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경의 경우도 신화나 종교적 장치를 제거하고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사실 기독교도 각종 신회적 장치나 종교적 장치를 제거하고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았습니다.

 

나아가 종교는 초합리성 영역에 대해 문자를 통해 말하는 것이므로 불립문자적 방법론을 채택하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해요.

 

부처는 자신의 수행중에 극단적 수정주의와 극단적 고행주의를 모두 피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도라고 했구요.

 

수정주의는 사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즐거움을 추구하는건데 이거 한번 빠지면 못빠져나오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요 이건 쾌락주의의 다른 버젼입니다. 육체적 쾌락이 아닌 마음의 즐거움인데 에피쿠로스도 사실 이걸 추구했죠. 단전호흡하면서 하는 것도 사실 이와 비슷해요.

 

힌두교 수행자중에 이걸 하는 사람이 많다고있다고 하더라구요. 일부에서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 영지주의도 있었듯이 수정주의를 넘어 육체적 쾌락을 탐하기도 한게 있나 봅니다. 사실 불교적 전통에서는 이것과 거리가 뭘죠. 나아가 불교는 엄한 계율이 있는데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일 단계가 될때 계율도 준다고 하네요

 

반면 고행주의는 극도로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고 나아가 마음을 학대하고 해서 먼가를 이뤄보겠다는 거였습니다. 지나교가 대표적이죠 사실 기독교에서 기도하면서 선정에 들어가는 사람 많다고 하고 나아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고행주의에 가깝습니다.

 

붓다는 선정도 하고 계율도 지켰지만 선정을 통해 자기를 높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부정하면서 본래의 여래를 만났고 계율을 지키면서도 극단적 고행으로 몸을 학대하지도 않음으로 육과 영의 실체적 이원론도 극복했습니다.

 

예수의 경우를 보면 고행도 하고 마음의 기도를 통해 선정도 했던 것 같아요. 변화산 사건에 보면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면 옷이 빛과 같이 희었다 머 이런거 나오잖아요. 베드로는 그때 초막 셋을 짓고 같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거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려왔구요(선정을 하되 거기에만 머물지 않음) 하지만 어떤 경우는 먹는 것을 탐하는 자라는 소리를 바리새인들에게 들을 정도로 극단적 고행은 피했어요.(율법은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섬) 바울의 경우도 육과 영을 나눌때 마음 내에 육적인 것과 마음 내의 영적인 것을 나누었지 육체 자체를 악이라고 보지는 않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붓다도 공통점은 선정이나 고행의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통해 참 자기자신을 봤다는 겁니다. 붓다는 자아의식 넘어 참 자기를 봤고 예수도 자아의식 넘어 참 자기를 봤어요. 그래서 결국 정등각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요. 악마의 시험과 유혹이라는 건 모두 거짓자아가 참 자아를 보지 못하도록 막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붓다는 자기의 왕관(물론 일부 불경에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바세계로 내려왔다고 함) 을 버렸고 예수는 혁명적 지도자(나아가 일부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버렸다고 하기도 함)가 될 수 있는 것을 버렸습니다. 거기다 예수는 자기 몸 자체를 전 인류를 위해 보시했구요.

 

아브라함도 자기 고향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다윗은 동굴에서 사울을 죽이면 왕이 바로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버렸고 불교도가 출가할때 자신이 가진 지위와 부를 다 버렸고 나아가 보살도 역시 모두 그런 것과 일맥상통하죠. 베드로는 자기 어부 직업부터 다 버리고 예수를 쫒았지만 부자 청년은 그걸 저어했죠.

 

예수가 한 유명한 말 중에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라는 것과 모두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붓다 역시 인과응보를 통해 이걸 말했고 나아가 일체개고 일체무아 일체무상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유명한 유대 랍비에게 중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생이라면서 거듭남이 먼지도 모르냐고 물었죠. 이것은 불교 선문답의 하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선이라는 결국 거듭나기 위해 자기자신을 보는 거거든요. 명상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 선이라는 의미에요. 출애굽기의 광야는 바로 그런 자기부정의 시간이고 선수행의 시간이죠. 그런데 모두 그 과정에서 자포자기 하고 넘어지는게 일반적입니다. 진짜 자기를 보지 못하는 거죠. 말라식과 업장에 의한 자아에 휘둘리다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말렉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공격하는 내용은 바로 이걸 의미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가 말한 새 계명 즉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깨닫아라는 것으로 자기가 죽고 새로운 여래적 마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대승적 보살도를 행하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고레스는 왜 조로아스터교도 임에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사실상 섬겼다고 보았을 까요. 그는 약한 족속인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풀어주고 나름에 보살도를 행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아가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렸구요.

 

욥기는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 모든게 허망함을 깨닫고 결국 참 자기를 발견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부정하고 자아에 휘둘리지 않은 좋은 선의 화두가 아닐까요? 일종이 간화선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하나 붙들고 가다보면 자기를 잊어버리면서 깨닫음에 들어가는 거 말입니다.

 

선악과 나무의 메타포는 결국 인간이 선악의 판단의 주체 즉 자아가 없음에도 자아가 있다고 판단하는 주체로 되면서 허망한 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아닐까요?

