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새를 엉터리로 제작했다고 그러는 것 같던데,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삼국지의 전국새(傳國璽) 얘기가 떠올랐다. TV 화면에서 스쳐본 우리나라 국새에는 그냥 '대한민국'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 같았다. 그 글자체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냥 '대한민국'이라고 쓰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좀더 의미있는 문구를 써넣으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유명한 학자, 문인 등을 동원하면 저기에 써넣을 좋은 말 하나 만들어낼 수 없었을까?

국새를 만들 때 그 하드웨어에만 신경을 쓰고, 그 소프트웨어 측면이라 할 각인의 내용, 서체 등에는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아닐까? 그러다가 정작 그 하드웨어조차도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비싼 돈 날리고 국민들 실망시키고 해외에 알려지면 얼굴 뜨거울 망신거리만 하나 더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황금으로 도장을 만드는데 30% 정도는 자연 유실된다는 것도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된다. 황금이 휘발성이 있어서 날라간다는 얘기일까? 전문가들에게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일반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가 별다른 검증도 없이 쉽게 통용된다는 게 황당하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국새는 원래 진시황이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옥돌을 얻어서 재상이던 이사(李斯)를 시켜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았으니, 그 목숨이 길고 번창하리라)'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겨넣게 한 도장이다. 여덟 글자가 너무 즉물적이고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내용이라 밥맛인 점도 있으나, 그래도 무미건조하게 '대한민국'이라고 써넣은 것보다는 좀 낫다는 생각이다. 잘은 모르지만 문구 자체도 운을 맞춘 것 같다. 하긴, 전국새 얘기는 삼국지에서 진시황의 스토리를 배경으로 너무나 신비로운 분위기로 그려져 있어 내 뇌리에는 저 여덟 글자의 내용조차 무의식적으로 미화되어 각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국새는 이번에 '짜가'로 드러난 것이 건국 이후 4번째라는데, 도대체 도장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기껏해야 60여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나랏도장을 무려 4개씩이나 갈아치워야 했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웬만한 나무도장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몇십년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안다. 중요한 계약 때에나 사용하는 일반인의 도장과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될 국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가령 위에서 언급한 전국새의 경우 진나라 때부터 한나라를 거쳐 이후 송나라 때까지 수백년간 전해졌다는 얘기를 참조해보면 우리나라의 국새 제작 기술이 너무도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따위로 만들면서 무슨 전통 국새 제작 기술이니 뭐니 떠드는 것인지 의아하다.

기술력이 있는 일급 주물공장에 의뢰해 튼튼한 재료로 만들면 몇백년 사용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니면 시중의 유명한 도장 제작인에게 의뢰해서 금이나 은 아니면 옥돌로 만들던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상징이 봉황이라는데, 원래 봉황은 옥돌에 깃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새의 재료도 황금이 아닌 옥돌로 만드는 게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실제로 국새의 인뉴던가 하는 부분이 봉황 모양이라는데, 황금과 봉황은 어딘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혹시 서양의 불사조의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황금 국새를 만든 것 아닐까? 불사조라면 황금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하겠지만, 동양의 봉황은 불사조가 아니고 황금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이번 국새 파동은 국새라는 하드웨어보다 국새라는 문화상품이 갖는 상징성과 컨텐츠를 경시한 결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고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이벤트이다. 나는 당시에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간다고 해서 상당히 인상적인 이벤트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다. 당연히 그러리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당장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정주영 회장이 한복 두루마기 입고, 중절모 쓰고 소 한마리 딱 고삐 쥐고서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좀 가슴이 뜨거워졌고, 괜찮은 연출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나머지 소떼이야 그냥 트럭으로 실어가면 되는 것이고.

하지만, 나중에 봤더니 내가 상상했던 장면은 어디에서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정주영은 따로 가고, 소떼는 모두 트럭에 실려 북한으로 갔다. 나는 탄식했다. 만일 내가 상상한 그런 정도의 사소한 이벤트라도 있었다면 그리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기록 사진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 그 이벤트가 갖는 컨텐츠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탄식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사진에는 정주영 회장의 개인적인 가족사(소싯적에 부친의 소 판 돈을 들고 나와 그 돈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되어 이제 다시 그 소를 몇 만 마리로 고향에 되갚아주는)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분단의 역사, 그 모든 것이 녹아져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근대사에서 겪은 그 모든 스토리를 한 장의 사진에 압축해서 세계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컨텐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이제 그런 사진은 두번 다시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의정부와 현대그룹 관계자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이벤트를 하지 않았는지, 나에게는 두고두고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컨텐츠에 대해 무감각하고 둔감하고 게으르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는 분명히 그렇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고급스러운 국가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카가 언젠가 써버려서 해당 어휘의 품격을 훼손해버린 국격(國格)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주절주절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