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학교 일로 바빠서 컴퓨터를 할 시간이 많이 없네요.. 갑자기 수학의 난이도가 높아져서 대충 쌓아둔 걸로 그냥저냥 때우는 게 한계에 도달했는지라 이번 학기엔 정말 공부를 해야겠군요. -_-;; 게다가 논리학이나 집합론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수학기초론 스터디그룹을 짜 놨는데 이쪽에도 발목이 잡히네요. 이래저래 아크로 활동은 뜸해질 것 같습니다..

# 저작권 문제 시 즉시 삭제합니다.

요즘 터키나 이스라엘 언론, 알자지라 등을 둘러보면 흥미로운 칼럼은 많은데 번역할 걸 고르는 게 힘드네요; 그래서 일단 칼럼 번역은 잠시 미루고 요 근래 관심이 가는 '러일전쟁이 서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관련된 논문 하나를 번역하겠습니다. 별 생각 없이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을 잠깐 훑어보다가 필자(요네하라 마리, 일본인)가 터키에서 '도고(도고 헤이하치로)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며 좋은 대접을 받는 에피소드를 읽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주제예요.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서아시아 이슬람권 관계 서적에서 비슷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고..

관련 한국어 문헌은 단행본만 일단 좀 뒤져 봤는데 국가보훈처에서 나온 『형제의 나라, 한국과 터키 : 터키군 6·25전쟁 참전사』(2007)라는 책에 간략한 언급이 있는 정도네요. 책을 당장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은데, 대강 러일전쟁 이후로 오스만 제국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이 꽤 좋아졌고, 나중에 한일합방 이후 한반도에 터키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일제의 비호 아래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다가 해방 이후 좋지 않은 한국인들의 인식 때문에 지리멸렬되었다는 내용이었죠.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찾기 힘들어 보이고.. 영어로 정리된 문헌은 검색에는 몇 개 뜨는데 제가 당장 접근할 수는 없어서 도서관에 구입 주문을 넣어 놨습니다..만 언제 볼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네요. 이하 번역글은 영문으로 된 짧은 논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주석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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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내용이 똑같이 반복되는 부분은 빼서 분량이 좀 줄었습니다.)

러일전쟁이 오스만 제국에 끼친 영향

- 셀추크 에센벨(Selcuk Esenbel, 이스탄불 보아지치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일본-이슬람 관계 저널 <신월(신게쓰, Shingetsu)> 4권, 2008년 9월.



초록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이들이 러일전쟁을 억압받던 이의 승리로 여겼으므로, 민족주의 및 반제국주의의 물결에 일본의 승리가 끼친 심대한 영향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스만 제국에서 전통적인 전제정 개념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여, 무슬림과 아시아의 반대파들이 입헌주의를 더욱 강력히 요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러일전쟁의 정치적 영향력을 검토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패배는 일본과 투르크 및 이슬람 세계의 접촉에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자체의 해체가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서론


1904년 2월 10일, 일본과 러시아 간의 선전포고로 전통적으로 러시아와의 최대 경쟁 상대였던 오스만 제국은 열광했지만, 제국에 대한 전쟁의 최종적 영향은 재앙과도 같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만주에서 러시아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기념할 만했지만,  오스만 정권은 러시아 제국을 적대하지 않기 위해 주의깊게 계산된 중립 방침을 따랐다. 한때 오스만 제국은 발칸 전역의 헤게모니를 쥐고 아라비아 반도까지 강역을 넓혔던 세계제국이었지만, 18세기에 오스만인들은 러시아에 흑해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러일전쟁 이전 몇십 년 동안에도 오스만 정권은 1877-187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대패배로 인해 캅카스 지역에서 물러나고 발칸에서 점점 지배력을 잃어 가는 상황이었다. 제국의 해체는 계속되었다. 1881년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했고, 1885년 동부 루멜리아는 불가리아에 합병되었으며, 오스만 당국과 그리스 반군 간의 싸움 후 1898년 크레타 섬이 국제적 통제 하에 놓였다.


