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차별 없다는 어그로성 글이 담벼락 화제인 모양이다. 반론을 싸그리 뭉개고 넘어가는 싸가지 없는 말뽄새는 별론으로 치고 사실 담론으로서의 호남 차별은 시효를 다했거나 효용성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막상 호남 차별 완화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이상한 방식으로 호남 차별을 확대 재생산할수 있는것이 호남 차별론이라고 본다.

인간 집단, 특히 정치적으로 결성된 인간 집단은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는건 정치학의 확고한 컨센서스다. 반호남 지역 구도의 정치 체제에서 비호남 구성원들이 호남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싸워줄 까닭은 없다. 오히려 호남 차별이 있어주는 것이 비호남에게는 유리하다. 영남 패권을 허물어 영남의 과잉 대표성을 완화할게 아니라면 호남 차별이 있어주는 것이 비호남 비영남 구성원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학교짱에게 덤비지 못할거라면 어설픈 양아치들이 삥뜯기 좋은 빵셔틀이 있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빵셔틀이 도덕과 정의에 호소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냉소와 경멸 뿐이다. 호남 차별을 강변해 봤자 왕따당하는 깽깽이가 병신이라는 핀잔밖에 들을게 없다는 것이다. 규범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규범을 호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호남 차별보다는 영남 패권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선 실 끝을 무작정 잡아당기기 전에 일단 엉킨 부분부터 차근 차근 풀어나가야 하는 것 처럼 호남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호남 차별 해소를 외칠게 아니라 영남 패권이라는 엉킨 부분을 풀어야 한다. 영남 패권의 타파와 척결 없이는 호남 차별 해소도 없고, 타 지역의 영남 식민지에서의 탈출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황태연식의 지역등권론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지역등권론은 호남 차별론과 마찬가지로 너무 정직하고 솔직한 나머지 효용성이 결여된 이론이다. 즉 충청과 경기에게 반영패 전선에 설것을 공식으로 요청하는 논리라고 할수 있는데, 이제껏 영남이라는 학교짱 꽁무니 쫒으며 호남 때리기에 가세한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영남과 대결할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수 없다. 충청과 경기로서는 갑자기 영남과 맞서는 위험을 감수할 까닭이 없다. 또한 지역등권론이 논의되는 것 자체로 영남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반영패 전선이 결성되기도 전에 영남이 주도하는 적전분열 앞에 무너질 위험성이 있다. 지역등권론은 전략의 구체적 내용과 컨셉을 적에게 모두 알려주고 시작하는 작전과 같은 것이다. 허허실실이라는 작전의 기본을 망각한 지나친 정공법이다.

난닝구의 친노 때리기도 마찬가지다. 친노의 호남 뒤통수 때리기와 연대 파괴 공작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선 친노 고사, 친노 말살 작전이 과연 호남에게 이득이 되는지 요즘 들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즉, 호남의 제한된 정치력, 특히 난닝구의 정치력을 과연 친노 척결이라는 데 올인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정치는 1차 방정식이 아니다. 변수가 최소한 2개 이상인 고차방정식이다. 친노가 민주 개혁 진영 내부에서는 영남 패권 세력으로 기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권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영남 패권을 우회적으로 타격하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수도 있다. 대구가 고담 대구로 불리며 정치경제적 고립에 처한것은 노무현 때였다. 김대중 시절에는 pk와 tk가 합세해 전라도 타격에 나섰지만 노무현 시절에는 그런 연합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 부산 정권을 자임한 노무현 정부에서 pk 지역 엘리트들이 상당한 재미를 본 까닭에 tk와 뭉쳐서 반전라도 연합 전선을 펼 필요가 상대적으로 없었다. pk의 성장이 오히려 tk와 pk의 내부분열을 부르는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