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다를까 제가 퍼온 글을 놓고 약간(?)의 논쟁이 진행중이군요. 퍼오기만 했을 뿐, 역사에 대해 그리 지식이 많지 않은 제가 감히 총대를 메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일제 침략을 미화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미화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타국의 자주적 권리를 침범했다는 점에서 무조건 범죄 행위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제가 아는한 한명도 없습니다.

2.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냐?
천만에요. 당연히 조선은 식민지가 되든, 되지 않든 근대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 형태와 내용은 달랐을 지라도 근대를 지향하지 않은 나라는 아시아에서 하나도 없는데 조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3. 조선이 내재적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냐?
'내재적'이란 말의 범주를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이 처한 조건을 보면 이미 '외부의 자극이나 간섭, 혹은 침략'이 상수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최대 명군으로 꼽히는 영정조 시대에 이미 서양 문물은 조선으로 유입되고 있었으니까요. 있을 수 없는 가정입니다만 외부의 간섭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순수하게 자신의 역량만으로 유럽처럼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 지는...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의미없는 질문입니다. 다만 일본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조선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질문에는 예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2.에서 설명한 것과 동일합니다.

4. 일본이 선의로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말이냐?
식민지 근대화론자중 아무도 이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증명될 수 없는 '선의'가 논의주제로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5. 일본의 조선 지배가 근대화를 축으로 이뤘졌을 뿐, 수탈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냐?
역시 아무도 이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일본은 조선을 수탈했습니다. 다만 어떤 그 방법이 근대적 방법을 축으로 이뤄졌는가, 아니면 전근대적 방법과 병행되었는가를 놓고 논쟁 중일 뿐입니다.

6. 어쨌든 근대화가 이뤄졌다니 일본이 조선을 문명국가로 이끌었다는 것 아니냐?
이는 근대화를 야만의 반대어로 설정하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입니다.  근대란 '과학 및 이성을 중시하며 봉건적 신분 질서를 인정하지 않은 제도 및 관념'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도 근대성이란 관념으로 근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수탈 및 아일랜드 비극을 동반했고 미국은 인디언 참혹사를 연출했으며 독일은 나찌즘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근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령 아래의 두가지 경우를 상정해보죠.

1) 식민지 이후 동족 상잔의 비극과 독재 정권을 겪고 이제 2만불을 바라보는 경제 대국. (분단국가)
2) 시민 봉기나 데모 등은 빈번하게 이뤄졌으나 큰 전쟁은 겪지 않았으며 국민 소득 7000불 정도의 입헌 군주국.(통일국가)

둘중 어느 나라가 바람직할까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둘 다 근대 국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눈치채셨겠지만 1)은 지금 현재의 한국이고 2)는 식민지를 겪지 않았다면 - 그리고 운좋게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전제에서 상상해본 지금의 조선입니다.

물론 식근론자에 따라선 결과적, 우연적으로, 또 부분적으로 일본의 공로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한 식근론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런 겁니다. 일본의 선의든 악의든 뭐든, 그리고 조선의 내재적 발전 정도가 어쨌든 이 모든 건 if와 maybe의 영역이므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래의 두가지입니다.

1) 이유야 어떻든 조선은 외부의 침략 혹은 도전에 맞서 자신 스스로를 보존하는데 실패했다.
2)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친 조선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했다.

7. 식민지 근대화론은 우파 보수의 이론이다.
전 우파, 좌파 모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우파는 이유야 어떻든 자본주의가 이룬 성과를 옹호하기 위해 식근론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좌파는 지금까지 이뤄져온 근대화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극복해야할 과제를 설정하기 위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라이툼히 님이 잘 지적했듯 일제 및 박정희 독재 시절의 근대화가 도구적 이성의 측면에 과도하게 몰두하며 근대의 내용 자체를 형해화시켰다면 이후 좌파는 당연히 가치로서의 미래 지향적 근대를 우리의 과제로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야기 - 노예제 폐지
아래 프레시안의 기사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0820154210&section=06

