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적으로 말하면 원래 하나님=법과 일치하는 나일 것이고 사단의 허망한 꿰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법을 쫒는 나일 겁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법은 무자성의 하나님=법임을 전제합니다.

 

6식까지가 표층의식이라면 7식말라식과 8식아뢰야식이 심층의식(무의식)입니다.

 

성경에서 죄란 하나님=법과 어긋나는 것 즉 과녁에서 벗어난 것인데 제7식말라식(자아의식)이 이 죄를 짓는 허망한 주체이고 그 배후에는 아뢰아식에 저장된 업이 있는데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업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며 또 현재의 말라식에 의한 것들이 습기의 형태로 조금씩 쌓여 다시 미래의 종자가 되는 곳입니다.

 

아뢰아식에 저장된 오염된 업식은 사탄처럼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자기 멋대로 끌고 갑니다.

 

다만 기독교 신학에서는 사탄은 실체적인 자성으로 나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아식의 오염된 업식은 과거에서 온 것으로 무자성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탄의 유혹은 사실 업식의 유혹이고 그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은 것은 바로 사탄의 유혹에 의해 만들어진 헛된 자아로 하나님=법과 다르게 살아가는 인간 실존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아덴에서 쫒겨 난 것은 바로 무서운 인과법칙에 지배되는 노예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7말라식과 8아뢰아식의 오염된 업식에 따라 살지 않고 8아뢰아식의 정한 식이나 제9아마라식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 나가 아닐까 하네요. 이곳은 하나님=법과 일치하는 세계이고 그곳에서는 인과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세계이므로 원을 세워거나 소망을 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세계일 겁니다.

 

그러나 참 나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법을 듣고 기도하고 나아가 선정수행[간화선 수행]을 하는 가운데(또는 기독교적으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깊은 정신적 기도[이게 간화선 수행과 유사]로 들어갈때) 돈오적으로 깨닫아지게 됩니다.(기독교적으로는 거듭남 또는 성령세례). 그리고 이게 시작인데 완전한 무상의 정등각에 이루기까지는 점수가 필요하니깐요.(기독교적으로는 성화과정이 되겠네요.)

 

간화선 수행과 관련하여 화두를 붙잡고 수행하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화두로 어떤 상황이 일어나던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하면서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삿된 준행을 차단시키는 거죠. 단지 기독교 신학을 믿는다고 이게 이루어지는게 아니라는 것이고 그건 거듭남도 아니고 그냥 망상식일 뿐인 것이죠.

 

꾸준히 기도하고 깊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하나 붙들고 나의 모든 생각과 가치판단을 모두 죽여가면서 오직 하나님 하나에 메달리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 돈오적인 깨닫음에서 비록한 강력한 신앙 나아가 어떤 체험적인게 따라오게 되죠. 이런 가운데서 엄청난 능력도 받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신통력과 같은 것이기도 하구요. 다만 신비체험에 너무 메몰되면 자아가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은 딴데 가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간화선도 궁극에서는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몇날몇일 그거 하나만 붙들면서 자아를 다 죽여버리는 것이니깐요. 그러나 어느순간 돈오적인 깨닫음이 불연든 몸 전체적으로 체득되면서 이른바 열반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제가 자꾸 성경이나 기독교를 연결시키는 것은 불립문자적인 진리는 어느 곳에나 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자기가 거듭나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기독교 신학에서 정립해놓은 그 신학적 교리를 믿는나고 결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학에만 머물면 그건 지식자랑일 뿐이고 그걸 넘어서야 진정한 깨닫음이 시작되는 것이므로 말입니다.

 

2.

 

http://www.youtube.com/watch?v=74S-hho4J_I

무상의 세계, 열반의 세계, 아뇩다리삼막삼보리(진리의 세계)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어느 것이 옳은지 찾아내도 30방을 맞을 것이고 찾아내지 못해도 30방을 맞을 것임이라.

 

무상의 세계는 광야와 같은 환경에 처해 모든게 허무하고 공함을 깨닫는 세계, 열반의 세계는 그로 인해 자아가 모조리 죽어나가고 참 나를 아는 세계, 무상정등각의 세계는 모든 것이 진리임을 깨닫는 세계.

 

여기서 숭산스님은 옳은 것을 찾아내도 30방을 때리고 못 찾아내도 30방을 때린다고 함으로써 애시당초 찾을려는 생각자체를  포기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 공안은 그걸 노린 거죠. 숭산스님은 저 3가지 세계중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려는 그것 즉 자아작용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 같네요. 어느것이 옳다 옳지 않다 모두 자아작용이니깐요.다만 그것을 깨닫은 이후에야 비로서 법을 설해서 저렇게 말할 수있는 것이겠죠.

 

똑같은 말을 해도 깨닫고 말을 하는 것과 깨닫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이죠.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며 하나는 윤회요 하나는 열반이니깐요.

 

3.

 

참 나에 대해서는 아래한번 보시면 좋을 듯 싶네요.

 

④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Amala-vijnana)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혹은 아말라식(阿末羅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鎭如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 602-664) 계통의 법상종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섭론종의 9식설을 구유식이라 하고, 현장의 8식설을 신유식이라 한다.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원측(圓測)은 9식설을 취하지 않고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한다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 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현장(玄?) 이후에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8식이 성불하면 제9 아마라식이 되며, 제9식 아마라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9식 아마라식은 일반 중생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 대중이나, 아니면 이제 겨우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들일진대 감히 부처님의 경지인 제9식이야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부처님 경지가 아닌 중생들이야 8식까지만 논의해도 되는 것이다.

 

4. 아래는 출처

 

A

 

 http://blog.daum.net/511-33/12369721

 

 

<유식사상(唯識思想,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

 

1)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의 관계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고통의 현실 세계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나와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부정을 뒷받침해 주는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다. 붓다는 연기법에서 온갖 현상들은 다만 인연 따라 존재할 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에 부파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은 공(空)이지만 그 만법을 이루는 요소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공적 반야사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공(空)사상의 공을 설명하기가 난해하므로 보충적으로 설해진 것이 중관사상(中觀思想)이다. 그러나 중관사상 역시 현실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어 다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용수(龍樹)의 중관사상에 의해 이론적 기반을 구축했던 공사상(空思想)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인식의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키게 했다. 유식설은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고도의 심리학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유식의 사상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인식의 한계성 및 심층심리와 거기에 잠겨 있는 이기성(利己性)의 실태를 정면에서 추구하고, 진실한 자기의 모습, 마음의 성찰을 바탕으로 하면서 탐색했다.

