족 선택의 논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친족 선택 논리에 따르면 자신의 유전적 친족을 잘 보살피는 것이 유리하다. 계모의 입장에서는 의붓자식은 유전적 자식이 아니다. 따라서 의붓자식을 구박하는 것이 적응적일 수 있다. 이런 착상이 계모는 보통 구박을 한다는 대중적 관찰과 결합하면 하나의 가설이 탄생한다: 친족 선택의 논리에 따라 인간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을 의붓자식에 비해 더 사랑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여러 비판자들의 집요한 비난과는 달리 진화 심리학자들의 착상은 자연 선택과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비만과 관련하여 진화 심리학자들은 다른 식의 착상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는 먹을 것도 풍부하고 현대인들은 운동도 잘 안 한다. 이것은 인간이 오랜 기간 진화했던 사냥-채집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여러 관찰에 따르면 미국 같은 선진 산업국에는 비만 인구가 많은데 비해 현존하는 사냥-채집 사회에는 고도 비만을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현대와 과거의 환경 차이에 대한 착상과 여러 사회에 대관 관찰이 결합하여 하나의 가설이 탄생한다: 인간의 지방 축적 메커니즘은 먹을 것이 부족했고 운동을 많이 해야 했던 사냥-채집 사회에 맞추어 자연 선택에 의해 조율되었기 때문에 현대 산업국과 같이 먹을 것도 많고 운동도 잘 안 하는 사회에서는 비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비만은 신체적인 것이므로 진화 심리학과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고픔, 움직이기 귀찮음과 같은 것이 심리적인 현상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화 심리학의 착상 방식은 이 외에도 매우 몇 가지 더 있다.

 

 

 

 

 

착상과 가설 정립이 더 어려울 때와 가설 검증이 더 어려울 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착상과 가설 정립이 매우 어려운 사례다. 아인슈타인은 십여 년 동안 노력해서 1915년 논문을 발표할 때 그 뼈대는 다 완성했다.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은 오히려 노가다에 가까웠던 것 같다. 물론 일반인도 누구나 쉽게 검증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아니더라도 가능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전문 물리학자의 노가다는 일반인이 흉내도 못 내는 고난도 작업이다.

 

반면 진화 심리학 가설의 경우에는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즉 착상과 가설 정립이 오히려 노가다에 가깝다. 진짜 어려운 일은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여러 비판자들이 진화 심리학이 “그럴 듯한 이야기(just-so story)”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진화 심리학을 적용한 그럴 듯한 이야기는 정말 매우 쉽게 만들 수 있는 반면 그것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검증하는 일은 요원할 때가 많은 것이다.

 

 

 

 

 

진화 심리학이 적응 만능주의라고?
 

Richard Lewontin과 Stephen Jay Gould는 진화 심리학이 적응 만능주의라고 비판한다. 빈 서판론자들이 “인간 본성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환경 탓이다”라는 도그마에 매달리듯이 그 반대편에서 진화 심리학자들이 “인간 본성이 있으며 모든 것이 자연 선택 탓이다”라는 도그마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빈 서판론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환경론에 바탕을 둔 가설에 끝까지 집착한다. Lewontin과 Gould에 따르면 그 대척점에 있는 진화 심리학은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적응론(자연 선택 탓이다)에 바탕을 둔 가설에 끝까지 집착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빈 서판론자들이 환경론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은 적응론에 그런 정도의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비만과 관련하여 잠시 살펴보았듯이 진화 심리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적응론에도 의존하고 부산물론에도 의존한다. 유전적 부동에 의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 식으로 연구하려면 전지전능해야하기 때문이다. 유전적 부동과 관련해서는 『진화 심리학의 이론적 기초(version 0.8)』 중 “14. 자연 선택과 유전적 부동”을 참조하라.

 

부산물론에도 의존한다는 것의 의미는 때에 따라서는 환경론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만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인기 있는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비만을 주로 현대의 환경으로 설명한다.

 

 

 

 

 

행동 유전학이 유전자 만능주의라고?
 

