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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R 클럽 토론게시판의 A.K.D.4. 님의 글입니다. 이 글을 퍼온 이유는 특이점보다는 유사점이나 영향받은 지점들을
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인듯 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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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창조설화는 고대 바빌론이나 앗시리아의 신화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바빌론의 창조신화인 에뉴마 엘리쉬(Enuma Elish : 기원전 1900~1700)를 보면
남신인 마르둑과 여신이 티아맛이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승리하고 티아맛을 죽여
티아맛의 몸을 소재로 천지를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대개 이 시대의 신화들은 남신과 여신의 싸움이 등장하고 결국은 남신이 승리하는데
이것은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진행되는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화란 대부분 이와 같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에뉴마 엘리쉬에 보면 마르둑은 티아맛측의 총 사령관인 킹구를 제압한 후, 그의 피와 흙을
섞어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들에게 고된 노동의 의무를 부과합니다.
"내가 피를 만들고 뼈대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야생인을 만들고 그의 이름을 "인간"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야생 인간을 만들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을 섬기는 의무를 부과하며
신들은 편히 쉬게 될 것입니다" - 에뉴마 엘리쉬 중
바빌론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부터 마르둑에게 대항했던 반란자의 피와 흙으로 만들어진
반역의 존재이고, 신을 위해 봉사하고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지배계층 - 신의 현현인 왕족과 그 후예인 귀족, 그리고 일반 백성간의
지배/피지배 구조의 정당성의 근거가 됩니다.
앗시리아의 창조 신화인 아트라하시스도 비슷한데, 여기서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하위층의 신들의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 고위층의 신들이
인간을 창조하여 노동을 전담시키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두가지 고대 신화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은 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또는 고된 노동을 시키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창조설화는 바빌론 신화를 빌려오지만
그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히브리 사람'들의 출신성분이
도망친 노예, 도시국가의 농노, 유랑자 등
당시의 피지배계급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일것입니다.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영'이 깃든 존재라고 합니다.
신의 일부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반역한 신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주의 일부로 만들었고
신을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만든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동'에 대한 개념도, 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었듯이
인간도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는, 신과 똑같은 조건의 노동에 대해서 말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휴식'하지 않으면 진노하는 하나님에 대해 볼 수 있습니다.
몇가지 관련구절을 보자면
(출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9]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 23:10-11) 『[10]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11]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레 26:33-35) 『[33] 나는 너희를 여러 민족 사이로 흩어 버리고, 칼을 뽑아 너희 뒤를 쫓게 할 것이다. 너희가 살던 땅은 버려진 채, 거칠고 쓸모 없이 될 것이며, 너희가 살던 마을들은 폐허가 될 것이다. [34] 그 때에야 비로서,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땅이 그렇게 폐허로 버려져 있는 동안에, 비로서 땅은 쉴 것이며, 제 몫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35] 너희가 그 땅에 사는 동안에는, 안식년이 되어도 땅이 쉬지 못하였지만, 폐허로 버려져 있는 동안에는 땅이 쉴 것이다.』
이와같이 고대근동의 신화들과 창조설화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왕족,귀족,평민 할것 없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며
노동은 신과 지배계층을 위해 휴식없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에게 선물한 '일할 권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창세기의 인간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들이 마치 성도들을 신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들인양 가르치고
노동자들이 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하는 현 사회의 모순에 대해 외면하는 것은
철저히 반성하고 앞으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신화학적인 관심사는 상당히 유발하는 주제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1) 만약 '안식일에 취하는 휴식' 역시 '신이 명한 의무'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율적인 권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전히 신에 속한 문제로 남게 됩니다. 이것으로부터 '권리론'을 도출하는 것은 별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나아가 '신을 위한 봉사의 의무'와 '신에게서 위임된 노동의 권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상충하지 않는 개념인 것으로 보입니다.
