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제가 조.중.동.문은 신문 절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오늘 아침 또 우연히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말았네요. 어디서 주워온 신문을 처박아 두었다가 펼쳐보다가 좋은 기사가 있어서 이렇게 그걸 소재로, 아니 기화로 글 한편 쓸려고 이런 저런 자료를 카피해 두었다가, 코***님 글에 댓글좀 달고 이렇게 컴 앞에 앉았습니다.  먼저, 아래 기사를 한번 읽어보세요. 시간없는 분들은 발췌,인용해다 놓은 글이라도 읽어보시구요.



자극은 더 센 자극을 부르기 마련이다. 중독성이 강하다. 말초적 자극은 특히 그렇다. 얼마 전 TV에서 추억의 명화 ‘황야의 무법자’를 상영하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채널을 고정했다가 불과 20여 분 만에 포기했다.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 입에 침 고이는 줄도 모르고 봤던 영화가 이젠 지루하다니. 하긴, ‘본 아이덴티티’ 3부작이나 최근의 ‘인셉션’처럼 숨 돌릴 사이조차 주지 않고 관객을 몰아대는 영화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지 오래다. 국산영화도 1960~80년대 영화는 이미 속도감이 떨어지고 배우들의 말씨마저 요즘과 달라 전혀 ‘자극’이 못 된다. 신성일의 주먹은 이제 주먹도 아니다.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처럼 피비린내 풍기고 난도질을 해야 액션물 축에 끼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노출패션에도 이골이 나버렸다. 아스라한 고교시절엔 교복차림 여학생의 흰 목덜미만 봐도 전기가 찌릿 왔는데, 요즘 여름 패션은 ‘목덜미’ 정도는 저리 가라다. 나도 속물근성이 다분한 탓에 눈 둘 데 없다고 짐짓 지청구는 하면서도 몰래 힐끗거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런 패션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건지 궁금하고 겁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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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극과 속도에 너무 휘둘리며 살고 있다. 말초적 자극이 넘치니 정신만 부산스러워질 뿐이다. 그러니 진지한 자기 성찰보다 남의 탓 앞세우고 공격성만 발달하는 것 아닐까. 달리다가도 가끔은 일부러 멈춰 서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돌아보고 주변 풍경도 찬찬히 음미해 볼 일이다.
 
 
 왜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행복론을 쓰는게 저의 목표이자 꿈이라고요. 그게 잘 진척이 안 되네요. 언제까지 쓰겠다고 딱 기한 목표를 정해 놓고 써야하는데, 그게 없이 그냥 틈틈이 열심히 쓰자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 집중이 되지 않아 자꾸 딴짓을 합니다. 어쨌든 이 기사를 소재로 해서 씁니다만, 오감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행복을 고찰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행복론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합니다.  그런 다음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혀 놓아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행동을 하다보면 보통 어떠어떤한 감정적인 상태가 되드라, 그런 감정이 바로 행.불행을 결정하게 된다는 과정으로 밝혀나가려는 것입니다. 제가 인간에 대해서 파악해 놓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진부한 내용이랍니다. 한번 잠깐 들어보실래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첫째,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제가 생각 혹은 사고, 관념 혹은 정신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조사를 안해 보았지만 인간의 행.불행의 80 ~ 90%는 다 이 생각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 같더라구요.  상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둘째, 인간은 느끼는 존재이다. 그쵸? 너무 평범하고, 다 아는 내용에 지나지 않지요? 사실, 느낌이 바로 행.불행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너무 중요한 부부닙니다. 한마디로 잘 느끼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행복하려면 느낌을 잘 잡아야 한다고 강조를 한 것입니다. 근데, 자극이 없으면 느낌이 안 옵니다. 그저 밋밋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 지속되는 것이지요. 그쵸? 어느때는 그저 왜 사나 싶지 않나요?

셋째, 인간은 오감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감이라는 것이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섯가지 느낌이 아니겠습니까.눈으로 보는 시각, 귀로 듣는 청각, 코로 맡는 후각, 혀로 맡는 미각, 접촉으로 느껴지는 촉각.  사실 하루 하루의 삶을 보면 다 이 다섯가지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거 보면서 즐거워하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기뻐합니다. 좋은 음악 감상하면서 황홀해 하기도 하고요. 어떤 분들은 좋은 향기나 냄새에 빠져 느낌을 잡습니다. 게나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감미로운 접촉은 가장 큰 쾌락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감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면 우리는 대부분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오감 충족 생활을 방해하는 사건, 사고, 일들이 터지기 때문에 늘 오감을 충족시키면서만은 살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오감 충족은 현대인들의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행복은 너무나 간단하죠. 이런 인간이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 잘 생각하고, 잘 느끼면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행복 책을 읽어보아도 이렇게 명쾌하게 답을 내주는 것은 없습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아니면 행복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행복에 목적을 두면 안되다 하는 등 별의별 결론을 다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행복은 이처럼 간단합니다. 잘 생각하고 잘 느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조금만 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넷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교감하고 사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좋은 인간관계, 사람과 잘 어울릴수록 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속성이 말입니다. 오늘은 글의 소재가 오감에 대한 것이니 여기까지만 생각해보고 그것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감이란 어떤 특성이 있는가?

물론 오감이라는 느낌은 뇌에서 해석을 하여 얻는 과정과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사실은 오감에 더하여 뇌 자체으로 작용하는 느낌을 추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오감에 의를 더하여 감각기관은 6근, 느끼는 것은 6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행.불행이 다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만족이 체감합니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단위를  먹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의 정도가 양을 늘려갈수록 느낌은 점점 더 체감을 합니다. 그 느낌의 정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면 해보아야겠지만 같은 느낌을 얻으려면 더 훨씬 더 많은 양을 먹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오감은 전부 느낌이 체감하는 것입니다. 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계속 먹으면 물리잖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나중에는 메스껍기도 하고 말입니다. 피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한번 체하기라도 하면 아예 기피를 하게 되지요. 