대중적 열광, 공식적 중립


러일전쟁기 동안 일본에 대한 오스만인들의 열광은 진실된 것이었다. 당대의 저널리스트 이브라힘 할릴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셀라니크(살로니카)에서 출판되는 일간 아시르(Asir)를 사 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을 지지하는 신문이었다. 신문 사설은 일본인들에게 왜 사원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자가 없느냐고 묻고, 투르크 기도자라면 족히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 했다." 무슬림 신문들은 억압받던 동양인이 무적의 서구에 대항해 승리한 것으로 일본의 승리를 묘사했고, 당시의 많은 이들처럼 터키의 민족주의 페미니스트 할리데 에딥(Halide Edip)은 일본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토고(Togo)로 지었다. 오스만 대사관들은 시시콜콜한 데까지 전쟁 소식을 좇았다. 중립 세력으로서 이스탄불 정부는 페르테브 베이(Pertev Bey) 대령을 참관인 자격으로 국제 군사 참관인단에 파견했는데, 이는 오스만 육군을 재조직하는 데 12년을 바친 콜마르 폰 데어 골츠 장군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페르테브 베이는 만주에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3군단과 동행했고, 뤼순의 함락을 지켜보았다. 전후에 그는 회상록과 책에서 터키 젊은이에게 지침을 제시할 목적으로 간략하게 일본사를 소개하고 러일전쟁을 분석하였다. 그는 일본의 승리에서 물질적 바탕뿐 아니라 정신적 각오가 수행한 중차대한 역할을 강조했다.


일본 지지 여론을 고려하여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오스만 정권은 세심한 계획 하에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중립 방침을 따랐는데,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1878년 러시아에 패배한 후, 술탄은 (러시아에) 협조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물론 1890년 메이지 일본과 직접적 관계를 맺어 북방의 적에 대한 잠재적 동반자로 삼으려 했던 시도가 있기는 했다. 이때 술탄은 서구 제국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술탄의 범이슬람주의적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친선 임무를 띤 프리깃함 에르투으룰(Ertugrul)을 메이지 천황에게 보냈다. 이 불행한 임무는 에르투으룰이 와카야마현의 해안에서 침몰하고 승선원 대부분이 익사함으로써 비극적으로 끝났다. 또한, 열강들과의 협정에서 동등한 특권을 얻으려는 일본 측의 완강한 고집 때문에 일본과 외교 및 상업적 조약을 맺으려는 오스만 관료들의 열정은 한풀 꺾였다.

오스만 언론은 술탄의 검열 하에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일본을 옹호하는 사설은 금지당했으며 오로지 전장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만 보도해야 했다. 1890년의 에르투으룰 사건 이후 이스탄불에서 동업자 나카무라 겐지로와 사업을 했던 야마다 도라지로는 투르크 세계-특히 이스탄불-에서 받은 인상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들이 아시아 인종이며 투르크인들은 일본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스만 측 기록에 의하면 오스만 정부는 '일본의 자연재해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동정적인 무슬림들이 야마다와 나카무라에게 준 상당액의 기부금을 가져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전략적 사정


전쟁 동안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와 영국-영국은 1902년의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이에 붙들려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흑해함대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가하라는 강력한 러시아의 압력에 맞닥뜨렸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함대가 다르다넬스 북쪽에 머물도록 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직면했다. 크림전쟁의 결과 체결된 1856년의 파리 조약 이래로 흑해함대는 지중해로 나갈 수 없었다. 1870년 러시아가 함대를 재구축하긴 했지만, 무기나 군수품을 적재한 전함의 통과를 금지하는 1891년의 오스만-러시아 협정에 의해 여전히 보스포루스를 통과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에 이스탄불의 일본 측 대변인들은 보스포루스 주변과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명예 영사이자 중개인 자격으로, 야마다와 나카무라는 갈라타의 제노바 탑에 20명의 인력을 배치하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척에서 관찰하였다.

야마다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나카무라와 함께 빈의 일본 대사 마키노 노부아키에게 러시아 함선의 통과에 대해 보고했다고 썼다. 1904년 7월 4일, 자원 선단(the Volunteer Fleet)에 속하는 러시아 상선 페테르부르크와 스몰렌스크는 총기와 탄약을 적재한 상태로 보스포루스를 지나 수에즈 운하로 향했다. 일본 당국은 흑해의 러시아 전력이 마다가스카르를 지나 극동으로 향하는 발트 함대에 합류할지에 관한 소식을 끊임없이 살폈다. 마쓰타니 히로나오에 의하면, 이때 일본제국 해군이 야마다의 귀중한 보고를 입수했다는 게 중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인들은 이 외에도 오데사에서 출항한 자원 선단에 속하는 배 7척(차례대로 야로슬라블부터 메르쿠리까지)이 1904년 11월 보스포루스를 통과하도록 허가했다. 자원 선단은 무장하지 않은 채로 해협을 통과했고, 크레타의 수다 만에서 그리스의 도움을 받아 무장하고 발트 함대의 페리케르잠 부대(Ferikerzam division)에 합류했다.