중관사상은 공의 논리를 전개했으나 체계적인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현실적 존재가 어째서 이 같은 질서 위에 성립돼 있는가 하는 까닭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것이 유식사상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식(識, 인식작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상의 요점은 상식적으로는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라고 믿어지는 물질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인식작용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작용이 보는 것이라면 그 대상 즉 경계(境界)는 보여지는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유식은 아비달마의 유적존재관(有的存在觀)과 반야 공사상의 무적존재관(無的存在觀)을 중관적으로 인식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사상을 논리화하고자 했다. 반야사상이 지나치게 출가자 중심의 사상이었다면 유식사상은 중생과 깨달은 자를 구분해 현실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심층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이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는 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을 했고, 인간의 심원한 인간 응시의 사상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공과 마음의 해탈을 가르치고자 했다. 중관불교가 초기불교이래의 예지를 강조하고, 인간존재의 이법을 탐구하며 반야와 공의 실천을 강조했다면, 유식불교는 마음의 심층세계와 해탈의 심리를 탐구했기에 이 양자는 대승불교 사상의 양대 기둥을 이루었다.


2)유식사상이란 마음에 관한 것이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서 정립된 유가학파의 근본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돼 있는 종자로부터 생긴 것으로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해서 생긴, 결국 자기 자신의 인식수단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모두 마음 작용인데, 견분은 인식하는 장(場)이 되고 상분은 인식하는 대상(對象)이다. 즉, 견분(見分)은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등 사물(事物)을 마음 안에 끌어들여 인식하는 주체인 심식(心識) 작용이고, 그 반대가 인식의 대상인 상분(相分)이다. 따라서 주관의 부분이 견분이라 하고, 객관의 부분이 상분(相分)이다. 견분은 대상을 인식하는 인식 주관의 작용이므로 만일 견분이 없다면 어떻게 관조(觀照)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받아들이기를 나와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들의 현상인 만법(萬法)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 만법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인식하는 근본 이유는 내 몸에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오근(五根), 즉 안(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입)  신(身/피부)이 나의 주변에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 귀로 들을 수 있는 한계,… 등과 같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그 기능은 제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가지는 한계 밖의 정보까지를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지 않고도 보고, 듣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기관의 기능을 초월한 식(識/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식은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때부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고, 피부로 느낀 것들을 저장해서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은 이렇게 쌓여온 식이 있기에 가능하다. 만법(萬法)이 실제 존재한다기보다는 식이 저장해 놓은 종자(種子)에 의해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다. 식이 없다면 만법을 알 수 없다. 그러니 식이 없다면 만법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 의하면 유(唯)는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고, 식(識)은 오직 심체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광활한 초원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이 나무를 보고, 지친 나그네는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수는 베어서 가구를 만들고 싶어 할 것이고, 상인은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할 것이다. 또 화가는 스케치하기에 바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물을 놓고 각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식(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식이 곧 마음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옛 여인이 생각나서 골똘히 그 여인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이 때 “이봐, 저것 좀 봐, 참 아름답지?”라 하며 옆의 친구가 건드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경치는 지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다. 분명히 눈으로는 봤을 텐데,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없다. 왜 그럴까? 눈은 마음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이란 식이다. 곧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식(識/마음)이다. 5근(五根)은 다만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의 가치는 우리들 마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마음은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크게 보면 곧 식(識)이다. 식이란 다섯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적 인식(전5식/前五識)과 이를 분별하는 의식(意識) 내지는 인식활동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식을 이와 같이 정의 할 수 있으나, 유식불교에서는 이 식(6식) 외에 인간의 정신세계가 제7식 말라식(manas)과 제8식 아뢰야(alaya)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식을 넓은 의미에서 마음이라 하며, 좁은 의미로는 제8식만을 지칭한다. 마음은 작용을 통해 겉으로 들어난다. 즉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작용이다.


3)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마음의 현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 철학이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번뇌를 가져다주는 근본으로서 실체적인 개념, 즉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관념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실체적인 개념이 생겨나는 마음의 구조와 그러한 개념을 떠난 진실된 마음의 구조를 상세히 밝혔다.

곧 우리의 마음은 서로 관계하며 연기(緣起)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구조를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구조이다.

전식득지, 줄여서 전식(轉識)이란 망상과 분별을 일삼는 유루(有漏)의 식을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 번뇌로 인해 오염된 망식(妄識)을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전환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 중생의 마음은 무명 업식(無明業識)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은 반야의 무분별지(般若智)이다. 우리가 깨달음의 경지로 간다 함은 우리들의 무명 업식을 버리고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유식에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하며, 이 전식득지를 근본 취지, 즉 대의(大意)로 하는 것이 유식학이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중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전식득지를 통해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곧 전식득지는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지혜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규명한 것이다.

이 전식득지의 구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지혜는 미래에 계속된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의식이 지혜로 바뀐 순간부터 지혜는 계속해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보살의 이타행(利他行)과 자비행(慈悲行)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더욱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혜가 증득되는 전식득지의 경계는 용수(龍樹)의 공사상에서 보이는 공(空)을 체득하는 경계임을 알 수 있다. 공의 체득을 통해 열반의 경계가 나타나듯 전식득지 또한 이타행과 자비행의 근원으로서 대승보살의 위대한 정신적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식설은 식(識) 이외의 존재를 부정해 ‘오직 식만 있고 대상세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세계도 없다’는 입장에 서서 반야(般若)의 공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다만 요가라는 실천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근본자세에서 보면, 수행단계에서는 적어도 마음, 즉 식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식이 존재하는 양상을 수행에 의해 오염된 상태로부터 청정한 상태로 변혁하기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 속의 온갖 오염된 종자(種子)를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만으로 가득 채우는 전의(轉依)가 유식설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루식(有漏識)을 돌이켜 무루지(無漏智)를 얻는’ 전식득지는 유식의 목표이자 불교의 궁극적 지향이다.