우리가 느끼는 좋은 느낌들 즉 행복을 주는 대부분이 오감에서 오는데, 그 오감은 만족이 점점 더 체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뇌의 어리석음 때문이죠. 우리가 과학을 좋아해서 하는 말입니담, 만족이 수학의 공식처럼 정비례를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지요. 정말 이런 함정은 피해야만 합니다.

오감은 만족이 체감하니까, 같은 정도의 행복을 느끼려면 훨씬 더 큰, 많은 자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의 좋은 느낌을 얻으려면 처음에는 1단위만 먹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1의 느낌을 얻으려고 해도 2단위, 3단위, 혹은 4단위, 8단위 정도의 설탕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확한 양은 과학적으로 조사를 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오감에서 주는 행복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많은 양을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불행한 것은 오감을 충족시키는 거의 모든 것은 지나치게 되면 우리 몸을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행이 있습니다. 볼까요. 술 점점 더 많이 먹으면 몸 망치죠? 사탕발림에 가까운 칭찬도 몸을 망치기는 똑 같습니다.

아름다운 것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도 점점 더 강도가 높은 것을 찾게 됩니다. 혹 이런 예는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쁜 여성을 사귀는 것도, 외모만 보게 된다면 점점 더 예쁜 예자를 만나야 성에 차는 것입니다.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가 바람둥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촉감을 주는 성적인 쾌락은 어떨까요. 18금이라 좀 그렇지만, 외도를 하고, 점점 더 난잡한 스와핑을 하고, 수간을 하는 등 점점 더 성적 쾌락에 빠지는 이유가 만족도가 체감하는데 같은 만족을 느끼려니 심한 자극을 주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감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오히려 불행에 빠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위험하지요? 예, 그래서 몸뚱이로 추구하는 행복은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통제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합니까? 생각이라는 힘으로 해야합니다. 즉 몸뚱이에서 느끼는 감각은 뇌에서 하는 사고 작용 즉 이성으로 제어를 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 일단 소재의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분석해보자구요. 이상에서 밝힌 것처럼 좋은 느낌을 얻으려면, 즉 행복한 느낌을 얻으려면 점점 더 큰 자극, 강한 자극을 받아만 한다는 간단한 이치만 알아도 우리는 자극지향적인 삶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의 힘이지요. 이런 정도의 사실은 알아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매일 더 큰 자극을 추구하가 피폐해지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어떤 힘을 갖고 있나?

이제 좀더 철학적인 면으로, 정말 이성적인 사고로 나아가 보자구요.

생각이라는 작용은 의외로 위대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생각은 그 자체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상상하는 힘, 옛 추억을 불러내는 기억의 힘, 또 미래를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힘 등 생각지도 못한 힘이 많습니다. 제가 정신작용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 정신이라는 게 바로 이 생각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몸뚱이 여러 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 장치를 갖고 있는 반면 또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제어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잘 해야만 한다고 강조를 한 것입니다. 생각=정보=마음=정신=영혼=개념=관념 들을 저는 다 같은 용어로 봅니다. 같은 작용을 하지만, 그것이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서 달리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다에 비유해보면 적절할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바다에, 수많은 마음이라는 파도가 읽기도 하고, 심할 때는 더 넓게 더 폭넓게 폭풍이 일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고 한 것처럼, 생각의 바다는 수많은 다른 용어들을 함께 품고 있지요. 

이제 조금 더 나아가볼까요. 만일 인간을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존재로 정의를 한다면... 철학을 하고, 학문을 하고, 토론을 하고, 또 과학을 하는 것은 다 무슨 작용일까요? 느끼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행동하는 작용일까요? 물론 말하고, 손짓하고 하는 부수적인 추가적인 행위는 있을지언정, 생각하는 작용일 것입니다. 생각하는 작용을 사고 혹은 이성이라고 하고, 느끼는 작용을 감정 혹은 감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의 특성을 나누어 볼 때, 이성과 감정, 혹은 사고와 감정으로 나누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지요.

이제 조금 더 나아가서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사고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구요. 이성적 사고, 혹은 이성은 무엇일까요? 이때의 이성은 바로 감정 혹은 감성 작용에 대응하는 의미로서의 사고 작용을 말하는 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감성으로 하나요? 아닙니다. 이성으로 하는 것이지요. 논리학은 뭐로 하나요. 느끼는 감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작용입니다. 그러면 과학은 또 무슨 작용일까요? 네, 그것도 이성 작용입니다. 이성은 이렇게 인간의 사고 행위 또는 작용을 일컫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토론을 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대게 인간은 감정적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토론을 하다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격앙되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것은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이성과 감정이 섞여서는 절대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 ~ 13:09 ~ 13:20) : 좀 쉬어가야겠습니다. 오늘에서야 그동안 미뤄왔던 이성과 논리 과학 등에 대해서 짚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 같네요! ) 사실 여기에 숨은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행복론에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만, 왜 토론이 이성적으로만 되지 않는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생각은 느낌을 낳는다!

