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늘 등장하는 단어가 “익명성”이다.

 

문제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규제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경우,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양심과 이상 그리고 질서를 추구하는 감시자인 '슈퍼에고'가 굉장히 약해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를 막기 위한 자체 검열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사전에 방지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사후 조치에 그칠 뿐이다.

'일베'가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거의 모든 자기 검열이 완전 해제되어 버린 듯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을 비난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대중들은 일베로 인식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토록 일베를 싫어하는 대중들도 크레용팝을 일베로 낙인 찍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일베가 하는 방식 그대로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용팝 또 '일베' 논란, 진짜 중요한 문제는...

[주장] 인터넷 배설문화, 이대로 좋은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4108&CMPT_CD=P0001

 

수십 만 회원을 가진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들에는 어디나 악성 댓글이 달라 붙는다. 실명으로 가입하는 포털사이트 등은 덜한 편이지만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회원이 될 수 있는 사이트는 정도가 심하다. 대표적인 게 디시인사이드나 이 곳에서 약 2년 전 떨어져 나온 일베, 국가정보원 여직원 사건으로 이슈의 중심에 선 오늘의 유머, 티드립 등이다. 이런 곳에서 구글의 지메일(Gmail) 등으로 가입하면 익명성이 보장된다. 외국계 이메일은 국내 압수수색 영장도 통하지 않는 치외법권 메일로 통한다.

이러니 익명성에 기대 온갖 욕설과 성적 비하, 인신공격, 억지 주장을 댓글에 마구 풀어내고 있지만 사실상 통제가 되지 않는 실정이다.

죄의식이 없다막장 '댓글 테러

"성폭행 당했으면 영광지하철 참사 통구이위암 마케팅…"

온갖 욕설·억지 주장 황당한 글 쏟아내자정 노력·대책 절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302/h2013022202352221950.htm

 

 

 

익명성 보장이 일베에 반사회적 글이 많이 올라오는 이유 중 하나라는 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듯하다. 나 역시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하면 부도덕한 행위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왜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도덕한 행위를 더 많이 하는 것일까? 크게 보면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발달 가설: 인간은 들킬 가능성이 작아지면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작아진다는 점을 자라면서(즉 발달development하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들킬 가능성이 작아지면 부도덕한 행위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둘째, 진화 가설: 우리 조상들 중에 들킬 가능성이 작을 때 부도덕한 행위를 더 많이 했던 이들이 그렇지 않았던 이들보다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들킬 가능성에 대응하도록 부도덕한 행위를 조절하는 심리 기제가 진화했다.

 

 

 

이 두 가설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진화 가설과 발달 가설이 모두 옳을지도 모른다. 들킬-가능성-부도덕한-행위-조절 기제도 진화했고, 후천적 경험을 통해 들킬 가능성과 처벌 사이의 인과 관계도 익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달 가설이 옳다는 점은 거의 뻔해 보인다. 적어도 정상적인 어른은 들킬 가능성과 처벌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이 어른의 행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다.

 

“과연 진화 가설도 옳은가?”가 논점일 것이다. 과연 들킬-가능성-부도덕한-행위-조절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을까?

 

 

 

만약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켜서 처벌 당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며 “들키면 처벌 당할 가능성이 높다”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가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때에 나쁜 짓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다면 그런 선천적 기제가 있다는 진화 가설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연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냥-채집민과 현대인을 비교해 보면 현대인의 비만이 두드러진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현대인의 비만을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의 차이로 설명한다.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기가 현대 산업국만큼 쉽지 않았다. 또한 현대 산업국에서는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사냥-채집 사회에 맞도록 진화한 지방-축적 기제나 식욕-조절 기제가 현대 사회에서 비만을 일으키기 쉽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익명성과 관련하여 사냥-채집 사회는 현대 도시 사회와 대조적이다. 사냥-채집 사회는 소규모 투명 사회인 반면 현대 도시 사회는 대규모 익명 사회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익명성이 더 많이 보장된다. 도덕성과 관련된 심리 기제들은 사냥-채집 사회에서 오랜 기간 진화했다. 도시 사회에서 일어난 진화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 옆으로 제쳐두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대규모 익명 사회에 비해 소규모 투명 사회에서는 더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적응적이다. 나쁜 짓을 하다가는 이리저리 들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냥-채집 사회에 맞추어 “설계”된 인간의 양심이나 죄책감이 익명성이 많이 보장되는 공간에서도 상당히 강력히 작동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베의 반사회적인 글을 보고 “익명성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시라.

 

정말 익명성이 완벽히 보장된다면 양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짓을 할 것 같은가? 실제로 익명성이 상당히 보장되는 상황에서 또는 들킬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자신이 양심을 완전히 떨쳐 버렸는가?

 

들키지 않을 것 같을 때 휴지를 아무 곳이나 버리는 정도는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들키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자신을 열 받게 한 아이를 목 졸라 죽이지는 않는다. 양심은 남들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상당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과 사이코패스의 차이점이다.

 

 

 

익명성은 부도덕한 일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지만 도덕적인 일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내부 고발이 대표적인 사례다. 익명성이 보장될수록 내부 고발이 활성화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시위대(특히 전투조)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적어도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찰에게 들켜서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렸다.

 

일베를 분석할 때 익명성이 부도덕한 행위로만 이어진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반사회적이라고 평가하는 일베 게시물 중에는 누가 봐도 반사회적인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일부 열혈 일베 회원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어 보인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 출신 이민자에 대한 일반화되고 극단적인 적개심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입장에서 보면 악이지만 극단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선이다.

 

“한민족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구호는 적어도 그 구호를 외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적이다. 이제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과 보수 신문인 조중동도 다문화 가정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는 실명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이야기하기 힘들어졌다.

 

 

 

수십 년 전에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위대에서 복면을 쓰면 보수파는 “떳떳하다면 왜 복면을 쓰냐?”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21세기에 일베에서 극단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일베 회원에게 “떳떳하다면 왜 익명성 뒤에 숨어서 글을 쓰냐?”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례를 이렇게 병치해 놓으면 양쪽 다 기분이 나쁠 것이다. 어쨌든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익명성 뒤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정리해 보자. 나는 “일베 회원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서 부도덕한 글을 쓴다”라는 명제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사이코패스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양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지탄 받는 글을 쓰는 일베 회원들 모두가 사이코패스일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익명성과 지탄 받는 글 사이의 관계는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몇 가지 경우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

 

1. 익명성이 보장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이코패스 일베 회원.

 

2.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신도 부도덕한 글이라고 생각함에도 일베에 올리는 양심이 어느 정도 완화된 비사이코패스 일베 회원.

 

3.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극단적 반공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반전라도주의(?), 반여성주의(anti-feminism) 등을 익명성을 이용해서 설파하는 일베 회원.

 

4. 자신이 올리는 글의 도덕적 함의(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얼마나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일베 회원.