(2) 인간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시간 외에 정말 노동만 해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는(즉, 오래 써먹을 수 없고 그래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배층이 바보가 아니라면, 아무리 가혹한 조건의 노동자라 하여도 어느 정도 쉬는 것은 불가피하게 용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어차피 쉬지 않고 일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얼마간 정기적으로 휴식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집단적 생산성을 높이기에 편리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7일에 하루 쉬는 '의무/권리'가 효율적인 노동시스템을 창출하는 일종의 '균형'이었다면, 의무나 권리라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포스트포디즘적인 양합게임의 결과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결코 그 본질적인 측면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모든 것에서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데올로기 개념이 왜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가축과 종과 나그네, 심지어는 땅까지도
쉬어야 한다는 것, 신인 나도 쉬었으니 너희들도 쉬어야 한다는 것 - 이건 동시대의 다른 종교들이나 신화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강력한 유토피아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이 인간이 복종해야 하는 신의 명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형상이
갖는 절대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레토릭입니다. 다른 한편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타율에 따르는 것이 아닌데, 복종의
근거가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사 신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유사 신적인 행위
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가능)과,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당위)의 문제는 종교적인 언설의 해석 문제에서 종종 혼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만약 신이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상황이 주어졌다면, 결국 그것은 신의 동어반복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언설이므로 가능한 해석 중 최적의 해석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기독교가 그 당시 선택가능했던 종교들 중에서는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점은 (당연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위 덧글에서 지적한 것은, 그러한 언설로부터 현실문제가 실제로 해결될 수 있을 수준의 무언가를 유도하겠다는 것에 회의적으로 기능하는 가능한 한 반대 해석일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칼도님의 해석을 적어도 그 역시 가능한 한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수긍해야 합니다.(물론 '개인적'으로 쉽게 수긍할 수 없어 보이는 부분도 보이기는 합니다만-'유사 신적인 것'은 존재론적으로 신 이후에 놓이는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이것은 더 큰, '본질적인' 타율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의무'에서 '권리'로 나아가는 연결고리는 찾지 못하겠네요. 헌데 어쩌면 이 논의는 당장 해결될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개념의 규범적 성격이 명확하게 적시되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반면, '유사 신적인 것 하나하나'(즉 모든 인간!)에 유사-신적이라는 것만으로 실질적인 권위가 부여되고 있었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구요.-) 그러면 문제는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최적의 해석이냐인데, 본문에서 상황 변화의 촉구를 위해 의존하는 것은 '현실의 당위'(일의 노예가 된 노동자)입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더 좋은 해석은 교리 내부에서 순환하는 정도의 해석이 아니라, 교리 자체를 과감히 의심할 근거를 마련하여 '인간(일의 노예가 된 유사-신)'의 이득에 좀더 잘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교리에서 역사적-신화적인 것(인간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해내는 것은 인간의 몫이니까요.
물론 저 역시 엄밀한 근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제 해석이 더 '좋다'고 할 명확한 근거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그 '방향'만은 맞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하신다면 추가 논의는 이쪽에 대한 것이 되겠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마 칼도님과 저의 입장 차이는 사실상 별로 크지 않아 보입니다.
신이 행하는 동어반복이라는 형태를 취한, 우리는 거의 신과 같으므로 거의 신과 같아져야 한다는, 인간의 자기 비판이자
자기 승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죠. 소외된 세계/인간의 이데올로기적 보상이 아니라, 아주 현세적이고 적극적인 유토피아
적 지향의 '반성'형상들이 기독교의 가장 오랜 자원들에 있다는 것입니다.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의 무언가가 그 자원들로
부터 유도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철학의 구성에 그 자원들이 긍정적 자극을 주는 것
은 틀림없을듯 합니다. 제가 도킨스같은 이들의 자유주의적인 기독교 비판을 소박한 것으로 보고 지젝식의, 기독교 전통
비교우위론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도 그런 생각 때문입니다.
다음은 제가 좋아하는 <구약>의 가장 래디컬한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구약 전도서 9 : 4 -10] [개역개정]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
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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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도, 지옥도, 최후의 심판도, 영생도, 영혼도, 내세도 없다. 오직 이 땅에서의 한번 뿐인, 즐겁게 살아야 할 삶이
있을 뿐이다. 땅에서 온 사람(The Man from Earth)의 메시지는 <구약>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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