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비판자들 또한 변이의 원천은 유전자라는 전제를 너무 자명하게 받아들였다. 변이는 물론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며, 이건 현대 생물학이 밝혀낸 매우 중요한 성과다. 문제는 양 진영 모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곧장 변이에 원인이 없다는 주장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세상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과학에서는 원인이 없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그 자신은 어떤 것의 작용도 받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변화에 의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여기에는 기독교에서 믿는 신의 그림자가 짙게 어려 있다. 그럼 유전자는 왜 변화하는가? 물론 알 수 없다. 그건 변화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 알 수 없지만 모든 다양한 현상의 원인이 되는 이 지점 속에 신은 오롯이 깃들어 있다.

나는 무수히 발생하는 변이들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유전적 변화에도 당연히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341)

 

박성관TV에 나와서 20세기 진화론이 창조론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아마 위에 인용한 구절이 둘이 비슷하다는 근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박성관TV에서 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조하라.

 

강수돌, 진중권, 박성관, 진화론에 대한 무식을 자랑하다: TV, 책을 말하다> 327회를 보고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370

 

양 진영 모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곧장 변이에 원인이 없다는 주장과 동일시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 중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단 말인가? 나는 한 번도 못 봤다. 도대체 누가 돌연변이(mutation, 박성관변이라고 썼는데 보통 변이variation의 번역어로 쓰이는 것 같다)에 원인이 없다고 주장했단 말인가? 오직 박성관의 상상 속 20세기 세상에서만 주류 진화 생물학자들이 돌연변이에 어떤 원인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이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은 특별히 번식에 유리한 돌연변이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생물에게는 번식에 유리하도록 돌연변이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돌연변이도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무작위적일 수 없다.

 

박성관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는 식의 구절만 보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진화 생물학자들은 돌연변이에 원인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결론에 이르며 결국은 다윈 이후로 진화론과 창조론이 비슷해졌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진화론은 양친의 생식 후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변이가 발생한다고 본다. 변이 자체가 무작위적으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작위적으로 발생한 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특정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잘 아시다시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진화론이다. 반면 다윈은 짝짓기 이전에 이미 양친의 성 요소가 이러저러한 변화를 겪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 변이는 우연이 아니라 어떤 원인, 즉 외적 조건(의 변화)이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다. (352)

 

도대체 박성관이 읽은 교과서는 무슨 책인가? 현대 진화론에서 배우자(gamete) 즉 정자나 난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를 무시한다고? 오히려 현대 진화론은 그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이미 수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체세포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암을 해명하는 데 긴요하다. 또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수정란의 유전체가 처음 복제될 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좌(locus)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두 사람이 어떤 면에서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수정이 된 이후에 발생하는 돌연변이도 무시하면 안 된다. 어쨌든 20세기 진화 생물학자들이 배우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를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오직 박성관만 들려줄 수 있는 복음인 것 같다. 할렐루야!

 

 

 

현대 진화론에서는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저절로 변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한 변이는 자연조건에 비추어 유리한 형질과 불리한 형질, 혹은 유불리를 따질 수 없는 형질로 갈린다. 따라서 변화의 원천은 유전자에 있고 환경은 사후에 작용할 뿐이다. 자연조건은 변이가 발생한 이후에나 의미를 가질 뿐, 변이가 발생하는 단계까지는 전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조건의 변화가 생식계통을 교란시켜 그 결과 변이가 발생한다. (353)

 

어떤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가 자연조건이 변이가 발생하는 단계까지는 전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나? 한 명이라도 대 보시라. 강한 방사선이 돌연변이를 많이 유발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자연 방사선이 적은 심해 동물의 경우 지상 동물에 비해 돌연변이가 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Dawkins의 책에서 본 것 같다).

 

다윈은 야생 동물보다 사육하는 동물이 돌연변이가 더 많이 발생한다고 본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야생과 사육의 차이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정도의 차이를 찾으려는 가설은 방사선의 차이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정도의 차이를 찾으려는 가설보다 훨씬 가망성이 없다.

 

 

 

한편 현대 진화론에서는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어떤 변이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변이는 근본적으로 유전자로 환원된다. (353)

 

발달 체계 이론(developmental systems theory, DST) 주창자들은 비유전자 유전(non-genetic inheritance)에 주목한다. 즉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돌연변이에 주목한다. 주류 진화 생물학자들이 발달 체계 이론을 냉소적으로 대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유전자 유전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어떤 변이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박성관는 DST나 비유전자 유전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나 했을까?

 

 

 

하지만 변이성을 유전자 자체의 우연적 변화에서만 찾고, 자연조건과는 무관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유전자 환원주의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모든 변화의 원천이라 믿음으로써, 신을 유전자로 대체하고 있다. 21세기의 생물학이 그런 퇴행적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다윈이 고투 끝에 밝혀낸 자연조건(의 변화)의 작용을 깊이 사유하여야 한다. (355)

 

박성관은 유전자 환원주의라는 단어에 또 다른 의미를 하나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20세기 진화 생물학자들이 신을 유전자로 대체했단다. 다윈으로 돌아가자고? 내가 보기에 다윈은 돌연변이의 발생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조건에 대해 제대로 밝혀낸 것이 없다. 돌연변이의 발생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을 알고 싶으면 다윈이 아니라 20세기 분자 유전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물론 위에서 지적했듯이 자연조건이 돌연변이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우기는 저명한 생물학자는 20세기 후반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내가 인내심을 더 발휘하여 이 책의 다른 장(chapter)도 읽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5장에 대한 비판으로 박성관이 얼마나 한심한 아마추어인지를 충분히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201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