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에 대한 적응 가설에는 온갖 종류가 있다. 수컷의 강간 행동에 대한 적응 가설도 있고, 암컷의 강간 방어 행동에 대한 적응 가설도 있고, 강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관련된 적응 가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수컷의 강간 행동에 대한 적응 가설만 다룰 것이다.

 

 

 

강간에 대한 적응 가설을 수컷이 강간을 하도록 설계되었다라는 명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무턱대고 이런 식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간과 관련된 두 가지 서로 다른 질문을 짬뽕해서는 안 된다.

 

첫째, 강간을 전략으로 보고 강간이 유력한 전략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때에 따라서 강간을 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번식에 이득이 된다면 강간은 유력한 전략이다. 즉 때에 따라서 강간을 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택압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해당 종의 수컷이 강간 전략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떨 때 강간이 유력한 전략인가?라는 질문도 던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경우 같은 부족 여자를 강간하는 것보다 다른 부족 사람을 강간하는 것이 더 유력한 전략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추장의 딸이나 아내를 강간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없는 곳에서 고아를 강간하는 것이 더 유력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둘째, 심리적 메커니즘의 수준에 초점을 맞추어서 강간에 전문화된 선천적 심리적 메커니즘이 적응으로서 진화했나?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온갖 종의 동물들 중에 강간이 관찰된 종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종에서는 강간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강간을 전혀 하지 않는 그 수 많은 종들 중에는 다음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종도 있을 것이다.

 

첫째,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다.

 

둘째, 수컷에 비해 암컷이 교미 상대를 고를 때 더 까다롭다. 따라서 수컷이 교미를 원하는데 암컷은 교미를 원하지 않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셋째, 수컷은 먹을 것 등을 둘러싼 경쟁이 발생할 때 강제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세 조건을 충족시키는 종의 수컷에게 강간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이 전혀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수컷은 강간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강간을 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교미를 하고자 하는 동기도 있으며 수컷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 강제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의 수컷이 전혀 강간을 하지 않는다면 강간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이 있다고 보아야 더 그럴 듯하다. 그 수컷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강간을 하지 않는다는 식의 프로그램이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 등과 관련된 경우에는 강제력을 사용하지만 교미에서는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종의 수컷이 그렇게 진화한 이유는 강간이 유력한 전략일 때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암컷의 생리적 구조 때문에 수컷이 힘이 세다 하더라도 강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암컷이 강간 당했을 때에만 수정이 되지 않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진화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강간으로 얻는 이득에 비해 보복으로 입는 손해가 훨씬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금방 제시한 가상의 사례에서는 강간이 유력한 전략이 아니었지만 강간에 전문화된 선천적 메커니즘은 존재한다.

 

 

 

위의 사례와 정반대되는 사례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종에서는 강간이 유력한 전략이다. 하지만 강간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은 전혀 없다. 그냥 성충동 메커니즘과 강제력 사용 메커니즘이 결합되어 강간을 할 뿐이다.

 

 

 

강간이 유력한 전략인가?라는 질문은 행동의 수준에서 고찰한 것이다. 반면 강간에 전문화된 심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는 심리적 메커니즘의 수준에서 고찰한 것이다. 결국 번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행동 또는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행동의 수준에서 고찰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하지만 개미보다 행동이 훨씬 변화무쌍한 인간을 다룰 때에는 심리적 메커니즘의 수준에서도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두 수준의 서로 다른 질문을 짬뽕하지 않고 잘 구분해야 한다.

 

 

 

201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