참, 웃긴게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대부분 느낌으로 연결이 됩니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데, 생각이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자기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만심이 생깁니다. 또 토론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분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어쩐지 상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무색무취한 중도의 사고(말, 용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전에 그 말을 떠오르게 하는 경험도 없고 하다면 느낌 중립적인 용어가 있을 것입니다. 느낌이 나지 않는 삶은 그런데 무미건조하고 의미가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삶이 지속되면 우울해지기도 하고, 게을러지고 나타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우울증을 앓거나 심한 정신병으로 심화되기도 하지요. 어쨌든 생각은 감정으로 연결된다는 미묘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요. 그냥 자동적으로 어떤 자극이 감정을 초래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토론을 하다가 상대가 찌질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죠. 그런데, 상대의 자극이 직접적으로 감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긍국적으로는 찌질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자신의 경험 및 관념계의 작용따라 일어나는 반응인 것이지요. 한번 가만히들 생각해보세요. 만일 잘 이해가 안된다면 제가 늘 인용한느 <인지적 재구성>이라는 심리학의 내용을 읽어보세요.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인 대화 중에도 계속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지요. 애인이 너 참 예쁘다는 소리(생각, 용어, 해석)에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자~기야~~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반응을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짜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훈련을 하면 우리는 조금은 덜 감정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덜 불행에 빠질 것입니다.

자, 여기서 행복해지는 기술을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밥먹을 때, 맛있는 반찬 혹은 음식 골라먹듯... 듣기 좋은 소리른 accept하고, 듣기 좋은 소리는 바로 reject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요령을 터득만 하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그들의 생각이나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잖습니까? 그들의 생각구조나 느낌의 경험 세계를 알지 못하는데 왜 우리가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의미를 부여해야할까요? 전혀 불필요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자,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할까요? 지금까지의 이 글은 이성적일까요? 아니면 터무니 없는 소릴까요? 하하!

따라서 생각을 잘 할 필요가 많습니다. 웨인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을 보면 이런 제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사는게 숱하게 많습니다. 그 생각만 잘 고쳐먹거나 더 좋은 생각을 하거나 오해를 불식시키거나 편견을 버리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척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생각만 잘해도 행복은 많이 잡을 수 있습니다.  책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른 정보, 정확한 정보, 내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경험을 들려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책을 안보고 바르게 생각해나간다구요? 적어도 책으로부터 바른 정보를 얻어서, 자기를 해치는 혹은 속상하게 하는 불리한 생각들을 솎아내게 하여,,, 자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게 해주는 길은 없습니다. 남의 이야기도 잘 듣지 않고, 책도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제가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자기 마음의 정원에서 풀을 뽑아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저의 주장도 다 이성의 작용이지요. 제가 토론을 하면서 이성적으로 하라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거나, 일부러 상댕에게 자극적인 용어들 사용하여 감정을 불지를는 감정놀음을 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사실 토론에서 객관적인 진술이나, 자기 주장을 하는 설득적인 논술에서 감정을 비출 일은 없지요. 그저 기계적으로 처리하면 되니까요. 일부러 기쁜 마음을 갖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미하이미하이 칙센트가 하는 몰입의 기술을 활용해서 말입니다. 단순한 반복작업에서도 어떤 flow를 느낄 수 있다고 그냥반이 이야기 하지요. 자, 이제 조금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다뤄볼까요?

도대체 철학은 무엇일까?

 우리는 철학하면 서양철학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뭐 철학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정의를 내리기도 하죠? 그런데 여러분 철학이 무엇인가요? 저런 구태의연한 정의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까?

저는 그냥 우리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것을 철학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사람은 왜 태어나고, 왜 이리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등 인생, 혹은 삶에 관한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궁리하고 고민하고, 의심해보고 하는 일련의 사고 행위가 철학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철학하면 서양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서양 철학만이 이성적으로 사고를 해서 얻은 학문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서양의 학제 또는 수업 방식에 따라서 서양철학을 위주로 혹은 더 깊이 있게 배웠기 때문이죠. 아마 학교에서 배우는 과정에서는 동양쪽의 철학은 거의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배운다고 해도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은  지금의 학생들의 상황, 그리고 기존의 여러 한국 기성세대들의 사고방식을 확실하게는 잘 모르지만 저의 경험과 판단을 통해서 유추, 해석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저의 이런한 진술이 어느 정도 맞는다고 가정해 보자구요.

우리 동양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혹은 우주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훨씬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철학하면, 그래도 서양에서 정의된 용어에 대한 정의를 생각하며 서양철학이 원류 혹은 더 깊이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제 추측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동양은 더 심오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동양에서도 인생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았을 것이 틀림이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천지인하면 대상세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를 상징하는 하늘, 그리고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대지인 땅, 그리고 인간들을 관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면 독립적인 물질 대상으로 두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인생, 우주(하늘) 혹은 인간관계 등 우리 삶에 깊은 관계 있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의문을 던지고, 원리를 밝히려고 하는 사고작용을 저는 철학이라고 정으를 내리고 싶습니다. 철학이야말로 우리가 늘 해야 할 삶의 한 측면인 셈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더 이상 골치아프게 왜 사느냐 하는 질문을 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삶을 혼란스럽게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오늘날과 같이 깊은 오감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 대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사고작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제 사고를 한번 분류를 해 볼까요? 도대체 인간의 사고 작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어떻게 나누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생각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까요?

생각엔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보이고 느끼는 대로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진술, 서술, 혹은 표현하는 것이겠네요. 현 상태에 관한 생각이군요. 어쩐지 좀 엉성한데요?  또 옛날의 일들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기억의 작용이 있을 것이구요. 또 미래를 내다보는 상상이라는 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대에 따른 분류가 되겠네요.  이제 생각하는 기본 단위들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볼까요?

