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댓글에서 잠시 소개했던 윤홍식 강의에서는 예수가 붓다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즉 예수가 십지나 십이지보살이라면 붓다는 팔지보살 정도된다고 말하기도 하구요. 붓다도 사실 대승적 가르침이 있지만 주로 아라한 즉 견성(열반)에 촛점을 둔 반면 예수는 견성(열반)을 넘어 이른바 6바라밀을 완벽히 구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물론 기독교 신학처럼 예수=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럴 가능성 차제를 부정하지도 않지만 이미 의성신(삼지보살이나 오지보살정도가 이단계라고 하네여)정도면 신성의 영역입니다. 구약에 그 유명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지요.("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셨으나[시편82장 6절])

 

반면 전통불교에서는 붓다가 예수보다 먼저 왔고 견성자체를 자세히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 대승적 가르침(공 유식 보살)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보다 더 높다고 볼 것입니다. 즉 비로자나불로써 창조주와 맞먹는 지위라고 보잖아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이 삼신은 법신 보신 화신이거든요. 반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그 옆에서 보좌하고 있잖아요. 예수는 관세음보살아니 아니타불정도의 지위라고 보는 것이죠.

 

어느게 맞는지는 머 각자 판단하시면 될 듯 싶네요. 전 이부분에서 노코멘트. 사실 별로 중요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런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견성(열반)하고 6바라밀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에요. 즉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철저히 초합리성의 본질 자체를 보자는 거죠.

 

사실 불교도들은 6바라밀을 완벽히 구현한 예수를 열심히 연구하고 따라가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견성(열반)의 메카니즘을 아주 조직적으로 가르쳐준 붓다를 연구해야 한다는 게 저의 관점입니다.(예수의 6바라밀은 이미 견성을 전제하는 것이고 나아가 붓다의 견성은 이미 과거 6바라밀의 실천이 전제된 가운데의 견성입니다.) 즉 견성이 아공이라면 6바라밀을 통해 법공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붓다는 견성이 먼가를 제대로 보여주셨고 나중에 오신 예수는 6바라밀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신 것이죠

 

참나는 사실 나의 뿌리=열반=견성이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세례(성령내주)체험이나 견성이나 같은 것이죠.

 

견성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윤홍식의 견성콘서트 동영상을 참조하시길 바래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부분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_ySndtowHQM&list=PLNy6hGwdQdlX92lapfOkpStiO6w1JZu1X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1강 - 허공에 울려 퍼진 예수님의 음성

http://www.youtube.com/watch?v=evC4iio2wE8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2강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V3GPpU6H1as 

 

윤홍식의 유식학 강의 - 만법유식 (萬法唯識)

http://www.youtube.com/watch?v=ugiD6m00cZI

 

윤홍식의 유식학강의 4강 - 아뢰아식과 업(業)의 실체

http://www.youtube.com/watch?v=TbBBGsL2_ss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창조주)은 하나님의 아들(즉 보살)의 출현을 위해 지금 이 우주를 경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
는지라...(중략)...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의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세기 6장 2∼4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기 1장6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서니."[욥기 2장 1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장 26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장 14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로마서 8장 1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9절]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셨으나[시편82장 6절]

 

여기 보면 아에 지존자의 아들이 곧 신이라고 하고 있죠. 즉 신성을 의미하죠.

 

그런데 예수는 이 하나님의 아들(=보살)중에서 가장 높은 보살=맏아들=독생자=하나님이 직접 상대하는 아들=하나님이 직접 기름부은 아들 정도 되지 않을까 해요. 다만 불교에서는 붓다가 창조주니까 하나님이 되겠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힌두교 신학 나아가 조로아스터 신학의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원론적 사고로서 자아작용의 산물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자리는 무차별의 세계로 사실 말할 수 없는 영역이고 그게 각 문화권의 자아작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뿐이라는 것이죠.

 

이 지구가 끝나는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이 없게 될 때인데 그때에는 지구적 윤회도 끝나고 진짜 지구적 심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지구 자체가 끝나는 시기이죠. 이런 관점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끝나더라도 우주 자체와 우주적 윤회는 계속될 수 있습니다.

 

견성이 사실 아라한인데 이게 6바라밀과 연결되지 못하면 사실 좀 위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견성만 하고 6바라밀로 안나간다는 건 먼가 진짜 견성인가 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붓다도 처음에 너무 어려워서 자신의 견성을 알리면 사람들이 알까 의심하다가 결국 알리기로 했는데 이 전도 자체가 6바리밀의 실천입니다. 바로 열반에 들어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계속 전도하는 경우 병도 들고 아프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아에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드려버렸죠. 그래서 예수의 6바라밀은 사실 차원이 다른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견성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원래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미혹에 가려 인간이 그걸 못보고 외부의 어떤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다보니 외부의 어떤 것(이걸 우상이라고 하죠)을 신으로 떠받드고 살고 있었던 것 뿐이죠. 하지만 그것은 오온의 무상한 것일뿐 실제 신이 아닌 것이죠. 따라서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이죠.