러시아 패배의 영향


만주 전장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오스만 세계까지 미치는 충격-단기적이며 장기적인-을 가져왔다.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군사적 패배와 거의 성공적이었던 1905년의 혁명에 의해 로마노프 왕조의 권위가 급격하게 약화된 상황에서 기민하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처럼, 자신을 전제 군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압둘하미드는 1876년 제 1차 입헌 혁명에서의 오스만 헌법 채택을 유보한 이후로 줄곧 전제적으로 통치해 왔다. 반대파들은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망명지에서 비밀리에 청년 투르크당이 결성되었다. 술탄의 관료들이 오랜 적인 러시아의 패배를 축하할 때 그는 전쟁의 결과가 어쨌든 축하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와 차르는 유럽에 남아 있는 유이한 전제군주였기 때문이다. 차르의 패배는 전제정의 원리에 타격을 입혔다. 셀림 데링길(Selim Deringil)은 12월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두마가 소집된 것으로 술탄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니콜라이 2세는 결국 헌법을 받아들였고, 압둘하미드는 이 상황이 오스만 헌법을 부활시키라는 요구에 기름을 붓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일본 승리 이후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물결 역시 거세어졌다. 열렬한 이집트 민족주의자이자 범이슬람주의자이고 메이지 헌법의 예찬자인 무스타파 카밀(Mustafa Kamil)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일본은 놀라운 사례다. 이는 서구 문명을 이용해 아시아에서의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아시아 세력이다." 무슬림 작가들은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의 승리를 '차리즘 독재에 대한 헌정주의의 승리'로서 찬양했다.

청년 투르크당은 쇠잔해 가는 제국을 근대화하는 데 분투하면서 스스로를 '근동의 일본'으로 칭했고, 심지어 일본의 전문가를 초빙하는 방안을 숙고하기도 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패배와 두마의 개원에도 고무되어 헌정 요구를 개진하였다. 마침내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은 제 2차 입헌 혁명을 일으켜 술탄에게 헌법을 부활시키도록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따라 청년 투르크당(및 이전의 청년 오스만당)이 결성된 것이긴 했지만, 메이지 유신과 1905년 일본의 승리는 이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반대 운동을 급진화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역사가들도 언급해 오던 것이다.

국제정치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일본의 승리와 이 여파의 장기적 영향(long-term impact)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러시아 해군의 패배는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온전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당장 관련은 없었다. 당분간,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호전시켰고, 오스만 제국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 지역과의 관계도 좋게 만들었다. 투르크 및 이슬람 세계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7년의 영러협정 이후 성사된 러시아와 영국의 협력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갈수록 빈사지경을 헤매게 되었다. 러시아의 발칸 문제에 대한 간섭, 1912년 이탈리아의 도데카니사 제도(터키어로 오니키 아다) 침공, 두 번의 발칸 전쟁- 이 모두는 러일전쟁의 간접적 귀결이었다. 이로 인해 로마노프의 관심이 다시 서쪽 국경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발칸 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영국이 협력함으로써 청년 투르크당은 터키 분할에 관한 새로운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중에 청년 투르크 지도자들이 독일 진영에 가담하여 오스만-독일 동맹을 맺고 1차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싸우게 된 것은 이러한 세력 관계의 변동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극동에서의 패배 이후 발칸에서 팽창주의를 밀고 나가 오스만 제국의 해체 위협을 배가했다. 오스만-독일 동맹의 패배와 세브르 조약 서명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오스만 국경에서 세브르 조약에 대항한 터키의 독립전쟁은 터키 공화국과 케말주의 혁명을 낳았다. 로마노프의 전제군주가 패배했을 때 들었던 술탄의 불안한 예감은 오스만 제국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었다. 이는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