진술, 기억, 회상, 추억, 연상, 예측, 추론, 상상, 이해, 상상, 확신, 믿음, 신앙 등등의 생각의 작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 보다 체계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묶어 분류해 볼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보면, 이성적 사고, 논리적 사고, 합리적 사고, 그리고 과학적 사고로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전부는 아니겠지요. 필요에 따라, 체계적 혹은 종합적 사고 등 더 다양하게 깊이 있게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맡겨두고 싶습니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 수많은 분야에게 대한 공부 혹은 연구로 전개되면서 그러한 학문을 하는데 필요한 조직적 사고가 대두될 수 있을 것이빈다. 예를 들어 수학을 하는데 있어서는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을 하는데는 추론, 혹은 진술 혹은 가정 등의 사고 작용일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학문을 보다 보편적으로,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다듬고 정리하는데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논리적 사고 혹은 합리적 사고가 꼭 학문을 하는데만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이런 조직적인 사고가 필요할 것입니다.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각각의 사고들은 다양한 학문에 필요하고 중요도에 따라 취사선택될 것입니다. 어쨌든 학문을 하든 연구를 하든 우리는 이렇게  사고작용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자,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제로 넘어가 볼까요? 도대체 학문을 하는데 필요한 사고는 어떤 것일까? 또 인생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어떻게 사고하면서 살아야 할 까요?

오늘날 우리는 분명 서양철학 혹은 서양문명에 경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서양에서 태동한 학문은 신개념이고 좋은 것인 반면, 동야의 학문은 구시대적이고 고루하고 편협해서 버려야할 것으로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학문 체계에 따라 공부를 하고 살아가다 보니까 우리는 상당히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만히 살펴보면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적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를 하는 이기적인 삶보다는 관계지향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 문화와 전통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이성적인 사고를 많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더 많이 감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되었고, 또 그영향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연구해 볼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살아가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이곳저곳에서 토론이라는 것을 하면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우리는 '과학'에 경도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서양의 철학 혹은 학문 체계에 따라 과학을 배우고 과학적 사고라는 것을 하면서 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행복하게 살려면 생각보다는 느낌을 잘 잡으면 살아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그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행복을 주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토론을 하다보면 사람들은 흔히 과학적 사고가 진리를 추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양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 조차도 과학이 어떤 큰 가치를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과학을 왜 발전시켜야 하나요? 과학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과학, 과학하면서 살아야만 하는가요?

학문과 사고작용?

사실 논리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하는데 과학(적 사고)이(가) 필요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논리학을 하는데는 그저 논리적 사고면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철학을 하는데는요? 네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지요. 역사를 하는데는 역사학적 사고 필요할 뿐입니다. 수학적 사고를 하는데는 논리적 사고 내지는 합리적 혹은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나요? 네, 제가 수학을 잘 몰라서 정화하게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어쩌면 우리는 치밀하게 생각할 줄 알면 어떤 학문이든 다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 있게 사고할 줄 알면 철학을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사고를 하다보면 논리적이 될 수 밖에 없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학문에 다 그에 맞는 적당한 사고 작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족하구요. 그런데 요즘에 워낙 과학 쪽 즉 응용 과학을 포함하는 학문 분야가 많이 생기다 보니 과학 분야가 범람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다 과학적 사고에 물들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순수 과학을 제외하고는 다 과학이라는 말을 떼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엄밀하게 과학이 아니니까요. 비록 그것들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있을지언정 엄밀한 과학적 사고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러한 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가만히 보면 요즘에는 무슨 학문을 하든지 다 과학적으로만 사고해야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과학'에 경도된 생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만일 순수 과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 분야를 제자리로 돌려준다면 무엇무엇을 진짜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말 그대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정도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나머지는 다 공학 또는 인문학으로 불리면 될 것입니다. 공학도 과학이고, 인문사회학도 다 과학이면 과학이 아닌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속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학은 어떠한 점 때문에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연구 대상을 볼 때, 어떤 대상을 연구하는 것을 과학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는 서양과학계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과학이라는 말의 남용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 대한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정치.경제.사회 등 인간 세계를 다루는 학문은 모도 인문학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간의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자연과학이라고 할 때, 인간이 관계된 연구대상은 너무 복잡 미묘합니다. 그런 대상을 과학적인 엄밀성.정확성.인과관계의 명확성이라는 속성으로 관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경제학, 사회학 등 각종 학문은 그냥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인문학으로 두어야만 합니다. 왜 쓸데없이 사회과학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만들어 과학의 탈을 씌우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가설을 세우고, 일정한 조건을 갖춰 연구 대상들을 실험을 하며 얻은 결론이 가설과 부합할 때 하나의 이론으로 인정을 하는 이런 이론 수립 검증 과정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과학이라고 한다는데,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한 후에도 또한 엄밀성.정확성.명확성 등의 속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시공을 초월해서 언제나 참인 진짜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가변적입니다. 사람들의 사는 지역적, 문화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학문 조차도 사회과학이라는 미명으로 과학이라고 대접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어떤 정책이나 사업을 하더라도 이게 제대로 될 안될지 확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칠 수가 있은 것이지요. 