 

사탄은 결국 그런 자아로 똘똘 뭉친 존재가 아닐까요? 반면 하나님은 자기는 잊어버리고 항상 피조물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닐까요? 부모가 항상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식만을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 자식이 자기꺼라는 망상식에 빠져버리는게 일반적이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보이지 않으니 그게 안되지만 자칫 일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보는 거나 또는 일부 신학에서 자기 신학만이 하나님을 잘 믿는 거라는 생각은 혹시 부모가 한없이 베풀면서 자기를 잊어버림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식이 자기꺼라는 망상식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는 격이지 않을까요? 유대주의의 선민의식이 틀린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요? 샤머니즘에서 신을 조정하고 귀신을 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머가 다를까요?

 

사탄에 대한 표현중에 재미있는 것은 아침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덮은 자요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이랬다고 나오는건 바로 이런 자아의식 밖에 없어서 자성으로 똘똘 뭉쳐버린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불교적인 수정주의 VS 고행주의는 기독교에서 믿음 VS 행함과 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해요. 선정에 들어 마음을 관하여 깨닫아 참 나를 발견해야 하는데 잘못된 수정주의는 자아의 확대를 추구하면서 마음의 즐거움만을 추구하져. 먼가 된 거 같은 그런거. 하나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듯이 자아를 부정하고 여래를 만나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의 즐거움만 추구하면서 나아가 우주와 내가 하나되겠다는 느낌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힌두교적 명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수메르 신화는 결국 왕이 자신의 목적하에 신까지 조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고 그 결과 차별적 세상을 만들었구요 반면 출애굽한 유대인 지도자 모세는 신에 의해 인도되는 관점을 서술하고 있고 그 결과 희년이라는 해방적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자는 자아가 중심이 되어 차별적 판단으로 살아가는 중생의 삶이고 후자는 자아를 버린 상태에서 여래의 인도에 의해 살아가는 각자의 삶이라는 거죠.

 

신이냐 법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신이든 법이든 그 안에 내용이 중요하다는 거에요. 수메르종교 힌두교 소승불교는 자아를 추구하는 종교인 반면, 유대교 기독교 대승불교는 자아를 버리고 그 너머의 이끌림에 따라 사는 종교라는 것이죠. 신이냐 법이냐는 수단의 문제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자아에 대한 관점의 문제입니다. 초합리성은 결국 자아를 극복하고 저 너머의 세계를 지양하는 것인데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봤자 실제는 자아를 추구하다가 노예처럼 살것이냐 아니면 자아 너머의 세계를 바라봄으로서 참 자유를 얻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은 눈이라는 율법적 내용이나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윤회는 자아로 살아갔을때의 무서운 숙명적 법칙인 반면 은혜의 세계나 해탈의 세계는 자아를 넘어서서 살아갈때의 행복한 자유의 법칙이지 않을까 합니다.

 

자아부정은 결국 사랑이나 대자대비한 마음과 통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고린도전서 사랑장을 보시면 일반적인 사랑을 뛰어넘는 것임을 알 수 있구요.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이런 논의도 사실 앞뒤를 바꿔 이야기한 것으로 앞치나 뒤치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원래 여래와 부처의 자리가 있어 선하다고 하나 원래 악한데 그걸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는 거나나 보는 관점의 차이니깐요.

 

사실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는 좁은 길은 소수만 간다고 하잖아요. 중생하는 사람이나 깨닫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극락으로 가서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좀 나온지만 여전히 이들도 소수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 지옥 축생 등에 의한 심판은 아무런 모순이 없지요. 반면 기독교 신학에서는 안타깝게도 차별적 구원 즉 예정된 자만 구원받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원한 지옥이라는 극히 몰상식적인 결과를 초래하죠. 거기에 어떤 윤리적 정당성도 찾아보기 어렵구요. 다만 신의 뜻이라는 맹종만 있을 뿐인데 그것이야말로 자성의 극치 논리죠. 신이 정했어 개소리 말어 이런 건데 이거야말로 개소리라고 봅니다. 신이든 법이든 그런 인과응보법칙이 있음에도 자아에 매몰되어 산 결과라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개소리(헛된 신학=망상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해요.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도 신을 믿고 예수를 믿어 신이나 예수를 화두삼어 결국 자기를 버린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결국 간화선을 한 것이니깐요. 인생을 통해 신을 화두로 매달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간화선의 극치가 아니고 멉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은 정말 화두공부로 제격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게중에는 기복신앙에 빠진 자도 있고 바리새인 처럼 율법주의에 빠진 자도 있고 또 극단적 신비주의에 빠지구요. 모두 자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케이스이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런 성경구절도 있구요

 

나아가 초기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부정해버렸는데 사실 이게 기독교적 모순의 출발이였지 않나 생각해요. 초기 기독교 교부 중에는 윤회를 인정했다는 주장도 있더라구요. 다만 윤회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선재론적인 관점(플라톤이 이런 경우로 영혼불멸과 연결)의 윤회는 불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회부정이 바로 영혼선재론적 관점의 윤회부정이라면 불교와도 어느정도 통할 수 있다고 봐여. 다만 기독교는 최후 심판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윤회시 지옥 천국이라는 관점으로 축소해 놓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족하구요.