 

5. 유식사상의 중요 개념


1) 8식(八識)의 구조


※심성(心性)과 심상(心相)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을 심성과 심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성은 모습이 없어 이름을 칭하기가 어렵지만 방편으로 진여 또는 불성 및 공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 진여를 바탕으로 해서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이라고 한다. 심성은 진제(眞諦)로서 평등해서 차별이 없지만 심상은 속제(俗諦)로서 차별이 있으며 차별의 마음을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상의 체성을 8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8식설이다. 이는 심의식(心意識)을 분류한 것으로서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심체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들 심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6식(六識)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6근(6根)이라 해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 대상인 육경(6境)을 만날 때, 각각의 감각 장소인 육근을 통해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6식(6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식이다. 초기 불교에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육근이 육경을 만났을 때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육식이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존재 속의 인식작용이 18가지 범주로 나누어졌음을 알게 되는데, 이것을 모두 합쳐 18계(十八界)라고 한다. 즉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눈 귀 코 혀 몸뚱이(피부) ? 마음(뜻)의 6종의 감각기관, 즉 6근과 그 대상인 물질(色) ? 소리(聲) ? 냄새(香) ? 맛(味) ? 촉감(觸) ? 사물 혹은 현상[법(法)]의 6경, 그리고 이 6근 ? 6경을 연(緣)으로 해서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6식을 합한 것이 18계이다.


※근(根)---여기서 근(根)이란 식(識)을 일으키는 근거라고 해서 근이라 한다.

※식(識, vijnana-skandha)은 알다, 인식하다, 요별하다는 의미이며, 넓은 의미로는 대상을 감각, 지각, 사고하는 마음의 활동 일반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은 마음을 일컫는다. 단 불교의 식(識)은 서양과학의 의식(意識)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유식론(唯識論)이 발전하면서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여덟 가지[팔식(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그리고 그 식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8식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으로서,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고,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했다.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는데, 즉 눈(眼)이 색(色)을 접촉하면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꽃을 보고 꽃임을 알아보는 게 안식이다.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는데, 즉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소리를 듣고 종소리라고 아는 게 이식이다.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는데, 즉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 비식(鼻識)이 일어난다. 냄새를 맡고 쿠린내라고 아는 게 비식이다.

제4식은 혀로 맛을 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는데, 즉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 설식(舌識)이 일어난다. 혀로 맞을 보고 달다고 느끼는 게 설식이다.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하는데, 즉 몸(身)의 피부(觸)에 접촉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난다. 몸이 접촉했을 때 부드럽다고 느끼는 게 신식이다.


이처럼 5근(五根)이 5경(五境)을 만나 일어나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는데, 이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인식이다. 이와 같이 식(識) 가운데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5식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등 5근(根)이라는 육체의 다섯 부분에 의지해 활동하는 심식들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제6식은 어디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이냐 하는 것이다. 보통 제6식이 의(意)를 근거로 해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그 의근(意根)이라는 생각의 덩어리가 어떻게 제6식의 근거(뿌리)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견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소승불교의 견해를 보자. 인간의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즉,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말이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즉 앞생각을 의근으로 해서 뒷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6식의 의지처는 몸뚱이의 일부분이 아니라 생각[의(意)]이라서 심근(心根)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 활동에는 전5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상이라든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일어나는 여러 사고, 기억, 추리, 예상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것들을 제6식인 의식이라 한다. 즉, 제6식인 의식(意識)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마음을 뜻한다. 현재는 눈, 귀, 코, 혀, 몸 등 5근을 통해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선과 악을 결정하며, 모든 생각을 결정해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한다. 이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해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즉, 제6식인 의식은 전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 작용으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6 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5식과 공동으로 작용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과 단독으로 작용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 있다.


※오구의식(五俱意識)---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5식과 함께 작용해 그 대상을 분별하고 의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독두의식은 혼자 작용하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제6식인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5식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인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강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사고하는 정신적용 대부분이 이 제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바로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하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어서 요별식(了別識)이라고도 한다.

즉 전5식에 의해 인식이 일어나더라도 제6식에 의해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거나, 이것이 뭐다, 저것이 뭐다, 하는 분별이 생겨야 한다. 예컨대 꽃을 보고 꽃이라고 아는 것은 안식이고, 이어서 예쁘다거나 저 꽃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제6식 의식이다. 마찬가지로 맛을 보고 무슨 맛이라고 아는 것은 설식이지만 이어서 달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6근이 6경을 만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식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발생하는 조건은 6근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경우에 여섯 가지 경계(6경)에 부딪치고, 거기서 식이 일어나야만(확연한 느낌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식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눈(眼)의 경우를 보자, 외출했다가 귀가했다면, 그동안 길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그저 살짝 스쳐 지나간 정도였으므로 비록 접촉은 있었지만 확연한 느낌이 없었기에 접촉에 의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안식(眼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의식(意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으로 등록이 되지 못한 것이다. 느낌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부딪치거나,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라야만 안식이 일어나서 인식이 된다.

반면에 마주 오는 사람들 가운데 유별나게 예쁜 여인이 있어서 유심히 봤다고 하자, 이를 땐 안근이 제대로 갖추어서 눈길이 ‘예쁜 여인(경계)’에 닿아(부딪쳐) 유심히 봤을 것이고, 따라서 안식이 일어나서 의식에 의해 ‘예쁘다’ ‘한번 사귀고 싶다’ 하는 느낌인 의식이 성립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맹인의 경우 안근이 없기 때문에 색경이 있더라도 안식의 작용을 할 수 없어서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의 경우도 비슷하다. 소리라는 경계는 눈(안근)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드시 귀(이근)로만 들어온다. 입이나 혀를 통해서 소리를 인식하는 건 아니다. 즉 어떤 소리(경계)가 내 귀(이근)를 통해 들어와서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대뇌피질에 있는 의식(제6식)으로 가서, 아 이것이 차 소리구나, 아니면 기다리던 두부장수가 왔구나 하고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독서삼매에 들어 있으면 밖에서 차 소리나 두부장수 종소리가 났지만 못 듣는다. 이식(耳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귀(이근)가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경계가 다섯 가지 식을 통해 제6식(의식)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을 장미꽃이다, 비행기 소리다, 커피 냄새다, 꿀맛이다 하고 각기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몸으로 접촉해서 좋거나 싫은 것도 경계(촉경)이지만, 마음속에서의 온갖 느낌들, 이를테면 외로움, 답답함, 우울함, 질투 등의 느낌도 경계(법경)이고, 일상의 삶에서 시달리는 것은 경계 아닌 것이 없다. 즉 중생은 온갖 경계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좋은 경계가 닥치면 즐거워하고, 나쁜 경계가 닥치면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허나 수행자의 삶은 그 어떤 경계가 와도 좋고 나쁨의 분별이 없이 늘 여여(如如)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여함을 추구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런데 이 제6식이 동물에게도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동물에게도 제6식은 분명히 있다. 먹을 것을 보면 침을 흘리는 개의 마음이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이 아니라, ‘거칠지만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다시 말해 제6식의 결과라는 말이다. 애완견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제6식이 작용해서 그렇다. 그러니 동물들은 그저 지능이 낮을 뿐, 비록 거칠지만 의식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이란 선사가 있었다. 멋진 화두를 많이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선사인데, 어떤 선승이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조주선사께서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헌데 다른 스님이 물으니 이번에는 있다고 했다. 이는 개의 불성 유무를 놓고 따져 묻는, 즉 사소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견해를 타파한 공안(公案)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개에게 비록 미약한 6식은 있으나 불성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개는 스스로 수행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성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개보다 못한 사람이 많겠지만.

