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아=진여=법계=여래장=불성=여여=열반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 세상(오온으로 이루어진 세계)이 죄된 세계 즉 헛된 세계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할때 알아차리는 세계입니다. 제법무아에서 법은 오온을 의미할 뿐이라는게 올바른 풀이입니다. 무아는 비아를 의미하구요. 즉 오온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오온을 넘어선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알아채고 그것을 바로 진아(참나)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즉 가장 깊은 의미의 공은 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수한 조건이 없는' '조건지워지지 않는'의 의미로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미 성령체험과 견성(열반)사이 유사성에 대해 말하는 분들이 있네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tazor1&logNo=5018757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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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참조하시길 바람

http://blog.daum.net/sunbreez/1895 윤홍식의 견성요결 - 참나와 열반

 

신 중심의 신화적 세계의 경우는 그 당시 조로아스터교나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고레스 이야기가 그거잖아요. 하나님은 그 모든 걸 다 쓰셨다고 봅니다. 구약에서는 수메르 신화도 쓰고 이집트 이야기도 썼잖아요. 그리고 이러한 신 중심의 사고에서는 외부적인 대상에 촛점을 두고 역사성의 관점에서 주로 기술된다고 봅니다. 성경이 하나의 이야기 구조일때 결국 예수 그리스도(신성의 측면)의 십자가로 모든 이야기가 귀결된다고 보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서양의 신 중심 문화와 통하는 거죠.

 

반면 제가 말한 것은 주로 법 중심 특히 신화적 요소를 제거했을때 성경의 내면에 흐르는 바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인도나 중국등 동양적 사고와도 통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샤머니즘과 기복신앙은 있었지마 서양이 신 중심이라면 동양은 법 중심이었고 그 결과 선정중의 성령을 체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한게 많습니다. 성경에 내면을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해보면 신구약을 막론하고 이런류의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다고 보거든요.

 

서양은 성부중심의 사역 동양은 성령중심의 사역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서양에서는 예수와 같은 성자가 동양은 붓다와 같은 성자가 나왔구요. 성자라는 개념이 기독교처럼 예수만 성자다 이런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성부(객관적인 우주를 다스림)와 내면의 성령(내면적인 우주를 다스림)이 있는데 인간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되면(불교식으로 말하면 오지보살에서 십이지보살) 성자수준이 되는데 이 경우 외부의 성부와 내면의 성령을 연결하는 성자가 된다고 보는 거죠. 서양은 예수가 대표적인 그런 분이었고 동양은 붓다였다고 봅니다. 물론 예수가 더 높을 수도 있고 붓다가 더 높을 수도 있는데 그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서양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탄의 이야기가 나오고 동양은 진여와 아뢰아식업장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부활이후 서양은 성령이 내려오는데 그 결과 기독교도 성령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구요. 내면적인 이야기요. 나아가 동양에서도 대승불교에 오면서 조로아스터교등의 영향으로 비로자나불과 같은 우주적 창조주가 등장하구요.

 

동서양이 상호 크로스하면서 초합리성의 이야기가 펼치지고 있다고 보는게 저의 관점입니다.

 

그걸 인간의 에고에서 비롯된 분별지로 자기 지역 자기 종교의 관점에서만 배타적 독점주의로 이해하지는 말자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종교를 통합하고 그러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상호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자는 의미죠. 그래서 제가 배타적 독점주의는 부정하나 배타적 포용주의는 긍정한다고 말씀드렸구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나 불교 내부에서 대놓고 하는 것도 사실 힘들잖아요. 내부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안에서 이단이나 외도로 찍힐까바 이런 이야기를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아요.

 

기독교든 불교는 모두 이런 신과 법의 이야기가 다 있지만 기독교의 성경은 주로 외부적인 성부 중심의 신 이야기이고 불교의 불경은 주로 내부적인 성령의 법 중심의 이야기라는 거죠. 그런데 이게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그 내면에서 흐르는 스토리를 보면 즉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보면 불교적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특히나 예수의 순수한 어록은 특히 불교적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고 불교의 불경도 그 외면에서는 무수한  신화적 이야기와 윤회를 통한 인과응보 나아가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 존재의 이야기가 있다는 거이죠.