자식의 어떤 특성이 부모를 닮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유전자 때문인가? 아니면 환경 때문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연구해 보아야 안다”이다. 왜냐하면 유전자 때문일 수도 있고, 환경 때문일 수도 있고, 둘 모두 일정 부분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 유전학자들의 상식이다. 행동 유전학자들은 쌍둥이 연구, 입양 연구 등을 해서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분리해 본 다음에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반면 빈 서판론자들은 상관 관계에서 인과 관계로 직행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인과 관계는 환경적인 것이다. 예컨대 엄마가 아이에게 하루에 몇 단어나 이야기하는지를 측정하고 나중에 아이의 언어 능력을 측정했는데 둘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즉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많이 할수록 아이가 나중에 말을 더 잘한다고 하자. 이 때 빈 서판론자들은 아이의 우월한 언어 능력은 엄마가 말을 많이 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은 정당하지 않다. 적어도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엄마가 말을 많이 해서 그 학습 효과로 자식의 언어 능력이 좋아졌을 가능성. 둘째, 어떤 유전자가 말을 많이 하도록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말을 잘 하도록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데 엄마가 자식에게 유전자를 물려주기 때문에 둘 사이의 상관 관계가 발견되었을 가능성. 셋째, 첫째와 둘째 요인이 모두 작동했을 가능성.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상관 관계에서 인과 관계로 무턱대고 직행한 빈 서판론자들이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20세기에는 그 반대로 유전적 요인도 고려하려고 했던 행동 유전학자가 성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 자본주의 체제 옹호자, 사이비 과학자라는 비난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행동 유전학자의 도그마는 “유전자가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지만 그들은 무턱대고 모든 것을 유전자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행동 유전학자들은 되도록 엄격한 통계학을 적용하여 환경 요인과 유전 요인의 비율을 알아 내려고 한다. 이것이 행동 유전학자들의 핵심 개념인 유전률(heritability)의 의미다.

 

 

 

 

 

불확실한 시작점에 대한 비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진화 심리학자들은 “착상”과 “부족한 실증”에서 시작하여 가설을 정립하고 그것을 검증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왜 부족한 실증에서 시작하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 같다. 즉 가설 정립 과정에서부터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과학자가 가설을 어떻게 만들어내든 그것은 과학자의 자유다. 어떤 사람은 꿈에서 가설을 만들기도 한다. 적대적인 과학자들이 상호 비판을 할 때에는 “당신은 가설을 이런 절차를 거쳐서 만들었으니까 틀려먹었다”라는 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의 초점을 과연 그 가설이 얼마나 검증되었느냐에 맞추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충분히 검증되지도 않은 가설을 발표하느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면서 물리학에 비해 또는 심지어 동물을 대상으로 한 진화 생물학에 비해 훨씬 부실하게 검증된 가설을 발표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이것도 웃기는 비판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당시에는 가설)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을 때인 1915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이 검증되었나? 어느 정도 검증된 것은 몇 년 후에 일어난 일식 때였다. 과학자는 심지어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가설도 제출할 권리가 있다. 학술지에서는 물론 잘 검증된 논문이면 더 실어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검증되지 않았거나 허술하게 검증된 가설이라고 하더라도 가망성이 크다고 생각하면 실어준다. 이 때에 학술지 편집자들은 감(educated guess)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떤 현상에 대한 진화 심리학 가설의 검증 정도를 동물 행동학 가설의 검증 정도와 비교하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을 대상으로 잔인한 실험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인간은 여러 모로 다른 동물에 비해 복잡하기 때문에 인간과 관련된 가설을 검증하기가 대체로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 질투에 대한 진화 심리학 가설은 갈매기 질투에 대한 동물 행동학 가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질투에 대한 페미니즘의 가설이나 정신분석의 가설과 경쟁하는 것이다. 설사 진화 심리학 가설이 동물 행동학 가설에 비해 훨씬 덜 검증되었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의 가설이나 정신분석의 가설에 비해 또는 다른 여러 가설들에 비해 증거가 더 많다면 가장 유력한 가설도 인정 받아야 한다.

 

 

 

 

 

빈 서판론자들은 자신 눈에 박힌 들보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장 3-5, 표준새번역)

 

성경에 이렇게 훌륭한 말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별로 실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진화론에 온갖 시비를 건다. 물론 진화론에는 “티”가 있다. 누구도 현대 진화 생물학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티”는 기독교식 창조론의 “들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진화 생물학의 불완전함을 지적하면서 “나는 진화론을 못 믿겠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식 창조론의 엄청난 허무맹랑함은 그냥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평성의 원리에 크게 어긋나는 처사다.

 

나는 비슷한 일이 빈 서판론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가설이 부실하게 검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학술지나 책에 발표되는 사례는 수도 없다. 하지만 빈 서판론자들이 철석 같이 믿는 가설들은 아예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현상의 재기술(redescription)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빈 서판론자들이 진화 심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Thomas Kuhn은 어떤 이론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안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화 심리학 가설에 시비를 걸고 싶으면 대안 가설을 제시해야 한다. 진화 심리학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보다 열등한 가설을 믿지는 말아야 한다.

 

 


2009-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