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상대주의(moral relativism)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도덕 심리학에서는 보편적인 규범이 없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도덕성의 일부가 진화한 인간 본성이라는 주장과 대비된다. 이 글에서는 도덕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 철학에서 도덕 상대주의는 도덕 규범의 정당화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때도 있고 불간섭주의를 의미할 때도 있다. 남에게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간섭주의다. 이 글은 불간섭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나는 과학의 교권과는 달리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수준에서 도덕 규범은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입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도덕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강간은 나쁘다와 같이 아주 뻔해 보이는 규범 역시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강간이 고통을 주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왜 고통을 주는 것이 나쁜가?라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칸트와 같은 도덕 절대주의자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도덕 규범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편적 규범이 될 수 있는 것만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을 제시했다. 하지만 왜 보편적 규범이 될 수 있는 것만 규범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칸트는 답할 수 없었다. 칸트의 도덕 철학에 심각한 횡설수설이 포함된 이유는 그런 불가능한 과업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 상대주의자다.

 

 

 

하지만 나는 불간섭주의자는 아니다. 적어도 불간섭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불간섭주의자들은 어차피 근본적인 수준에서 도덕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덕은 입장 또는 취향의 문제일 뿐이며 남의 도덕적 입장 또는 도덕적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지미 헨드릭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를 좋아하고 모차르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모차르트만 듣게 하고 지미 헨드릭스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어떤 규범을 지지하는 사람이 그와는 규범 체제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불간섭주의자들은 불간섭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하다. 절대 다수 사람들이 강간은 나쁘다라는 입장을 지지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지하게 강간은 전혀 나쁘지 않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강간을 범했다고 하자. 일관된 불간섭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강간범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강간이 전혀 나쁘지 않다는 입장 역시 존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실제 쟁점들에 부닥쳤을 때 과연 이렇게까지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강간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불간섭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어떤 불간섭주의자들은 남에게 명백한 피해를 주는 사례를 예외로 할 것이다. 강간 같은 경우에는 남에게 명백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불간섭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피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바로 도덕적 입장에 의존한다. 정신적 고통 등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바둑 세계 대회 결승전에서 지면 보통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는다. 그렇다고 결승전에서 상대를 이기는 것을 금지해야 하나? 바둑에서 지는 것도 괴롭고 강간 당하는 것도 괴롭다. 절대 다수는 이 중에서 강간의 경우에만 고통을 처벌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절대 다수가 강간은 나쁘다라는 규범에 동의하는 반면 바둑에서 이기는 것은 나쁘다라는 규범에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복지와 세금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복지 제도를 옹호한다. 좀 웃기는 표현을 쓰자면 복지 제도는 강제적 자선이다. 부자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받아내서 가난한 사람에게 쓰는 것이 복지 제도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입장 즉 복지 제도를 세금을 많이 내고 싶어하지 않는 부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간섭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하면 어떨 일이 발생하는지 생각해 보자. 그러면 국가 제도가 성립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국가의 형태를 갖춘 모든 나라에 세금에 대한 법이 있다. 세금에 대한 법은 강제적이다.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안 내고, 내고 싶은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세금을 낸다면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불간섭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강제 없이도 국가가 잘 운영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극단적인 성선론자다. 아니면 제도를 몽땅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인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다. 국가가 없으면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불간섭주의자들은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서로의 도덕적 입장을 존중해도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도덕 규범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적어도 한쪽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대한 도덕적 입장이 서로 다르다면 강제가 불가피하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강간은 심각한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간범이 강간은 죄가 아니다라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내세우며 처벌 받지 않겠다고 버티면 결국 강제력을 쓸 수 밖에 없으면 완강하게 저항한다면 강제력은 폭력적인 양상을 띨 수 밖에 없다. 세금 문제에서 양상은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이 국가 운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자가 누진세는 옳지 못하다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내세우며 세금을 많이 내기를 거부한다면 강제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누진세 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국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부자가 가난한 사람과 똑 같은 액수의 세금만 내겠다고 우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세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있다.

 

나는 동성애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도덕적 문제에서 불간섭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강간과는 달리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도덕적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동성애 처벌을 반대한다.

 

나는 도덕은 취향의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가 그 표현을 쓴 것은 도덕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지 내가 불간섭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201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