헌데 소승불교에서는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뒷생각이 앞생각을 뿌리로 의지해서 일어난다고 했다. 즉, 의근(意根)이 앞생각이라 했다. 하지만 돌발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어버렸다든지, 아니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이 일어나났을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생각의 등무간연이 단절될 경우, 제6식의 뿌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학이다.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의 뿌리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했다. 즉, 대승의 유식사상에서는 제7식 말나식을 의(意)라 하는데, 제6식이 이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므로 ‘의식(意識)’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제6식은 법경(法境)을 소연(所緣)으로 하고, 제7 말나식을 소의로 하는 식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제6식을 표층의식이라 한다. 본심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을 새로이 설정한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을 봤으며, 의식의 근거가 앞생각이라 했다. 즉, 소승불교에서는 앞생각이 뒷생각의 뿌리가 된다고 봤으나 유식학에서는 말나식을 상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나식은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로서,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 그리고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처럼 유식학에서는 8식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식(識)을 마음이라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마음을 일컫는 것이고, 보통 마음이라 하면 전5식을 포함한 제6 의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마음 혹은 생각이란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그리고 제7식부터는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심리로 들어간다. 따라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장미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에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 있다고 하자. 그 게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전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제6식은 보다 심층의식인 제7식, 제8식의 근거 위에서 제대로 의미를 발휘할 수 있다.

 

② 제7식 - 말나식(末那識, manas)

인간의 육신은 수만 년을 거쳐 진화해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육신의 진화에 따라 진화해왔다. 그리하여 초기 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 대승불교 유식학의 발전에 따라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은 여덟 가지(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8식(識)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 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인데,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며,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식(識)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즉,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고,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고,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고,

제4식은 혀로 맛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고,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한다.


이 5근(오관/五官)에 의지해서 생기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고,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식(意識)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한다. 이와 같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의 여섯 기관이 외부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인식이 6식인데, 그 중 제6식인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5식(前五識)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체로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며, 이 제6식까지를 보통 표층의식이라 한다.

그리고 유식학에서는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이며,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라고 해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하며, 무의식의 영역이라 했다. 따라서 제1식부터 제6식까지의 표면의식(표층심리)은 인간의 본심이 아니고,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의식으로 들어가는 제7 말나식이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고 했다.

제7식 말나식을 마나스식(Manas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칠감(七感), 전식(轉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말나식보다 더 심층의식으로서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고,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인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두 형제에 의해 유식학(唯識學)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AD 4세기 후반경인데,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바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나식은 삼식(三識)의 하나로서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해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는 아상(我相)을 가진, 이기심(egoism)이 있는 아주 깊은 무명의 뿌리이다. 이 말나식(末那識)은 6식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집착하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의식으로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 삼식(三識)---유식(唯識)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신 부처님 사상을 토대로 마음과 마음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의 불가분의 관계를 규명해낸 학설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심(心) ? 의(意) ? 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셋을 3식이라 한다. 심(心)은 아뢰야식을 말하고, 의(意)는 말나식을 말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을 일컫는다.


제7식은 제6식보다 심층심리이다.

말나식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6식(六識) 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6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광범위한 활동을 하므로 평상시의 의식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약 사고로 인해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하거나 정신착란이 일어난다면 그 때 제6식의 뿌리인 의근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식학(唯識學)에서 제6식의 뿌리로 제7식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했다.

그리고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해 갈 때, 일부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돼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AD 4~5세기 인도의 유식학파 사람들은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면서 부사의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됐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가 있어서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제6 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제6식인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심  의  식(心意識) 3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했다. 즉,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했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六識)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스크리트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뢰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8식으로 분류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心識)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제6식이 바로 이 제7식인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고 있는 식이므로 그 이름을 ‘의식(意識)’이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6식 외에 전5식조차도 오염시키는 게 제7 말나식이다. 결국 제7 말나식은 6식 모두를 오염시키므로 6식에 대한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셈이다.


 제7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다.

그리고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제7식의 작용이 활발하다고 했다. 인간의 자기 존재성을 자아(自我)라 하며,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작용이 자아의식이고, 이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제7식인 말나식이다.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의 본원인 것이다. 그래서 제7식 말나식을 자아의식이라 한다.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제7식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러한 심리작용은 자기 자신의 자의식에 집착해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我執)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자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무명의 뿌리이다.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나’라는 사람, 내가 여기 있다, 나는 고귀한 존재로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잘 났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제7식 말나식은 미세한 생각, 비언어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며, 모든 집착과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나’라고 하는 자아집착의식(自我執着意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집착으로 오염된 자아의식이다. 따라서 중생의 온갖 못된 생각은 모두 말나식이다.

그리고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정적이고 실재적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기적 사고를 최소화하며, 궁극적으로 멸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를 최고의 수행 목표로 한다.


 제7식은 이기심이 있는 의식이다.

인간은 자아의식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기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에 항상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의 4번뇌가 일어난다고 본다.


아치(我癡)---아치란 자아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무명이라고도 한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의 자기라는 것, 그러한 자기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견(我見)---아집(我執)이라고도 하는데, 자기의 견식(見識)을 고집하는 일이다.

아만(我慢)---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가 존재한다고 거만하게 우쭐하는 것이다.