 

견성과 6바라밀을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고 찾고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있다고 했고 이것 자체가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죠.  그 결과 주어지는 게 성령인데 이게 결국 견성=열반입니다. 이로서 진정한 신을 찾은 것이고 자기의 뿌리를 찾은 것이며 영원한 진리에 이른 것이죠. 그리고 다시 이 세상가운데 그 진리가 먼지 가르쳐주고 다른 사람도 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불국토)를 세워가는 것이 바로 6바라밀입니다.

 

견성(열반)[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6바라밀의 실천----------->보살[일지보살부터 십지보살]=하나님의 아들

 

여기서 견성은 무념의 단계로 지관쌍운=정혜쌍수입니다. 즉 성령자리입니다. 보살은 참나 즉 성령의 뜻대로 인간이 실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단계입니다. 반야방편쌍운이라고도 하네요. 경전에는 보살은 일지보살부터 십지보살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나누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견성은 사실 성령의 음성 또는 신적 음성을 듣고 따라살 수 있기 위한 기반이 되고 그걸 통해 이 세상가운데서 6바라밀을 실천하므로써 영적육체를 얻는다고 하네요. 죽어도 실제로는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된다는 그런 영적육체라고 합니다.

 

사실 참나=열반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와 함께 있음에도 이 세상의 것에 정신이 팔려 이것을 못 보는 것이죠. 그래서 선정을 통해 이것을 보라는 것인데 보통 엄청난 고난에 처한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서 즉 무상함을 깨닫으면서 기도(명상) 가은데 견성 즉 거듭남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귀의가 사실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이 견성이라는게 너무 쉬운 것이었는데 눈에 머가 씌어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자연과학은 합리성의 영역이고 그것은 기반은 수학입니다. 자연을 수학으로 풀이한 것이죠. 수학은 사실 하나의 언어인데요 이건 바로 개념화작용이고 결국 6식의 최상승경지일 뿐입니다. 이것 위에 있는게 자아로써 그것은 인간의 개체성과 관련됩니다. 넘어 아뢰아식에 있는 업장은 과거 윤회에서 쌓은 것들로 사탄에 해당됩니다. 물론 사탄이라는게 진짜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의 작용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본다면 사탄의 자식이므로 거의 똑같다고 봐도 됩니다.

 

팔만대장경의 그 많은 말보다 사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성령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이죠. 즉 견성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밖에 눈이 쏠려서 그것이 자기인줄 알고 착각하고 살다보니까 성령이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모를 뿐이죠. 그 성령을 보는 순간이 바로 견성입니다. 그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6바라밀인 것이죠.

 

성경은 사실 팔만대장경을 압축해 놨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성경에서 진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주 상세히 풀어서 설명해주므로써 매우 조직적이고 실천적 이해를 가능해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사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즉 모든 인류에게 공평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열반=견성=성령세례=거듭남 이라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중생과 성화의 논의가 있는데 이건 사실 견성과 6바라밀의 논의와 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생에서 중생 이후 또다른 성령세례가 있는가 논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견성의 4단계[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비슷한 논의입니다.

 

사실 서양의 신 중심의 논의는 외부에서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이고 동양의 법 중심의 논의는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는 구조입니다. 즉 창조주로부터 시작해서 이미 하늘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중에 가장 뛰어난 맏아들이 창조주의 뜻이 무엇인지 인간세에서 가르쳐주기 위해 내려와 어떻게 하면 창조주를 제대로 믿고 따르는 것인지를 완벽한 모델로 다 보여주시고 가신 것이죠. 이때 인간세에 오신 예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다 존재했었습니다. 다만 견성하고 자기 안의 성령이 말하는 고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믿는 것이 먼가를 제대로 보여준것이죠. 마지막에 십자자에서 죽으므로써 이 모든 것을 완성했구요.

 

반면 동양의 법 중심의 논의는 내부에서 시작해서 외부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붓다가 주로 말했던 것도 어떻게 견성하는가 였고 이것은 곧 내 안의 참나=열반을 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유식사상이 전개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나중에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으로까지 도달합니다. 붓다는 사실 비로자나불의 화신이었다고 보게 됨으로써 말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건 견성(중생)과 6바라밀(성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각 문화권의 자아의식에 의해 매우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신=법이 말하고자 하는 건 깨닫고 변화되어 윤회(지옥)가지 말고 신=법의 세계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일 뿐이지 않을까 합니다. 내면의 신의 음성을 듣고 고대로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천국인 것이죠. 그 메카니즘이 바로 육체가 죽은 다음에 진짜 천국으로 이어지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