 

2.

 

숭산스님의 선불교 이야기 입니다. 참고하시라고

  

여기에서 보면 조주스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http://www.youtube.com/watch?v=PBQp4ZymX7Y

 

밥은 먹었니 그러면 밥그릇을 딱아라 이 소리는 마치 뭘 배울려고 마음을 채웠니(=자아작용)그러면 그 배울려는 마음 가득한 배후의 자아를 버려라는 말로 들립니다.

 

나아가 조주스님이 머리에 짚신을 이고 그냥 나가버린 것은 고양이를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자체를 보고 그것은 자아의 작용일 뿐이라는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네요. 나아가 이것을 보면서 예수가 말했던 머리로도 맹세히지 말라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수 없음이라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인과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에서는 자아가 이걸 조종하는 것 같지만 즉 자유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과법칙에 철저히 갖혀 있다는 것이죠. 이걸 벗어나는 것은 자아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구요. 그때서야 맹세를 할 수 있고 원을 세울 수 있는 것이거늘.

 

3.

 

아침112님이 아미타불등이 기독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냐는 그런 말씀을 아래에서 하신 것 같은데 글셰요 붓다 역시 보살도에 대해 말했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도 있습니다.

 

http://ftp.buddhism.org/Korean/%BA%D7%B4%D9%C0%C7%BB%FD%BE%D6%BF%CD%BB%E7%BB%F3.html

 

"이렇게 해서 집을 뛰쳐나온 야사는 붓다께서 머물고 있던 이시빠따나로 오게 되었는데, 붓다는 괴로워하는 야사를 자리에 앉게 한 뒤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보시(布施)을 실천하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기 마련이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

 

이와 같이 붓다가 야사에게 들려준 법문은 보시와 계율, 그리고 생천(生天)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각각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불리는 이들 세 가지를 차제설법(次第說法: 순서대로 설법함)이라 하는데, 특히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시(施)는 보시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갖가지 공덕을 말하고, 계(戒)는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질서의 유지라는 두 가지 덕행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인 선(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일상 생활을 영위한다면, 사후에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붓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써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입니다"

 

이게 팔리삼장 율장의 내용인데 가장초기경전에 해당됩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3p1484a 그리고 이미 인도에서 일반 민중들 사이에 신봉되었다고 하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해 붓다도 이러한 신봉에 대해 인정을 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실크로도를 통해 볼때 6세기부터 조로아스터교부터 해서 불교까지 유대지역 나아가 이집트 지역까지 서로 교섭할 수 있는 물리적 가능성이 있었다고 봐요. 예수는 어쩌면 불교적인 깨닫음을 유대적인 버젼으로 재해석한 천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나아가 구약 전체가 그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았고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십자가를 통해 버리는 진정한 보살도를 실천했구요. 나아가 예수가 나중에 바울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것자체가 완전히 대승불교적 이야기와도 일치해버리네요.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와 관련해서는 부처의 제자가 된 가섭형제가 바로 조로아스터교도 였던것 같아요.

 

http://ftp.buddhism.org/Korean/%BA%D7%B4%D9%C0%C7%BB%FD%BE%D6%BF%CD%BB%E7%BB%F3.html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큰 수확은 깟사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개종시킨 사건일 것입니다. 이들 깟사빠 삼형제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종교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일 먼저 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삼형제 중 첫째는 우루벨라 깟사빠(Uruvelā Kassapa, 優樓頻螺迦葉)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숲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인데, 그는 우루벨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 강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팔리어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입니다. 그는 하류(下流)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도 2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해탈을 목표로 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의 신 ‘아그니(agni, 火神)’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으며,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하였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혹은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와 수행 내용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

 

이것으로 상당부분 불교내에서 조로아스터교적인 요소가 사후에 들어오지 않았나 추측해보아요. 하지만 어차피 방편으로 나아가 화두로 접근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든 별반 문제가 안되요. 반면 기독교는 신의 계시이고 그것도 특정 신을 믿어야 하고 나아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 된다고 하니까 그 계시의 역사성과 실재성이 설명이 되어야 그들 기독교 신학 특유의 교리의 독점성이 설명이 되는데 사실 대부분 이게 역사적으로 규명이 된 적이 없고(모세이야기 처럼)  결국은 믿음의 차원으로 결국 넘어가 버린다는 거에요. 반면 불교는 실제 참선수행이라는 마음공부를 통해 판단하면 되는 것이므로 불경의 내용이 꾸며졌는지 어쩌니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는 거죠.

 

참고로 이건 해석학이지 과학이 아닙니다. 나아가 과학은 합리성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지 궁극적 가치의 문제 있어서는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고 봐요. 그리고 초합리성을 부정하는 관점 역시 결국은 해석학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반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불경 해석학은 기존의 경직된 신학으로는 그냥 불교는 사탄의 작품이 되어 버릴 듯 싶네요. 반면 불교적인 관점의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자체가 훌륭한 선불교라고 보여지구요. 즉 하나님을 화두로 한 간화선으로 결국 자아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고 이게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