아애(我愛)---아탐(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되어진 허상의 자아상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한 생사윤회의 고(苦)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4번뇌(4혹/四惑)와 함께 하므로 말나식을 망식(妄識)이라고도 한다. 즉 말나식은 인간 의식의 뿌리가 돼서 그때그때 나쁜 생각, 좋은 생각, 모든 허튼 생각을 계속해서 온갖 망상을 만들어내므로 수행이란 결국 말나식을 정화하는 것이다.

? 제7식은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한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 이외에 사량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8식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기분 나쁘다’라는 분별을 한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한다. 누가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이고, 센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런 결정을 제7식이 사량하는데,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치중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이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해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즉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을 나타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제7식 말나식이다.


말나식은 그릇되게 인식, 사량하는 경우가 있다.

제7식 말나식부터의 인간 심리 관찰을 보면, 불교에서 ‘마음’이란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려준다.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 정신이 아닐 때의 마음 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인데, 그것은 표현이 좀 모호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느냐 하면, 대개의 경우 바로 이 제7식까지이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해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돼 저장된다. 즉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제7식이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 국회에서 입법을 하는 것, 검사가 기소를 하고 판사가 선고를 하는 것, 대기업 CEO가 기업경경을 하는 것, 그리고 작게는 가정주부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사는 것 등을 비롯해서 사회나 가정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판단이나 결정이 대부분 이 제7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제7식이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더러 그릇되게 인식하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국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판단 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두가 제7 말나식이 잘못 사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라는 마음 자체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위험스럽게 여긴다. 어떤 경로나 어떤 이유로든 작위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을 번뇌의 주범으로 본다. 예를 들어 쟌발쟌(Jean Valjean)을 두고 보자, 그가 나쁜 사람인가, 선량한 사람인가,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의 예,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하자. 물건을 훔쳐간 도둑은 내겐 분명 도둑놈이고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도둑에게 되레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게서 훔친 것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을 해서 그 기증받은 사람에게는 은인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나의 ‘확신’은 주관적 사건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사항은 아니란 말이 된다.

이와 같이 얼핏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지거나 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것 같은 우리의 ‘의식’이 사실은 착오와 번뇌의 주범이라는 것이 유식학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보듯이 제7식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함으로써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는 심식(心識)이기도 하다.

이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식의 시비분별 작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때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조차도 실은 제7식의 분별상(分別相)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란 곧 이 제7식을 제어하려는 데에 그 시작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에고’에 집착하는 인간이 어찌 귀한 ‘에고’를 죽이고 뿌리 뽑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해 스스로를 길바닥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도의 수행이 돼야만 미련 없이 제7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③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vijnana)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심층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 제8식 아뢰야식이 제7식 말나식의 뿌리(의지처)이다. 즉,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말나식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제8식 아뢰야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정(淨)과 염(染), 선과 악 모두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이나 염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제8식, 心)은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6識)을 총괄해서 마음의 흐름에서 주체가 되는 잠재의식이다. 6식의 활동은 인식된 것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보존성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존재가 이어져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따로 상정하고 있다. 즉 업의 저장소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산스크리트어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종자를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돼 있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모든 일어난 일이나 생각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 아뢰야식이다. 여러 행위가 필름에 찍히듯이 업이 돼 아뢰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바로 말나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무시이래 각자가 해온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가 돼 제8식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된다(마치 CCTV에 녹화 저장하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훈습(薰習) 혹은 습기(習氣)라고 하는데, 종자에는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가 있고,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 모든 종자를 훈습시켜 담아둔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들을 저장하는 훈습작용을 한다. 우리가 잠자다가 꾸는 꿈은 제6의식의 영역인데,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업)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상들이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종자)을 형성하기도 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결과(업)를 일으키는 특수한 에너지(氣)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신체를 유지시켜 나가는 업력(業力)과 윤회의 심종자(心種子)가 저장돼 있는 곳으로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고 존재의 밑바탕에 붙어 있다가 알맞은 환경과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업력이 원동력이 돼 다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저장된 종자가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현행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으며,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로 계속 이어지면서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아뢰야식에는 모든 행위(업)가 발생 즉시 자동적으로 저장 입력된다. 행동하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저장되는 의식의 저장 탱크, 선악의 저축 뱅크다. 그리하여 6식의 심층에 아뢰야식이 있으며, 이 아뢰야식은 육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생으로 이관된다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바로 업(業)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이란 전생의 아뢰야식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으면 종자(아뢰야식)는 다른 모태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연기설(阿賴耶緣起說)’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해 일체 만법이 연기하는 것이 아뢰야연기설이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우리 몸속(아뢰야식)에 입력된 의식을 말하는데,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일어나는 생각을 업식(業識)이라 한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고 우리 마음 작용에 의해 변하며, 수행 정진에 의해 소멸도 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서 업이 소멸되면 아뢰야식 또한 없어지는 것으로 수행을 통해 자기 업장을 다 소멸시키면 아뢰야식 또한 소멸되는 것이니, 고정된 실체 혹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에 있다. 그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선정 수행을 함으로써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만 원권 돈다발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사람은 남이 볼가 봐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 넣고, 어떤 사람은 남이 보든 말든 돈을 주워서 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관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를 한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그 차이는 그들이 과거에 정신적 육체적 경험에 의해 축적돼온 종자의 차이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봤기 때문에 그 본 것이 종자로 저장돼 있다가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자기네 부모가 했던 짓을 자식도 따라서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종(善種)을 낳고 다시 선행을 가져오며, 악행은 악의 종자를 낳고 다시 악한 행동을 생산한다. 한번 훈습된 종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현행되는데 선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을 쌓으면 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악의 종자는 업장소멸을 위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의 종자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다.

헌데 원래는 8식까지만 있다고 했으나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후대에 제9식인 아마라식(Amala)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됐다.


④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Amala-vijnana)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혹은 아말라식(阿末羅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鎭如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 602-664) 계통의 법상종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섭론종의 9식설을 구유식이라 하고, 현장의 8식설을 신유식이라 한다.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원측(圓測)은 9식설을 취하지 않고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한다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 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현장(玄?) 이후에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8식이 성불하면 제9 아마라식이 되며, 제9식 아마라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9식 아마라식은 일반 중생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 대중이나, 아니면 이제 겨우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들일진대 감히 부처님의 경지인 제9식이야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부처님 경지가 아닌 중생들이야 8식까지만 논의해도 되는 것이다.