과학적 방법론이 학문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간주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그런 과학적 방법론을 신뢰하게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나중에 더 좋은 이론이나 원리가 나올 때 치열한 검증과 논리적 설득의 과정을 거친다고는 하면서, 하나의 고정관념 혹은 도그마가 되어버립니다.  쉽게 자리를 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면 인류는 잘못된 과학적 이론 혹은 원리에 따라서 살면서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보고 말지요. 이제 적당한 자리매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것은 어쩌면 저의 추측일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저런 사회과학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기만 하면 과학이라고 부르자고 했을까요? 저는 이것을 공모 혹은 야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전체 학계에서 워낙 과학의 힘이 (말빨이.. ) 세어지니까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정도의  용인 수준을 주어서 그런 범위안에 들면 우리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자 이렇게 합의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게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사회과학을 왜 제가 문제삼는 것이냐 하면 인간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예측 불허합니다. 어디로 튈지,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모습을 감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느끼는 감정 또한 오감의 만족체감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측정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자, 기본적으로 이런 변화무쌍한 존재를 어떤 원리를 통해서 규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인간을 합리적인 인간으로 가정을 했습니다. 아무리 가설을 세우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틀을 허락한다고 해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인간들을 합리적으로 가정을 하여 무슨 이론을 세우고 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학문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미 그렇게 간주하자고 전세계가 짜고는 속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한 것이지요. 그런 전제하여 수요와 공급곡선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까?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이상한 존재입니다.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반성을 하고, 인간을 다루는 학문을 (사회)과학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인문학의 자리도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도 미친 세계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 인간에 대해서는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뗄 준비가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남은 건 의학입니다. 의학도 인간의 질병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과학이라는 망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살펴본 것처럼 저렇게 복잡미묘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의 조건이 다른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는 단순한 아메바와 같은 동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인간 존재에 대해서 살펴볼 때 위에서처럼 단순하게만 따져보아서 그렇지, 인간의 상상력의 힘이라든지, 믿음의 힘 같은 사고의 더 크고 깊은 분야를 연구해 보면 더욱 놀라울만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이 옆으로 샜습니다! 어쨌든 다시 한번 결론 삼아 요약하자면,  그것이 한 인간에 대한 것이든 인간 집단에 관한 것이든 인간에 대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인문학 혹은 인간학으로 분류해서 과학과는 다르게 다루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과학과 실체 어떻게 다른가? 

과학, 혹은 과학적 사고 혹은 방법론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확고하게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실체일까요? 아니면 하나의 관념일까요?

분명 그것은 '과학(적 사고)'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그런 과학적 사고 결과로 얻은 물질은 바로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에 불과합니다. 흔히 과학하면 우리는 사고와 그런 사고작용의 결과물까지 합한 하나의 어떤 공고한 실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고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개념, 정의, 용어는 모두 인간의 뇌속에, 혹은 책속에 기억 혹은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책속의 자료들이야 어떤 실체로 보이겠지만 인간의 사고작요에 의해서 다시 해석작용을 하여 다시 뇌속의 관념계에 그리지 않은 한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관념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요. 그러한 관념이 어떤 하나의 견고한 실체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모든 인류가 사라지는 순간 그러한 관념들은 어떻게 될까요. 휙 하고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학적 방법론, 혹은 과학의 정의는 인간의 사고작용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고에 의해서 우리는 물질을 창조하거나 변형시키거나 해서 우리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어떤 물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맞지요. 과학 혹은 과학적 사고는 하나의 개념이다, 정도로 인식을 하면 됩니다. 그 과학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요.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인간에게까지 적용하여, 과학이 마치 무슨 진리가 되는 것처럼 지나친 신뢰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과학적 사고가 우리 인간의 행복엔느 어떤 결과를 미치게 될까요?

분명 그것은 물질적인 어떤 결과를 낳는 가치를 갖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과학의 결과로 인해서 인류 전체에게 수천만대의 자동차, 수억대의 핸드폰을 제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좋게만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류가 그 속에서 전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 극도로 나쁜 영향을 끼치면서 인류의 행복에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주지만, 환경에 악여향을 주면서도 그 대부분의 결과물은 극소수가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현실을 두고 과연 과학이 인류에게 이롭다고만 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만에게만 유익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정말 의미심장하고 우리를 통찰의 세계로 인도할 만큼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물질적 만족은 체감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높은 오감의 만족을 주는 그 어떤 대상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만족이나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만족은 점점 체감하고 무미건조한 상태로 되어버리니까요. 아시겠나요? 물질을 더 소유함으로써 인류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경제학의 가정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고 결과인, 사상 혹은 이념, 관념이라는 것에 우리는 속았을 뿐입니다. 전혀 엉터리 같은 가정에 속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고작용에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예, 이래서 우리는 생각을 더욱 잘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저의 논리가 궤변인가요, 아니면 쾌변인가요? 정말 치밀하지 못한 사유, 정말 깊이 없는 인간의 의식이 이렇게 우리를 세뇌시키고 결과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러한 일련의 사고들의 묶음인 개념 혹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냥 과학은 과학이네 하고 가볍게 여길 줄 알아야만 합니다. 