원 만화를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노예제 폐지는 아래와 같은 흐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고매한 이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사람들.
2)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므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사람들.
3) 노예선 감시 및 근절이 영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4) 인도 및 중국에서 막대한 부가 쏟아져 들어오므로 노예제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위 중에서 선의는 1) 하나 뿐이고 2)의 경우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3)과 4)는 전혀 다른 꿍꿍이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향을 미친 순서로 보자면 4)부터 1)로 보입니다. 자, 여기까지의 설명을 놓고 '노예제 폐지에 도움을 줬으므로 당시 영국이 중국에서 행한 아편 판매를 옹호하는 것이냐?'고 묻는게 타당할까요?

9. 저의 관심사 - 왜 조선에선 복벽파의 씨가 말랐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왕정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1945년, 아니 더 나아가 3.1. 운동이 좌절된 1920년부터 복벽파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감퇴한 것에 대해 당연하게 여길 지 모르겠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이는 오히려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듯 우리보다 훨씬 더 일찍 근대화를 시작했던 유럽의 어느 국가는 국민 투표를 통해 남의 나라 왕자를 자신들의 왕으로 수입하기까지 했다니까요. 그것도 한때 자신들의 지배하던 나라의 왕자를 말입니다. 

이 유례없는 복벽파 쇠퇴 원인으로 전 아래와 같은 조건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1) 병합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선전
2) 무기력한 조선 왕조의 모습을 목격한 지식인층 및 기층 민중의 회의
3) 보통 교육의 확대로 말미암아 신분제 타파란 근대적 생각 확산
4) 기층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 체제를 지향했던 저항 세력의 선택.

이중 1)과 3)은 일본 식민 지배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를 놓고 '그렇다면 일본이 전근대적 봉건 사상을 깨기 위해 지배했단 말이냐'고 묻는건 의미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했지요. 그렇지만 의도와 다른, 혹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 경우는 흔하디 흔합니다. 가령 보통 교육의 확대를 놓고 아래와 같은 우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일제  1. - 야, 조선 먹고 보니 석유도 없고 쌀 생산도 보잘 것 없고...이거 본전이냐 뽑겠냐?
일제 2. -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자원은 저 멀리 만주에서 뽑고 생산은 가까운 조선에서 하면 남는 장사야.
일제 1. - 야, 공장 돌리는게 쉬운줄 알아? 조선 놈들은 규율이 없어 안된대두? 거기에 일자 무식이야. 기계 돌릴려면 최소한의 주의 경고문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될 거 아냐.
일제 2 - 그러니까 대규모로 보통 학교 세워서 두들겨패며 가르쳐야 한다구. 그리고 농촌에도 자본주의 도입하면 눈이 벌개서 열심히 쌀 생산 늘리게 되어 있다구. 쌀 증산이 이뤄지면 값은 떨어질 테니 싸게 산 뒤 일본에 팔면 돼. 

예. 이 우화에서 보이듯 일제가 근대적 제도나 교육, 공장등을 도입한 건 수탈을 위해서였지요. 중요한건 수탈을 위해 '근대적'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초기에 아프리카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조선인들을 노예로 수출한다거나 지하자원을 일방적으로 캐가는 식의 전근대적 방식의 수탈에 머물렀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나오기 힘들었겠지만 제가 알기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10. 그러면 어쨌든 조선은 형편없는 3류 국가였다는 말이냐?
아니요. 전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최소한 15세기의 조선은 당대의 어느 국가도 따라오기 힘든 만큼 높은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겪은 많은 나라중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경제적, 정치적 근대화를 이루었던 근저엔 조선의 높은 문명 수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나온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은 그럼에도 조선은 근대 이전의 문명에 머물렀으며 외부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해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다.

11. 그러면 앞으로 뭘 하자는 거냐?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우리의 근대화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모습을 띠고 있고 앞으로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냐구요? 제가 아는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