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켑렙에 정지민 씨의 번역문 2개가 올라왔더군요.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번역한 것인데, 어째 좀 이상하네요.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깔끔한 번역 같지도 않습니다.

길게 읽을 의욕을 느끼지 못해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딱 첫 문장에서 걸립니다.

Secular Humanism is a secular philosophy that espouses reason, ethics, and justice, and specifically rejects supernatural and religious dogma as the basis of morality and decision-making.


세속적 인본주의란 이성, 윤리, 정의를 지지하는 인본주의 철학의 일환으로, 구체적으로는 도덕성 및 결정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초자연적, 종교적 이론을 배척하는 것이다.


우선 '일환'이란 단어가 걸립니다. '일환'이란 하나의 개체 또는 유기체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많이 쓰입니다. 또는 커다란 일련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을 말하는 데 쓰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part of 의 번역어로 쓰이는 게 적당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위키에서 세속적 인본주의를 설명하는 표현은 인본주의 철학의 '일종'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전체 집합 가운데 하나를 의미합니다. 유기체 속의 한 부분과 집합 가운데 하나는 의미나 성격이 다르죠. 유기체 속의 한 부분이 빠지면 그 유기체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지만, 집합 가운데 한 부분이 빠져도 집합은 그 성격이 변하지 않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번역은 원래 외국어보다 국어 실력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 웬만한 영어 문장 해석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번역에서 더 중요한 것은 원문의 의미에 보다 가까운, 정확한 우리말 어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환'과 '일종'의 사용에 있어서 정지민 씨의 번역은 별로 미덥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덕성 및 결정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초자연적, 종교적 이론을 배척하는 것이다. ---> 이 문장은 구조가 좀 이상하군요. 원문의 의미와도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번역한다면 [도덕적 판단이나 의사 결정에서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을 근거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정지민 씨의 번역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초자연적, 종교적 이론이 '도덕성 및 결정의 기반으로만' 작용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초자연적, 종교적 이론이 하는 역할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의미가 됩니다.

도덕성, 결정이란 어휘도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친절한 번역 같지는 않습니다. 도덕적 판단, 의사 결정이 좀더 정확한 의미 아닌가 싶군요. 특히 '결정'이란 번역은 너무 애매합니다. decision-making이란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의사 결정'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dogma를 그냥 '이론'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론보다는 어떤 신념 체계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도그마'라고 번역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성, 윤리, 정의를 지지하는--> 이 부분에서도 '지지'라는 단어보다는 '옹호'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지는 너무 무미건조한 단어이고, 내가 보기에는 비이성, 비윤리, 부정의에 대항하여 이성, 윤리, 정의에 대하여 보다 주관적인 선호 정서를 드러내고 객관적인 상황에서 방어의 스탠스에 가까운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옹호'가 더 적절할 것 같군요.

'구체적으로는'이라는 표현도 좀 거슬리는데, 이 부분은 제가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 '구체적으로는'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 이후의 부분이 세속적 인본주의의 역할 전체를 묘사해야 하거든요. 즉, 세속적 인본주의가 이성, 윤리, 정의를 지지하는 행위 전체가 바로 뒷부분과 동의어(equall)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이성, 윤리, 정의를 지지하는 행위가 너무 협소해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specifically 이후의 부분이 and로 묶여 있는 것도 앞 부분에 추가되는 관계이지, 동의어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저 같으면 그냥 '특히'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저 문장을 번역한다면,

[ 세속적 인본주의란 이성, 윤리, 정의를 옹호하는 인본주의 철학의 일종으로, 특히 도덕적 판단이나 의사 결정에서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을 근거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

이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저야 영어 실력도 개판이고 기껏해야 투자 관련서적 하나 번역한 경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감히 '전설'이신 분의 번역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겁도 납니다. 그래도 내 보기에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고... 질문하는 셈 치고 올려봅니다.

아크로에 고수들이 많으시니 제 의견이 엉터리라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