자, 이제 조금 더 깊이 있게 나아가 보겠습니다.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

우리는 이제껏 우리 외부의 세계를 즉 물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사고 작용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외부세계는 바로 우리의 사고작용에 의해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기본 구조는 무엇이면, 또는 속성은 어떤 것이며,어떻게 분류할 수 있고, 우리가 또한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연구해 왔던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면 물질, 그보다 큰 대상이면 대상, 동물과 식물을 (그리고 심지어 인간 자체를 그 한 대상으로 보고) 관찰하고 쪼개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결론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외부세계로의 탐험이며, 극미세계 (물론 이제는 우주로까지 범위를 넓혀서 극대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세계로의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이성의 세계입니다. 이성적인 접근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를 생명체로서 함께 교감하고 있지 못합니다. 과연 이렇게 분석적으로 아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체 그 생명 혹은 의식을 느낄 수가 있나요? 그런 것들에 대해 기계적으로 밝혀놓았지만 아무 것도 모르지 않나요? 혹여나 어떤 느낌을 갖고는 있는지, 어떤 생명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 존재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느끼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느낌장치, 혹은 느낌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끼는 작용이 물론 뇌에서 일어납니다만, 우리가 느끼는 능력을 극대화하면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외부 대상 세계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머리로 사고하는 이성 작용만 발달시켰기 때문에 우리의 느낌 능력은 퇴화되고 혹은 활용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동물과 교감하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심지어 식물과도 교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과연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겸손하게 생각해야만 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은 외부대상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원리적으로나만 제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자, 한번 깊이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자신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나요? 네, 바로 이성작용에 의해서 인식한 자기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고, 대체로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나이는 몇이나 되고 성별로 남.여성이다 정도 밖에 모릅니다. 대체 자기산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그런 생각과 감정이 연계되어 일어나는 존재라는 간단한 자신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자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 반응만 조금 깊이 관찰을 해보아도 알수 있는데, 이 간단한 사유과정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하나요? 원론적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그저 생각을 잘 컨트롤 하여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존재이건만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꼴리는대로 행동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살면 마치 동물처럼 살아가게 되지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그야말로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생각적으로도 잘 모르지만,,, 느낌으로는 더욱 자신을 못 느끼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느낌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느껴보라. 눈을 뜨고 외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눈음 감고 안으로 자신을 느껴보란 말이다. 우리는 이런 느낌 연습을 잘 했던 사람들이다. 본래 동양은 이렇게 안으로 자신을 느껴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알게 된 자신을 통하여 외부세계를 느껴오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호흡이고, 명상이다. 그리고 무식한 방법 같지만 108배를 해서 알고 100일기도를 하는 방법이다. 느낌이...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느낌은 사고작용의 간섭이 없이 직접 상대를 아는(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집적 느끼는 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직접적인 관찰이 아닌가? 이렇게 직관은 우리의 오감 그리고 뇌에 있는 감각기관을 직접적으로 이용하여 대상을 느끼는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느낌이 바로 느낌장치를 이용해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과연 뒷쪽에서 칼을 빼어든 자객이 칼을 후려칠 기회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묘골의 송연하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하는 느낌들은 우리가 바로 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이러한 직관의 능력을 다 갖고 있다.  단지 활용할지 모르고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의 세계를 요즘에는 우뇌적으로 표현한다. 결국은 과학이 서서히 그 뇌의 비밀을 다 밝혀줄 것이리라. 

흔히 그런다. 저사람 느낌이 별로야. 뭔지 이러저러한 이성적인 정보는 없지만 느낌이 안 좋다. 그런 느낌은 거의 맞는다. 당연할 수 밖에 흔히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물을 통째로 그냥 아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발전시키기만 하면 우리는 큰 힘을,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은 물론 다른 외부의 세계로까지 점차 더 잘 느낄 수 있는 느낌으 능력이 고도화되면 우리른 결국 우주와도 교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 통찰적으로 아는 지혜는 인간의 이성작용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고 근본적인 것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성의 넘어에 감성 혹은 느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모르는 체 하는가? 그것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많이 연구한 것이 바로 이 직관의 세계 혹은 통찰의 세계, 느낌의 세계인 것이다.  어쩌면 가끔은 서양 쪽에서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을 통하는 방법에는 그야말로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역마다 문화마다 다 다르지만 그 근본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느낌의 세계를 과연 과학이라는 물질적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느낌의 세계는 경험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알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애를 낳아보지 않았는데 산고를 알 수 있을까? 10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애를 낳아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알수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이성적인 사고만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의 세계를 이야기하면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외면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들이 나의 이성의 세계와 다른 느낌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보다 하고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일 뿐이다.

이제 내가 왜 '인간의 뇌를 전부 알면,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되리나!"는 글을 썼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느낌 장치는 뇌에 있다. 뇌의 능력을 더 많이 사용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뇌전체를 이용해서 느끼는 능력을 개발한다면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리라. 인류의 비밀은 뇌에 있는 것이다.

오늘은 참 길게 인간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더 세밀하게 밝힐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더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오감의 인식 능력이 비합리적이라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오감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도 기분 좋은 느낌은 잠깐입니다. 금방 없어지고 말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더큰집, 더 큰차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샀을 때를 빼고 진짜 행복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그냥 묻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현실은 아무리 더 큰집으로 사서 이사를 해도 항상 나보다 더 큰집에 사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여전히 부족하죠. 그런 부족하다는 생각이 패배감, 우울함을 낳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집에 살게 될 때 만족감 행복감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부채 더 많고, 이자 더 많이 내야하고, 세금 더많이 내는 것 밖에 없지 않나요? 결국 돈을 더 많이 쓰는 일만 남아서 계속 자신의 삶을 옥죄기만 하는 것입니다. 참 불쌍하고 억울하지 않나요?

이게 바로 엉성한 사고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치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사두기만 하면 오른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것 아시지요?

행복하게 잘 살려면, 이렇게 생각도 잘하고, 잘 느끼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백번,  천번 부동산 거품이 꺼질지 모르니 투기해서는 안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잘 생각하고 잘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뇌의 생각하는 능력, 느끼는 능력을 잘 개발해서 살기만 하면 참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뇌를 전부 알면,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되리라!  / http://blog.daum.net/myinglife/15966976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 세계는 관념의 세계와, 실제라고 생각되어지는 오감에 의해 느껴지는 고정불변하는 물리적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관념이 곧 실제인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과학을 하나의 실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큰 착각일 것입니다.

 

과학(과학적 사고, 과학적 방법론)도 하나의 관념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어디에도 과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뇌에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관념이 그렇듯, 그것이 똑 같은 것이라 간주하지만 과학에 대한 관념 마저도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어쨌든 그러한 과학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과학적 결과물들인 물리적 실체일 뿐이죠. 그것은 오감에 의해 그렇게 인지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흔히 세상을 과학이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말이요. 하지만 과학이라는 관념은 하나의 관념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녕 모르고 있지요. 과학은 과학을 할 때만 필요로 하는 관념일 뿐이다.