 

삼위일체부분만 잠시 언급하면요. 하나님의 존재형식인데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무수히 많다고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즉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자로 존재하는데 그게 반드시 예수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봐요. 사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놀라운건 예수가 인용한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그들을 동시에 신(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하므로)이라고 하고 있으니깐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0장 34~38절]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편 82장 6절]

 

성령세례를 체험한 모든 사람들 나아가 견성한 모든 사람들은 다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하므로 사실상 다 신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죠. 물론 성부와 성령은 근원적 절대로 인간의 외부와 인간의 내면에 관계하는데 성령세례 또는 견성을 통해 깨닫고 거듭나면 그때 삼위일체적이 관계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외부의 모든 만물에서 신성 즉 성부를 느끼므로 무상하다고 바라본 이 세상에서도 어떤 절대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죠. 그게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내면의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어 성령이 원하는데로 살게 되구요. 그 결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각관계가 완성되죠. 이것은 가정의 원리와도 똑같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 엄마 아들딸이 서로 떼어지는 관계가 아니듯이요

 

애시당초 하나님은 아담과도 그런 관계로 존재하고 싶으셨는데 아담이 타락하면서 그게 안되자 다시 맏아들인 예수나 붓다같은 분을 보내서 그들을 통해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삼위일체적으로 결합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죠. 아담이 타락한 결과(또는 윤회하에 있게 된) 인간은 하나님과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데 예수와 붓다는 천국에서 이미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했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을때 인간과 똑같이 그 삼위일체성이 잠시 파기 되었다가 다시 성령체험과 견성을 통해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리고 추가적으로 보면 성경에서 이미 성령체험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곧 성부가 죽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하니깐요. 특히나 죄가 없이 완벽하게 왔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가능하겠죠.(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지 유혹이 없었다는 건 아닙니다. 죄의 유혹을 성령의 인도와 성부의 말에 순종해서 전부 이겼다는 것일 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장 14절]

 

2.

 

아침112님이 아래 제가 언급했던 부분에 대해서 장문의 댓글을 주셨는데 여기서 몇가지 언급하기로 할게요.

 

성경에 대해 제가 근본주의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에 대해 엄격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전 기독교정통신학이 교리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자신의 교리 특히 예수라는 특정교주를 믿는 사람만 구원이고 나머지는 모든 인류를 지옥이다라는 교리 즉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 교리가 가지는 문제점의 측면에서 성경의 기록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 극히 신뢰할 만하다는 입장이신데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나 바트어만과 같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의 특수한 구원교리가 성립할려면 그 신뢰성은 완전입증된 경우만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살인죄를 저지른 경우 그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반면 일반 정치적인 토론을 할때 쓰는 증거의 신뢰성은 또 다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특유한 교리 주장은 법정에서 엄격한 증거가 필요한 수준의 매우 심각한 주장이라는 것이죠. 반면 불교나 다른 종교의 경우는 나아가 기독교도 그 내면에 흐르는 정도 즉 제가 저번에 불교적 관점의 해석학이라고 말하는 정도의 경우에 입증정도는 그보다는 좀 낮은 수준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불교도중에 자신들의 경전이 축자 완전 영감이고 불교를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간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저는 똑같은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특유의 교리 즉 예수라는 사람을 현실적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 지옥이라는 교리가 인정될려면 적어도 바트어만 정도의 입장에서 그게 수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반면 아침112님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보시기때문에 바트어만 정도가 아닌 보다 더 낮은 수준의 입증에 만족하시는 거구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저번에 언급했듯이 카톨릭은 이미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개신교의 주류는 교회 밖의 구원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개신교의 주류적인 입장의 교리에 대해서는 엄격한 입증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는 바트어만의 문제제기가 충분히 의미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이미 성경에 수메르 신화를 비롯해서 각종 신화등이 차용되고 있는 부분에 수메르(+바벨론)신화와 모세(+출애굽) 이야기 에서 일부 언급을 했습니다. 남은 건 조로아스터와 아함경등의 문제이데 이것은 제가 아직 언급을 안했지만 나중에 또 시간이 되면 언급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교리와 요한의 콤마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http://mirror.enha.kr/wiki/%EC%9A%94%ED%95%9C%EC%9D%98%20%EC%BD%A4%EB%A7%88

 

