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김대호님의 지난 글

쌍용차 사태를 보고-노무현만이 아니라 김우중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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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파란 부분은 본문의 인용)

쌍용차 노조와 한국 완성차 공장 노조가 지난 이 십여 년 간의 투쟁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여(노동의 양과 질)에 비해 근로조건을 너무 높여 놓는 바람에 정리해고의 충격이 너무나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즉 쌍용차 노조원의 근로조건은 협력업체나 산업의 평균적 근로조건에 비해 너무 높이 올라간 반면에 사회안전망은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국 쌍용차의 경우 평균 근로조건의 높이가 3미터라면 사회안전망은 요가용 얇은 매트리스 정도이다. 낙차는 엄청나게 큰데 반해 사회안전망은 취약하니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을 수가 없다. 

쌍용차 사태를 부른 현실에 대한 매우 정확한 인식이고, 나 역시 동의한다. 쌍용차노조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협상 주제의 하나가 바로 '자녀학자금을 제외한 모든 복리후생의 포기'였음이 그런 현실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김대호님은 한국 사회의 사회안전망이 열악하다는 것만 지적하고 그 개선의 당위성만 언급할 뿐, 그것이 개선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가급적 회피한다. 또한 한국 사회의 매트리스가 왜 그렇게 얇게 되었는지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민노총과 자칭 진보의 전략적 시각 부재가 그 원인으로 간단하게 언급될 뿐이다. 물론 김대호님도 나름의 해법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한국의 노동 개혁 내지 노동 투쟁의 방향은 명백하다.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 등 소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 직장의 근로조건의 높이는 (가능하면 시장 원리를 흘려) 시장 수준=선진국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조정하되, 다수의 힘없는 노동의 근로조건은 노동의 수요 자체(고용)를 늘리고, 적정한 보호 규제와 합리적인 노동운동을 통해서 개선하는 것이다. 요컨대 임금.소득 불평등 및 불공평도를 개선하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즉 고용의 총량을 늘리고 이들 간의 불합리한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차별노동 (합리적인) 차별임금을 구현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이 이렇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것은 '배고프면 밥먹으면 된다'는 수준의 당연한 상식이다. 문제는 어떻게 쌀을 구하고 밥을 지을까이다. 정말로 김대호님이 주문하는대로 민노총 및 자칭 진보가 전략적인 시각을 견지하면 해결될까? 나는 김대호님이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진국들의 두터운 사회안전망 매트리스는 대부분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조직된 노동조합의 정치적 요구들이 정책으로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대호님이 평소 지론으로 삼는 '강력한 노동조합은 기업 투자의 방해물'로 보는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때문에 김대호님은 매우 교묘한 트릭을 구사한다. '얇은 매트리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얇은 매트리스'에 비해 너무 높아진 쌍용차의 근로조건이 문제라는 식이다. 즉 떨어질 때 아프지 않으려거든 조금만 뛰어라는 것이 소위 이 분이 제시하는 현실적인 해법이다. 더 나아가 혼자서 높이 뛰는 놈들 때문에 나머지들의 매트리스가 더 얇아지게 된다는 전도된 주장을 한다.

김대호님은 이렇게 사회안전망이 두터워지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상황을 외면한 상태에서 해법을 찾다보니 늘 엉뚱한 논의로 치닫는다. 이른바 스스로 본인의 정체성이라고 규정한다는 '좌파신자유주의'이다. 대강 요약하면 모든 사회 문제의 해법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되,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동조합의 존재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좌파라는 레테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김대호님은 한국의 노조조직률이 10%에 불과하고, 그나마 그 절반은 활동을 하지 않는 '수면노조'이며, 나머지 90%는 아직도 '노동조합을 하려면 인생의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80년대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인 역시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소수의 강경한 노조들이 '기업가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나머지 90%의 사업장에서 쉽사리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기업가들이 노조에 대한 경계심을 풀수 있도록 강성노조들이 고분고분해져야 나머지 90%의 현장에서 '합리적인 노동운동'의 숨통이 트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이다. 이것을 그분은 아마도 뱀의 지혜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글쎄, 혹시 뱀의 지혜가 아니라 노예의 지혜가 아닐까? 원래 노예는 주인에게 이쁨받고 잘보여야 그나마 먹고 살수 있었고 잘하면 호강도 했다고 하니 김대호님의 말씀은 참으로 현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김대호님이 자주 구사하는 논리의 기본 구조는 늘 이런 식이다. 갑과 을의 관계로 표현되는, 사적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의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주목하지 않고, 을의 고분고분함을 문제 해결의 열쇠로 삼는 식이다. 그것이 현실이니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는 을이 되라고 주문한다.

이런 논리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 끈질기다. 김대호님에게 쌍용자동차 노조란, 지주에게 함부로 대항하다 본때를 당한 어느 소작인 조합과 같다. 그분에게 묻고 싶다. 피죽이라도 끓여먹고 살려면 고분고분해야 하는데 함부로 나섰으니 당해도 싼걸까? 남들 피죽먹는데 혼자 쌀밥 좀 먹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소작인들의 피죽을 갈취하는 이기적인 행동이었을까? 소작인들이 함부로 소작료 올려달라고 지주에게 대항하다가 지주가 농사를 포기하고 떠나버리면 모두 굶어죽을게 뻔하니 말 잘들어라고 훈계하는 것이 과연 당대의 지식인이 할 일이었을까?

결국, 사회안전망이 두터워지기 위한 정치적 상황이란 그 어떤 노동자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렇게 조직된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들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노동조합하려면 인생을 거는 결단이 필요한 나라에서 두터운 매트리스란 그저 요원한 희망일 뿐이고, 결국 그 결과가 오늘의 쌍용차노조의 생사를 거는 극한 투쟁과 아수라장임은 김대호님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그리고 그 비극의 씨앗들은 오늘도 다른 곳에서 또 다시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