 

우리의 뇌는 이처럼 프로그램되어지는 것이지요. 험한 말로 하면 세뇌되는 것입니다. 진정 객관적으로 이러한 인과관계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들은 깨어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들이 부처님이고 예수님인 셈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프로그램되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이 있지요! ( 여기 )

2010. 7. 15.     00:31

인류가 하루 빨리 깨어나야함을 역설하고픈

푸른뫼

출처(ref.) : 자유게시판 - 국개론을 옹호하며, 국망론을 던지노라 - http://theacro.com/zbxe/free/232704
by 참사랑

<참고> : 삶의 여러측면들 ( 여기 )

<참고> :  The Universe

 

이제 이번 논문은 막바지에 달했군요.

지난 2008년 9월에 이런 저런 삶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서, 세계 경제와 우리 나라 상황에 대해서 썼던 글입니다.  그런데 제가 쓴 저 아랫내용에 대해서 동의를 하시나요.  저는 적어도 저런 글을 쓸 때, 적어도 세계 경제 전체의 흐름을 보고,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철학 혹은 사상의 의미와 깊이를 제대로 생각하고서 쓴 글입니다.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핵심을 짚은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가 위에서 밝히 인간 존재에 대해서 좀 안 다면, 남이 하는 이야기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제대로 생각해보고 또 합리적으로 추론해보고, 전체적인 시각을 갖고 살펴본다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론이 아닐까요?
 
세계 경제나, 사회나 다 인간의 사고 혹은 심리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300년 전에도 욕심으로 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 욕심을 갖고 있는 한 지금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에는 정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까지 안겨주면서 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경제제도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을 가져다붙여도 인간에 대한 이론입니다.  예측불가능한 인간을 어떻다라고 가정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제가 언제간 메인 게시판에 경제제도를 포함 모든 제도가 다 세뇌에 의해서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라는 취지의 논물을 소개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 사실 그게 오히려 실체이자 진실이죠. 되는 않는 갖은 이론과 법칙으로 인간을 설명할려고 해도 하나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8정도를 이야기하면 정사, 정사유, 정념을 이야기 합니다. 이게 별거 아니고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고 제대로 된 관념을 가지란 소리입니다. 정말 맞는 이야기를 몇천년 전에 부처님이 잘 밝혀놓은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보지 말고 그 사유체계 혹은 치밀한 논리를 한번 살펴보세요.  그 때 이미 거의 다 밝혀놓은 걸 우리는 아직도 모른 채 새롭게 연구한다 어쩐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은 생각, 사고, 사유를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생각이 느낌으로 나온 거지 별건가요? 결국은 생각, 사고, 마음, 정신, 영혼 다 같은 소리를 한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할 때 유치하게 생각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 때는 정신, 영혼이라고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구요. 또 몸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당연힌 마음해지 정신하고 이야기하나요. 육체와 정신이라고, 그렇게들 써왔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고요. 높은 생각을 갖고 살라고 하나요, 높은 의식, 수준 높은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이러저러한 정보를 가진 정보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든, 정신이든, 영혼이든 다양한 정보 중에 한 부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자, 종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것도 관념 중에 하나이니까 하고 넘어가자구요. 종교는 의식화된 관념의 결과인 셈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저기 저 태평양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를 자생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컴퓨터를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부처님 프로그램을 깔은 것입니다. 기독교 예수님의 프로그램을 까는 것이구요. 깔지 않은 프로그램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하지만 우리가 몸의 느끼는 체험을 하면 느낌의 세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느낌에서 오늘 깨달음은 표현하는 언어는 달라도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비, 알라가 다 같은 사랑으 느낌을 표현하는 용어라는 말씀이죠. 이제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관념의 세계니까요. 서로 다른 관념은 다툼과 분란과 전쟁을 낳게 만듭니다. 우리가 토론을 하는 것도 다 생각이 달라서 일어나는 입니다. 종교를 넘어선 세계로 들어가야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이론적으로나마 그렇지 않나요? 이게 제가 불교든, 기독교 등 종교를 넘어서자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참고> : 삶의 여러측면들 ( 여기 ) (써니/2008.09.20 21:41) 에서 발췌, 인용한 글입니다!

요즈음 세상의 변화가 무쌍하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있다.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국내 상황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가 출렁출렁 거리고 있다. 주가, 환율, 유가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고 있다. 국내 정치, 경제 상황이 요동을 치고 있다. 어떤 사람들도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섣부른 아전인수격 해석이 난무할뿐이다. 지금 극단적인 혼란의 시기이다. 한마디로 Chaos.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드러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필귀정이다.

어떤 그릇된 것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제도, 자율적 규제, 첨단긍융기법 등이 옳지 않은 사상과 철학, 제도가 무너지는 전조라고 보면 된다. 이 지구상에서의 모든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 동안 인간이라는 동물을 너무나도 잘 몰랐다. 소위 말하는 과학이 예측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 인류는 지금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고 있는 끓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개구리와 같다. 지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감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멀지 않은 시간에 개구리는 죽고 만다.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의 붕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탐욕이 부른 한없는 추락인 것이다. 부동산이든, 금이든, 화폐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한시적으로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의 가격은 인간들이 심리 즉 탐욕, 공포에 등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은주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간단한 진리를 무시하고 무한한 가격을 메기기도 한다. 그것에 근거한 어떤 것도 정해진 가치가 없는데 우리는 일정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미국이 진정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야만 한다. 국가 주도의 일시적인 구제금융으로 허약하고 나약한 미국의 경제체질이 절대 개선될 수 없다. 뼈아픈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저축하고, 투자 혹은 투기심을 버리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쫓으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이러한 위기가 부동산 거품에서 왔다는 극히 간단한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금융 거품이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미국 달러화는 가치가 없는 화폐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치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기축통화의 자리를 내 놓아야만 한다. 달러가 아닌 다른 대체 매개수단이 나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금도 아니다. 우리는 착각한다. 금은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금 역시 교환을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위험을 임시방편적으로 연기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결국 더 큰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거품도 반드시 빠지게 될 것이다.