'세 위격이며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요약되는 기독교삼위일체라는 교리를 명백히 서술하는 유일한 구절로, 이 구절이 없다면 성경의 여기저기서 '성부=하느님', '성자=하느님', '성령=하느님'을 따로따로 끌어와 맞추어 추론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절은 라틴어성경불가타의 사본에는 나오지만 거의 모든 그리스어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문에는 없는데 후대에 첨가된 구절이다.
언제 추가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가타 이전 고대 라틴어역 사본에서부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 예로니모가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이전에도 라틴어 번역 성경이 있었다. 이런 성경을 고대 라틴어역 성경이라고 한다. 성 예로니모는 불가타 성경을 번역하면서 원시적으로나마 본문비평을 적용,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사본에는 없는 구절을 삭제했다. 그러나 필사자들은 "아니, 왜 이 구절을 삭제했지?" 하면서 고대 라틴어역 성경과 비교해서 없는 구절을 삽입했다. 그래서 중세 시절에 남아 있는 불가타 성경 사본도 서로 비교해보면 이쪽 구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들쭉날쭉하다. 이러한 문제는 동서양을 포함하여 고문서를 필사해서 남기던 시절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
 

이것은 삼위일체의 의미를 유사본질로 볼 것인가(아리우스) 동일본질(아타나시우스)로 볼것인가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죠. 유사본질은 제가 위에서 설명한 내용과 통하는 것이니깐요.(아리우스와 저의 설명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님) 반면 동일본질이라면 유일하게 예수만 삼위일체고 다른 믿는 자에게 제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삼위일체적 관계라는 말을 쓸 수 없는 것이죠. 즉 요한의 콤마가 이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거라는 거죠. 

 

그리고 축자적 완전 영감설은 우리나라 개신교의 주류아닌가요? 제가 밑줄 그어준 내용들은 바로 이러한 축자적 완전 영감설을 깨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는 저는 개인적으로 저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불트만이나 몰트만 등의 방식을 선호하고 제가 도강하면서 배운 것도 주로 이쪽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 관심있어서 사둔 책들을 다 버린 관계로(솔직히 딱딱하고 재미도 없음) 그때 지식을 복원하는데 좀 문제가 있기는 하네요. 다만 그때 받은 느낌 등이 지금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밑천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집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수많은 묵시록 중에 하필 왜 요한계시록만 들어갔냐는 것이죠. 바로 여기서 교리가 정경을 결정한다는 것을 어느정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루터의 경우도 자신이 뽑은 성경목록에서는 이신칭의 교리와 상충되는 히브리서를 제외하고 있구요. 나아가 구약의 경우 무수한 외경이 존재합니다.  

 

구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현재 한일신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는 박창환 교수의 <성경의 형성사>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 100A.D)는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고 그 내용 자료의 거룩한 성격 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을 다치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타고, 단어 하나도 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에 에스라가 기도의 응답으로 구약성서를 40일간에 걸쳐서 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 주어 받아쓰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구약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까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대교와 기독교에 유행되고,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이런 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돼서, 곧 느헤미야 시대에, 국가적 분열이 생겨서 사마리아인들이 따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사마리안인들은 구약의 첫 다섯 권, 곧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분열하던 시대에 경전으로 간주되던 것이 5경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다른 책들도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졌다면 사마리아인들이 5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나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히브리어)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율법서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예언서 8권(전기예언서 -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 후기예언서 -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12소선지), 성문서 11권(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솔로몬의 아가, 룻기, 예레미야의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다니엘)의 도합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성서(39권)의 구약 부분은, '70인역'(LXX,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과 거기에 근거한 라틴어역 불가타(Vulgata)의 배열순서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기원후 90년에 얌니아(Jamnia)회의에서 유대인학자들이 39권으로 된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결정하고 선포했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구약성서에다가 외경까지 다 넣어 가지고 그것이 정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헬라어 번역 구약성서(70인역)는 배열을 다르게 했다. 첫 부분인 율법서를 제외하고는, 순서를 많이 바꾸어 버렸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을 생각하게끔 되었었다. 율법은 온통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 글자라도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증거는 율법서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4장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고, 5경에 여러 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창21:34, 26:14-18, 출13:17) 실은 기원전 1200년 경(모세의 출애굽시대는 기원전 1300-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된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또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 21:31 , 26:33). 또 벧엘이란 이름의 기원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환상을 보는 이야기에, 또 하나는 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의 사건에 나타난다(창28:19, 35:15).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창16:6이하, 21:9이하) 창조설화도 역시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창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방주 속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6:19), 또 하나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 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 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편집자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 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5경은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처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쓴 책이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이스트 사료층, E문서-엘로히스트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Holiness Code, P문서-제사적 사료층 등) 중에서 P문서를 골격으로 하여 다른 부분들이 거기에 맞추어졌다고 본다. 이리하여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이 제일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그리고 구약성서의 둘째 부분인 예언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성서로 채택되었으며 성문서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성서로 채택되기까지에는 역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 있는 책들이었다.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의 일반 종교문학으로 간주되어 전해 오다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돌려 정경에 넣었다. 이렇게 전승된 성서들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주후 90년 경얌니야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