 

B

 

ㅡ[백일법문]p208~226ㅡ

 

1.심식설(心識說)의 근원

 

▶성철스님의 해설

 

유식학(唯識學)을 구성하는 주요 사항 가운데 아뢰야식(阿瀨耶識)이 있습니다.

실로 유식학은 이 아뢰야식을 구심점으로 하여 집약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 아뢰야라는 말이 불교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창안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곧 부처님이 법을 설하던 근본불교시대에 이미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대승의 유식파에서 사용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어쨌든 아뢰야라는 말이 부처님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주체가 식(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부파불교(部派佛敎)와

유식파에서 특히 강한데, 이와 같은 모습도 역시 근본불교의 경전에 간결하게나마 설해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유식학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심(心)·의(義)·식(識)을 각각 제8식, 제7식, 제6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그 심의식이라는 말은 이미 부파불교에서 논의되었고, 그보다 앞서

근본불교에서도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 이러한 말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유식파가 말하듯이,

그 심의식이 세 가지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부여하여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같이 원시경전에는 아뢰야식 및 심의식 등 후대의 대승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개념들이

원초적인 모습으로 설해져 있습니다.

이하에서 이러한 몇 가지 주요 사항에 대하여 원시경전의 설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철스님의 번역

그때에 세존은 조용히 앉아 묵묵한 채로 사념하였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적정하고 미묘하여 생각의 경계를 초월하고 지극히

미세하여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바이다. 그런데 이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하는 중생으로서는 이 연의성(緣依性), 연기(緣起)

인 도리는 보기 어려우며, 또 일체 제행(諸行)의 고요히 그침, 일체 의거(依據)의

내버림, 갈애(渴愛)의 모든 소멸, 떠남(離)·소멸(滅)·의 도리도 심히 보기 어렵다.

만약 내가 법을 설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 한다면 나는 피로하고

곤궁할 뿐이다. [律藏3 南傳大藏經 제3권 p.8 相應部經典 1권 p.234]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부처님께서 우루빈나 마을 니련선나(尼蓮禪那) 강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7일간 해탈의 기쁨을 누리시면서 초저녁에 연기(緣起)를 순역(順逆)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칠일이 네 번 지난 후 자신이 깨친 법을 일체 중생에게 전하려고 생각하니 위에 인용한

말씀과 같이 중생들이 아뢰야에 장애되어 이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아뢰야는 범어로 alaya로서 a는 '없다, 아니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laya는 '없어진다'는

뜻이므로 아뢰야는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역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인 '무몰(蕪沒)'이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아뢰야 alaya의 음을 표기한 경우에는 저장한다는 뜻인 장(藏)이라고 번역하는데,

오늘날은 대개 이 후자를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현재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 전생에도 있었고 미래 내생에도 있을 이 아뢰야는,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중생의 근본 생명입니다.

여기에 의지해서 중생세계가 벌어지는데, 이것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합니다.

이 근본무명이 아주 뿌리 뽑아져야만 연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연기법을 알아서 부처님 같은 정각을 이룰려면 반드시 근본 장애물인 이 아뢰야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 원시경전에 나오는 아뢰야라는 말은,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파에서 주장하는 아뢰야식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이 경전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중생들이 이에 집착하여 단절하기 어렵고, 진리를 장애하여 무명의 원인을 이루는

점에서, 원초적인 형태로 아뢰야식의 연원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2)

 

▶성철스님의 번역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에 계셨다.
"비구여, 다섯가지의 종자가 있느니라. 무엇을 다섯이라 하는가. 뿌리 종자, 줄기

종자, 가지 종자, 마디 종자, 종자(種子)의 종자이니라.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로서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지 않고 견고한 핵(核)이 있어 잘 저장되

어져도 만약 땅이 없고 물이 없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종자로서 썩고 부패하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아 견고한 핵이 없고

잘 저장되지 않아도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로서 썩지 않고 내지 잘 저장되어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모든 비구여, 이 다섯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그럴 것입니다."
"비구여, 지계(地界)란 네 가지 이 머물러 있음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수계(水界) 란 기쁨과 탐욕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다섯 가지의

종자식(識)과 식(食)의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구여, 색(色)에 붙어 식(識)

머문다면, 색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수(受)에 붙어…행(行)에 붙어 식(識)이 머문다면, 행(行)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누군가) 말하되 '나는 색을 떠나고 수를 떠나고 상을 떠나고 행을 떠나서

식(識)의 내왕(來往), 사생(死生), 장익 (長益), 광대(廣大)를 시설 할 것이다'라고

함은 옳지 않다.
비구여, 비구가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을 끊는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식(識)의 소연과 의지가 있지 않느니라.
비구여, 비구가 만약 수계(水界)에서, 상계(想界)에서, 행계(行界), 계(識界)에서

탐욕을 끊는 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고 더 자라지

않고 현행(現行)이 없어서 해탈하고, 해탈한 까닭에 머물며, 머무는 까닭에 족한 줄

알며, 족한 줄 아는 까닭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반열반

(槃涅槃)하여, 생(生)이 이미 다하고 범행 (梵行)이 이미 서고 짓는 바를 이미 다해

마치니 다시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제14권 相應部經典3 p.85-87]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다섯 가지 종자'란 식물종자를 자세하게 분류하여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종자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 생장하거나 생장하지 못함을 설명한 것은,

중생이 자발적인 노력과 수행의 여하에 따라 해탈하거나 삶과 죽음을 얽매임을 비유합니다.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으면 다섯 가지의 종자가 생장하고 증광하는 것과 같이, 중생에게도

식(識)이 있어서 거기에 탐욕, 애착이라는 물을 주게 되면 그 종자 즉 식은 생장하고 증광하여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계(地界)'는 네 가지 식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의 사온(四蘊)을 말하며, '수계(水界)'는

기쁨과 탐욕, 즉 애착심·집착심을 말합니다. '네 가지 식이 머문다' 함은 생사(生死)의 업(業)을

짓는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식(識)이란 주관인 주체를 말하며, 식(食)이란 반연되는 객관을 말하는데,

남전정장경의 원주(原註)에는 식(食)을 연(緣)이라 하였으니 객관인 소연(所緣)입니다.
다섯 가지 종자를 식(識)과 식(食)으로 비유한다 함은 종자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색(色)'이란 현상세계의 물질을 말하는데, 이 색을 객관 즉 소연으로 하여 식(識)이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애착심이 생겨 생장하고 증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생멸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受)·상(想)·행(行)도 같은 뜻으로 말합니다.
색(色)·수(受)·상(想)·행(行)을 반연하여 식(識)이 생멸하거나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을 끊으면 식(識)의 소연(所緣)과 의지(依支) 즉 식이 반연하는 상대가

없어져버립니다.
식(識)에서 모든 집착이 없어져서 증광하고 현행하지 않으면 자연히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해탈한 까닭에 스스로 반열반에 들어갑니다. 반열반이란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여열반(無餘涅槃)이지 유여열반(有餘涅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반(涅槃)이란 삶을 마감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대자재(大自在)를 얻음을 말합니다.