개개인은 절대 명심하고 있어야만 한다. 다만 위정자들이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연착륙을 시켜 서서히 빠지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부동산을 통해 경제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려고 하다간 더 큰 위험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부동산의 실제적 가치는, 생명을 잃는 위험 앞에서 얼마만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느냐로 판단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물이 나느냐 나지 않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메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동산 가격, 가게의 수익성, 지리적 위치 등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만약 싸쓰(SARS) 10배 정도가 되는 호흡기 감염 전염병이 돈다면 인구가 많이 밀집된 지역의 부동산은 똥값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지진으로 흔들려 갈라지거나 파괴되거나 붕괴된다면 초고층 건물은 흉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은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그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이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소리다. 인생을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살까를 고민해야 하지, 허상과 같은 돈을 많이 벌어 배불리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태만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의 혁명을 요하는 일이다. 누가 있어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정신자세가 필요한 시대이다.

하루 빨리 내 정신이 올바른가 반성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제중학교 설립과 같은 터무니 없는 짓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정신이 나간 것이다. 여러가지 경쟁적 교육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 또한 미친 자들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인간을 살리는 길인지 모르는 바보천치가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오래지 않아 자연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지금 혼란의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짓들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참으로 불쌍하다 할 것이다.

 


 윗글은,  아래 글들에서 경제를 올바로 보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어, 저도 전에 흔들리는 세계경제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글을 써 놓았기때문에 참고삼아 퍼다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만 합니다. 

예, 아래와 같은 철없는 사고가 인류를 이러한 고통의 세계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인간은 그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시장 자율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규제하고 간섭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장과 경제가 다 인간의 사고작용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이제 저런 미신은 더는 아니다고 과감하게 부정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쉽지 않겠지요? 기득권, 기존의 고정관념은 저항을 하는 법이니까요. 특히 인간은 어떤 신념, 가치관을 가진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간주하거든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렬하게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요.  하지만 죽음에 직면해서야 포기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겠지요.
 
지나가다328호


... 라이프니츠의 공가능성에 대한 철학이고그 내용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란 건데... 이 세상은 수많은 가능한 세상중의 하나가 현실화된 것이며 수많은 가능성의 세상과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게 결국 저런 내용. 현실세계의 비가역적 성격과 가정적인 추정내용에 대한 언급이고 , 그렇다면 수많은 가능성중에 나타난 단 하나의 현실로서의 이 세상(그리고 이미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이 세계는 기존에 존재했던 잠재태 상태의 수많은 가능성으로서의 세상과는 같이 동시에 현실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논리하의 이세상) 을 긍정할 수(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밖에 없다는 맥락인데....



 이제 오늘의 글을 정리해야할 때가 왔군요.

인류는 과학기술에 있어서 수천년 동안 발전을 하고 성장을 하였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동안 설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변해왔지만 기본 구조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작용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이런저런 사상을 낳고, 제도를 만들어 왔을 뿐입니다. 이런 사고 작용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사회의 간섭을 심하게 직접적으로 받아야했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한 종교적, 사상적 탄압을 받았으니까요. 이러한 환경 자체가 우리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조건으로 작용을 했기 때문에 행복할래야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불교가 국가의 종교인 나라에서 불교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어울려 살 수가 없었겠고 다른 종교를 믿으면 탄압을 받았으니까요.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상과 종교에 있어서 거의 제한없는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법으로라도 그 자유를 보장해주니까요.  절대적인 조건으로 부자유를 주었던 조건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는 이제 또 다른 사상의 자유를 통해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지요. 자본주의다, 시장경제다 하는 사상에 붙들려 매여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복을 발로 차버리고 있지요. 또 종교적 자유가 있는데도 종교에 억매여 다른 종교인을 억압하면서 살아가고 있죠. 왜 남의 행복을 짓밟으려 하나요?

돈을 많이 벌어야 잘 살 수 있는 자신만의 생각이 바로 하나의 사상입니다. 또 남을 찍어눌러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또 하나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기업이 잘 되어야 사회가 풍요로워진다는 치우친 생각에 세뇌되어 자신의 사상의 자유를 옥죄고 있지요.  이제 솔직히 자신을 강제하는 어떤 부자유도 없는데, 여러가지 편협한 사고에 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닌가요? 분명 생각은 느낌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복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이 나게 마련이거든요. 토론이라고 할라치면 감정적으로 토론을 하다보면 기분도 나빠지구요. 정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고 혹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어쨌든 행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잘하고  잘 느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훈련도 행하고 느끼는 능력도 개발해야만 합니다. 보세요! 자꾸 화내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왜 생기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하구요, 그래도 어떤 자극에 자동적으로 화가 난다면 숨쉬기 훈련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화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오감은 느낌이 점점 떨어지고 퇴색된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의식으로 욕심을 내게 된다구요. 다음의 진언을 늘 마음에 새기고 말로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탐욕은 화를 부르느니라!" "내려다보고는 살아도 올려다 보고는 못산다"


진심으로 인류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2010.8. 22.      17:24



생각과 느낌에 행복이 있다고 외치는
<참>사랑

<덧글> 미처 교정을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