이상이 개신교의 구약 39권의 형성사이며, 천주교의 구약은 이와 달리 46권으로 되어 있다


 

추가적으로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를 바라보는 태도

그러면 과연 영어성서를 번역한 번역위원들은 성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음은 성서의 영어번역(RV,ASV,NASV,RSV,NRSV,NIV)에 참가했던 번역위원들의 교리적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정석광씨의 석사학위 논문 <현대 영어성경 번역본의 신학적 입장 및 번역위원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음)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Vance Smith(RV) George A. Buttrick (NCC-RV)

Edgor J. Goodspeed(RSV) Clarence T. Craig (RSV)

Frederick C. Grant (RSV) James Moffatt (RSV)

Julius A. Brewer (RSV)

예수의 처녀탄생을 믿지 않음
Harry Emersion Fosdick (NCC-RSV)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Vance Smith (RV)

Henry Sloane Coflin(NCC-RSV)

Harry Emersion Fosdick(NCC-RSV)

Edgor J. Goodspeed (RSV)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Clarence T. Craig (RSV)

예수의 육체적 재림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Clarence T. Craig (RSV)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함
Vance Smith (RV)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Walter Rusell Bowie (RSV)

Fleming James (RSV)

문자적 의미의 천국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문자적 의미의 지옥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마귀의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존재여부를 의심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Edgor J. Goodspeed (RSV)

침례 중생을 믿음
F. J. A. Hort (RV)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한 구원 인정
James Moffatt (RSV)

진화론을 인정함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이들 번역위원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살펴보자.

⊙ 웨스트콧 (Brooke Foss Westcott, 1825-1901)

웨스트콧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창세기의 첫 세 장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를 제공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눈을 뜨고 그것을 읽는 사람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세 장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모세나 다윗도 시적 인물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성경 안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기적 이야기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으나 직관적으로 그런 것은 일어날 성싶지 않은 일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을 글자 그대로의 장소가 아니라 단지 어떤 상태로 믿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이다". "천국은 우리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생각, 회상, 동경을 위하여 조용한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상태(즉 천국)를 계속해서 신선하게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것을 숨쉴 수 있다". "우리는 인내, 확고한 결심, 믿음, 그리고 노력을 통해 우리 주변의 천국 즉 우리의 지상생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바이다".

그는 성경이 오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호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성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성경의 무오류라는 단어를 부인하오".

웨스트콧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속죄의 효능은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모든 삶"에 기초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자(the Son of man)를 반드시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다. 성경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결코 직접적으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 호르트 (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

 

그는 웨스트콧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만일 당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 신약성경의 절대적 무오류성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난 당신이 성경의 절대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소."라고 말했다. 호르트는 성경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문들"은 국부본(Local Text)과 일치하며, 이 국부본은 4세기에 안티오크에 있는 시리아교회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이라고 했고, 이러한 보편적 본문이 교회의 공회에 의해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거부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각 개인의 죄에 의한 고통 없이 어떻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는 대속의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는 비도덕적이며 유물론적인 위조품"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호르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가르침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기까지 고통 당하셨다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정말로 그것은 거의 보편적인 이단의 한 측면인 것이다". 그는 또한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불을 하나님보다는 사탄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탄에게 지불된 속죄 값이라는 그 원시적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혐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속죄 값에 대한 교 리가 변호되어질 수 있는 다른 형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에게 지불된 속죄 값의 개념보다는 낫다".

호르트는 에덴동산의 실재를 부인한다. "나는 '에덴동산'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담의 타락도 영국의 시인이었던 콜러리지(Coleridge)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그의 후손들의 타락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글자 그대로의 영원한 "지옥"에 대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였다. 다음 글이 그 사실을 설명한다. "나는 모리스가 말로써 연옥을 부인했다는 것을 당신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회개의 힘은 현생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나는 불에 의해 깨끗하게 되는 연옥에서의 정화라는 개념이 성경이 내게 가르쳐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Divine chastisements)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콘스탄티누스부분과 니케아종교회의 부분은 제가 다음에 추가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시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