중생은 식(識)에 얽매여 모든 것이 부자유하여 생사윤회를 하고 있으며, 식의 탐욕과 속박을

근본적을 끊어버리면 대자재한 반열반의 해탈경계에 들어갑니다.

반열반하면 생(生)이 다하고 범행(梵行)이 서서 다시는 후유(後有), 즉 삼계(三界)에 윤회하지

아니합니다.
결국 중생이 삼계에 윤회하고 연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근본무명인 식(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원시 경전에는 생사에 윤회하거나 삼계를 해탈하는 주체를 바로 식(識)이라고

하였는바, 후대에 생사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나 이숙식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성철스님의 번역

비구들이여, 어떠한 것을 사량하고 도모하고 생각하여도 이는 식(識)이 정한 소연

(所緣)이니라 소연인 까닭에 의 머무름이 있느니라. 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 하기에 이르고,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할 때 미래에 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생기느니라. ……
비구들이여, 만약 사량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 정한

소연이 되지 않으며 소연이 없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없느니라. 식(識)의 머무름이

없고 증장하지 않을 때에는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하지 않느니라. 미래에 재유

생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태어남·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멸하느니라.

이와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소멸이니라.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經典 2권 p.96-97]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식의 소연인 사량과 분별이 있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있게되고, 식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는 이에

따라서 생사에 윤회한다는 것이며, 사랑분별이 완전히 끊어져버리면 영원토록 생사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사윤회와 해탈을 일신의 주체인 식으로써 해명하는 원초적인 모습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설한 점이 확인됩니다.

 

4)  

 

           ▶성철스님의 번역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계셨다.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 들은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고 해탈하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긴 밤에 이것은 내 것〔我所〕이라는 집착이

있어서, 이는 내 것이고, 이는 나〔我〕이며, 이는 나의 자아(自我)라고 취착(取着)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을 나〔我〕라고

생각함이, 심(心)을 나〔我〕라고 생각하기보다도 더하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사대로 만들어진 몸은 나타나서 1년을 머물고 2년을 머물고 3년을

머물고 4년을 머물고 5년을 머물고 10년을 머물고 20년을 머물고 30년을 머물고

40년을 머물고 50년을 머물고 백년을 머물고 다시 오래 머물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불리는 것은 낮과

밤에 전변 (轉變)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원숭이가 수풀 속을 배회하면서 한가지를 잡았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같이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이라고 불리는 것도 또한

낮과 밤에 전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緣起)를 잘 사유하느니라.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저것이 생함으로 이것이 생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으며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느니라.
곧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으며 행에 의하여 식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集〕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소멸에

의해서 행의 멸이 있으며, 행의 멸에 의해서 식의 멸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은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滅) 이니라.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색(色)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수(受)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상(想)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행(行)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식(識)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느니라. 싫어하는 뜻을 내는 까닭에 싫어하여

떠나느니라. 탐욕을 떠나는 까닭에 해탈하느니라.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經典二]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중생은 속박된 생활을 하고 있어 해탈 대자재한 생활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긴 밤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이 강하여 일체법과

일체 사물에 있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라고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이렇게 집착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므로 번뇌에서 떠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긴 밤〔長夜〕'이란 캄캄한 기나긴 밤중이라는 뜻인데 해가 지고 캄캄한 그때만 밤이 아닙니다.

자기의 진여자성을 보지 못할 때는 누구에게나 억천만겁이 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중생이 실제로 무명의 근본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참으로 진여자성을 보아서 청천백일 같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언제든지 캄캄한 밤중입니다.
이와같이 일체 사물에 집착이 강한 중생은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면보다,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로 구성된 이 육신을 보다 더 강하게 자기 자신〔自我〕의

당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수시로 변하여 이리 분별 저리 분별하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칩니다.
그것은 마치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다시 저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하여 육신은 태어나서 1년, 2년 혹은 10년, 20년, 또는 백년,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래 존속하여,

정신적인 것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마음보다도 몸을 더 자기 자신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연기의 진리를 깊이 배우고 사유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모든 괴로움을 걷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이루는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인 면을 이루는 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는 뜻을 내어 그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집착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마침내 해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역설하는 바는, 중생이 탐욕을 끊지 못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원인은 육신보다도 심의식(心意識)에 더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사대로 구성된 육신에 대해서는 더러 혐오하여 떠나려고 하고 해탈하려고 하지만,

정신적인 심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심의식은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듯이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뀌어 잠시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이 경전과 상응하는 한역 아함경에서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5)

▶성철스님의 번역

심·의·식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싫증을 내여 떠나거나 해탈하고자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차라리 사대로 된 몸은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일지언정

에는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이지 않느니라.
심·의·식은 밤낮으로 때를 다투어 잠깐 사이에 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 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수풀 속에서 놀면서 잠깐 사이에 여러 곳에서 나뭇가지를 잡아

한 가지를 놓고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느니라.
심·의·식도 또한 이와같이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느니라.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는 연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관찰하느니라.
而於心意識에 愚疾無聞凡夫는 不能生壓離欲解脫하니라 愚癡無聞凡夫는 寧於四大身에 擊我我所이라도

不可於識에 擊我我所니라 .....心意識은 日夜時就하여 須臾轉變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猶如 (선후)가 遊林樹間할새 須臾에 處處攀捉枝條하여 放一取一하니라

彼心意識도 亦復如是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多聞聖弟子는 於諸緣起에 善思惟觀察하느니라.

[雜阿含經 제12권 ; 大正藏 제2권 p.81하]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어리석고 무지하여 불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심·의·식을 떠나서 해탈하고자 아니하지만,

불법을 바로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를 잘 사유하고 관찰하여 정등각을 이루고 반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밝혀지듯이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말은 오늘날 주로 유식학적으로 사용하지만,

본래는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부터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정신적인 면을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유식학에서는 심(心)을 제8식, 의(義)를 제7식, 식(識)을 제6식이라고 규정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 것입니다.

 

 

2.아뢰야식설

 

▶성철스님의 해설

 

 

한편으로는 공이나 연기, 중도 등을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유식의 심의식 (心意識) 문제를 늘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도, 연기, 진여법계 등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심의식의 근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눈을 가려서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도와 진여 이것을 바로 깨치려면 심의식의 근본무명인 아뢰야식을 해결해야지

그 이전에는 참으로 중도나 연기·불성을 깨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식학파에서는 생사 윤회하는 주체로서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합니다.

즉 개개인의 선·악 업으로 인하여 그 과보를 받는 주체를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이 근본무명의 주체이자 심의식의 가장 깊은 근원인 아뢰야식에 대하여

해설하고자 합니다.

이 부문의 맨 나중에 인용한 것은 유식부의 경론이 아닌 선어록(禪語錄)에서 발췌한 것인데

즉 유식종에서 수립된 심식설은 선수행(禪修行)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를 옛적부터 중시한 큰스님들의 어록에서 얼마간 인용한 것입니다.

 

 

⊙해심밀경

 

 

1)

 

 

             ▶성철스님의 번역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심의식의 비밀한 뜻을 설하리라.

광혜야, 너는 마땅히 알아라.

육도의 생사에 있는 저 유정(有情)들이 저 유정들의 무리 가운데 떨어질 때, 혹은 알로

나고 혹은 태로 나고 혹은 습기로 나고 혹은 화해서 나고 혹은 분신해서 난다.

그 가운데 최초 일체 종자심식이 성숙하고 반복하여 화합하고 더욱 자라나 커지니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하느니라.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과(그것이)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수요,
둘째는 상명(相名)분별의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수이다. 유색계 중에서는

두가지 집수를 구비하며, 무색계 중에서는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지 않느니라.
광혜야, 이 을 또한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몸에 따라

다니며 집지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니 왜냐하면

이 몸 가운데서 섭수하고 간직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心)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식이 물질·소리·향기·맛·감촉 등을 쌓이고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하여 이 뜻을 밝히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아다니식은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니 저들이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

吾當爲汝說心意識秘密之義하리니 廣慧當知하라. 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彼有情衆中할새 或在卵生或在胎生하며 或在濕生或在化生하며 或在身分生起하니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이 成熟하고 展轉和合하여 增長廣大하니 依二執受니라.
一者는 有色諸根及所依執受요 二者는 相名分別言說戱論習氣執受라. 有色界中에는
具二執受하고 無色界中에는 不具二種이니라. 廣慧此識 亦名阿陀那識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於身에 攝受藏隱하여 同安危義故니라 亦名爲心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色聲香味觸等의 積集滋長故니라.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阿陀那識이 甚深細하여 我於凡愚에 不開演하노라. 一切種子如瀑流하여 恐彼分別執爲我하노라. [解深密經 ; 大正藏 16, p. 692 中.下]
 
 

▶성철스님의 해석과 해설

'심의식'에서 심(心)이란 제8아뢰야식이고, 의(意)란 제7말나식이고, 식(識)이란 제6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의식이란 8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곡식 같은 것이 다 자라서 시들면 종자만 남아 그로부터 다시 싹이 돋아나듯이, 유정(有情)이 생멸할 때에 사람의 심식도 그러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일체의 종자식이 남아 윤회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곡식의 종자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정의 근본식이 종자식이
되어서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종자식이 주위의 환경과 여러 가지로 화합하여 증가하고 자라므로 생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일체 종자식은 두가지 집수에 의지하여 자라납니다.

하나는 유색(有色)으로 된 육근(六根)과 그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모습과 이름으로 인한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우리의 종자식을 훈습하게 되며 육도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단계(三界) 가운데 유색계 중에는 생사가 있으므로

두가지 집수를 다 구비하고, 무색계 중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곳이므로 두 가지 집수를

모두 구비하지 않습니다.
'아다나(阿陀那 : adana)'란 번역하면 '집지(執持)'인데, 아뢰야의 다른 이름입니다.

집지란 가진다는 말인데 선업이나 악업의 세력 등 모든 종자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다나식은 유정의 몸에 언제든지 따라다니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종자의 근본이 없어지므로

모든 식의 뿌리가 다 빠져버립니다.
아뢰야(阿賴耶 : alaya)'는 '무몰(蕪沒)'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뢰야식이 유정의 몸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수하고 창고처럼 저장하여 편하든지

고생하든지 간에 늘 이것이 근본이 되어 활동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일체의 종자를 또한 심(心: citta)이라고 하는데 이 식으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 등이 쌓이고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아다나식이 곧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이 곧 종자식이며,

종자식이 곧 심입니다. 이처럼 제8식은 여러 가지 성질에 입각하여 각각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야뢰야식이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고 한 까닭은 말해도
못 알아듣고 도리어 반대를 하고 비방만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학자들도 아뢰야식이 있다는 증거를 댈 수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르러서 윤회가 어느 정도 확증이 된만큼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윤회하는

근본종자가 없어지게 되므로 여기에서 아뢰야식이 결국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증명의 일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여 중생이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고
한 까닭은 중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영원불멸하는 자신의 실체로 삼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체 중생은 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사를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에 전쟁을 포함시켜도 상관없고, 설사 포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생사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시간적으로만 다를 뿐 윤회라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유식에서 논의하는 아뢰야식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사상으로서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에서는 이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원시경전 중에는 심의식설도 있고 종자식설도 있었으며 아뢰야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다나라는 용어는 없지만 아뢰야라고 하면 아뢰야 속에 집장(執藏)·능장(能藏)·소장(所藏)의 뜻이
내재되어 있는만큼 그 뜻이 서로 통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나라는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뢰야연기설이라는 것이 후세에 새로이 나온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시 경전에 거의 다 원초적으로 설해져 있는 것을 그 뒤에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불타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